수원 화성의 방화수류정에서 차도를 따라 삼일공고 쪽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도로 좌측에 작은 비각이 하나 서 있다. 그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신경을 쓸 일도 없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그런 비각이다. 이 비각은 바로 보물 제14호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이다. 안내판이 없다고 하면, 아무도 이 작은 비각 안에 서 있는 탑비의 존재를 알 수가 없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소중한 문화재

 

진각국사조탑비는 창성사 터에 서 있었다고 한다. 이 탑비는 고려 우왕 12년인 1386년에 명승인 진각국사(1307 ~ 1382)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로, 원래는 수원 광교산 창성사 경내에 건립한 비이다. 진각국사는 충렬왕 33년에 출생하여 13세에 화엄종 반용사에 들어가, 19세에 상풍선에 오른 고려 말의 화엄종사이다. 왕은 <대화엄종사 선교도총섭>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창성사가 폐사되어 1965년도에 이비를 매향동 현 위치로 옮겼다.

 

 

이 탑비는 진각국사의 행적을 알리는 탑비로,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운 다음, 덮개석인 우진각 형태의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진각국사의 행적을 새긴 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붕돌의 경사면이 완만하며, 전체적으로 보면 단순한 형태로 구성이 되었다.

 

창성사 터로 돌아가야 해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엔 많은 문화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주춧돌이며 축대의 부분이 남아있다. 농사를 짓고 있어 석물들이 제자리를 떠나 함부로 훼손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소중한 문화유산의 현장이 마구잡이로 훼손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창성사 터에 서 있어야 할 탑비가, 왜 현 위치로 옮겨져야 했을까? 어떤 문화재이든지 그것이 제자리에 서 있을 때 그 가치가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방화수류정의 한 편에 와서, 서 있는 보물 제14호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이라도 광교산에 있는 창성사 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키면서, 그곳의 유적발굴이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을 적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비의 몸돌은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소중한 문화유산 대책이 아쉬워

 

이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는 고려 후기의 단순화된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형태의 비는, 보물 제229호인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와 같은 형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주 신륵사의 보제존자석종비는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비문의 글자도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이색이 비문을 짓고 권주가 글씨를 새긴 창성사조탑비. 지금의 위치는 이 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이다. 차라리 박물관 안에라도 있었다고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라도 가져주지는 않았을까? 지나는 사람들조차 관심 없이 지나쳐버리는 소중한 문화유산.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이곳과는 전혀 관계도 없다. 그러한 소중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옮겨,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세워놓은 것은, 엄밀히 따지면 문화재의 또 다른 훼손이란 생각이다.

 

창성사의 발굴이 시급하듯이, 이 탑비 역시 창성사터로 돌아가 제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저 보존이라는 명분으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에 갖다 세워놓은 탑비 한 기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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