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군 천천면 비룡리 38번지에 소재하는 신광사. 42일 토요일 오후, 장수에서 726번 지방도를 타고 천천면 소재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도로변에 성수산 기슭에 자리한 신광사라는 절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탑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가 절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좌측으로 접어들면, 신광사로 들어갈 수가 있다.

 

신광사는 신라 흥덕왕 5년인 831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4년인 1848년에, 당시 장수현감인 조능하에 의해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운장스님의 노력이 함께 했다고 하지만, 현감에 의해서 사찰이 중창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대웅전아 있다. 이 대웅전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너새기와를 올린 대웅전이라니

 

너새기와란 몇 가지 뜻이 있다. 우선은 측면에 대는 박공 옆에 직각으로 대는 암키와를 너새기와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지붕을 이을 때 사용하는 얇은 조각의 돌기와를 말하기도 한다. 이 신광사 대웅전에서 말하는 너새기와는 지붕을 얹은 얇은 돌로 된 기와를 말하는 것이다.

 

신광사를 찾아 문화재 안내판을 찾아보니 대웅전 앞에 서 있다. 대웅전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설명에 너새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와인줄을 모르고 있다가,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정말로 너와로 지붕을 올렸다. 어떻게 절집 대웅전지붕을 돌을 얇게 편을 떠 만든 너와로 올린 것일까?

 

 

특이한 형태의 신광사 대웅전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은 모두 얇은 돌로 만든 너와로 덮었고, 맨 위 부분만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건물의 양 끝이 처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의 끝을 위로 약간 올렸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무게를 받치는 있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축대를 쌓은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지었다. 대웅전의 기둥 받침인 주추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했으며,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사이의 벽에는 딴 곳에서 흔히 보이는 비천상이나 보살상이 아닌, 특이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창호도 정면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두 짝 미닫이로 빗살문이며, 양쪽 칸은 두 짝 미닫이로 아()자형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수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모셨다. 대웅전 천정과 마루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천정의 문양은 대단히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돌담이 아름다운 신광사

 

신광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멘트나 흙을 사용하지 않고 쌓은 돌담이다. 경내를 둘러싼 돌담은 높이가 1m 50cm 정도가 된다, 반듯하게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어떻게 흙조차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반듯하게 돌담을 쌓았을까? 그렇게 쌓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였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더 궁금한 것은 대웅전의 너새기와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너새기와를 올렸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너새기와로 대웅전 지붕을 올렸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광사는 신라시대 처음으로 지어진 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조 27년인 1649년에 천혜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신경준의 가람고,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에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 소재지, 연혁 따위를 적어서 펴낸 책인범우고등에도 신광사의 명칭이 보인다.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이 언제부터 너새기와를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우리나라 절중에 이렇게 대웅전 기와를 편돌인 너새기와로 올린 곳은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광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경내. 반듯하게 쌓여진 돌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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