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인 1759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 성안에는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 및 석성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혜종 2년인 1836년의 인구는 <남한지>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서장대 밑. ‘청량당이라는 당호가 보이는 작은 전각이 있다.

 

 

이회장군을 모신 사당

 

18일 일요일 오후.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청량당. 이곳을 찾아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곳에서는 매당왕신 도당굿이라는 굿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사전 조사를 하러 처음 찾아간 것이 2002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혹세무민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 이 매당왕신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과 그 부인 송씨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둘레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올라간 서장대. 굳게 닫혀있는 청량당의 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쉽다. 물론 예전 자료야 갖고 있지만,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장군의 탱화를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이회장군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도 자료에 보이는 매당왕신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처인 산활부인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매당왕신 도당이라는 것이 지금의 청량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02년도에 청량당을 들렸을 때, 당 안에는 이회장군과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 승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성을 한 벽암대사의 화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속신인 백마신장과 오방신장,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화분으로 모셨다는 대신할머니, 군웅, 별상 등의 화분도 함께 모셨다. 2002년 당시 조사를 할 때, 마을 주민들은 대감당(청량당을 마을 어르신들은 대감당이라고 불렀다)을 조성하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다면, 청량당이 지어진 것은 벌써 400여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량당. 꽁꽁 닫힌 전각 안에서 이회장군은 답답함을 호소할 듯하다. 장군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슬피 날아간 매처럼, 문을 열어 훨훨 날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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