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문은 우리나라의 성곽의 문 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나 아니었을까? 그런 장안문은 참으로 견고한 성문이다.

 

장안문은 4대문 가운데 가장 아픔이 많은 문이다. 6,25 한국전쟁 때 장안문은 반파가 되었다. 그리고 성문에는 무수한 파편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온다. 폭격을 받았는데도 반파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장안문이 견고하다는 뜻도 된다. 정조 당시의 화력으로는 아마 적들이 장안문 인근에도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장안문의 안쪽 좌측 기단석에 파여진 성혈

 

이 한마디가 당시의 장안문의 위용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성서에는 지금의 성은 화살과 탄환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비록 창이나 선으로 위로 찌른다 해도 전체 높이가 여유가 있고, 대의 양쪽 가장자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적이 곧 바로 성 아래로 다가오지 못할 것이다. 또 포물선으로 날아오는 화살이나 비스듬히 날아오는 탄환도 대위에 있는 사람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 했다.」

 

 현재의 장안문(위)와 한국전쟁 때 반파된 장안문(아래) NBC 종군기자인 존 리치가 촬영한 사진이다.

 

옛 사람들은 왜 성혈을 팠을까?

 

옛 선사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돌을 갈아내어 성혈을 팠다. 성혈은 주로 커다란 바위에 파기도 했지만, 고인돌이나 선돌 등에 많이 나타난다. 아직 성혈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하지만 돌로 돌을 갈아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만큼 성혈 하나를 만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성혈을 몇 개씩 파여져 있기도 하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에는 마을 사람들이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돌을 마을 입구에 세워놓았는데, 이것은 선사시대의 선돌이라고 한다. 이 선돌에는 한편에 나란히 12개의 성혈이 남아있다. 수원의 여기산 화성 성돌을 뜨던 곳에도, 큰 바위에 성혈로 보이는 구멍이 남아있다. 그리고 보면 이 성혈을 판다는 것은, 선사시대 이후로 계속되었던 것 같다.

 

 

임실군 지사면 영천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선돌의 성혈(위) 안양 삼막사 남녀근석 중 남근석에 있는 성혈 

 

여기산 커다란 바위위에 남아있는 성혈의 흔적. 그렇다면 이 바위돌은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이곳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였다는 점이, 더욱 이 바위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수원인근의 오산 등지에서도 이 개석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커다란 바위가 지석묘일 가능성을 유추해본다.

 

장안문은 신앙의 대상이었다.

 

수원 화성을 수없이 다녀 본 사람들도 장안문이 신앙의 대상물이었다고 하면, 아마도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언젠가 어느 분에게 장안문은 많은 사람들이 기원을 하던 장소였다고 하였더니, 무슨 정신 빠진 소리냐면서 핀잔을 들은 기억이 있다. 글쎄다, 남들이 모르는 것을 하나 더 안다고 하여서, 그리고 자신이 본 일이 없다고 하여서 정신 빠진 사람으로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화성의 성돌을 뜬 여기산 바위에 보이는 성혈

 

장안문의 안쪽에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성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10여 개가 넘는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그 장안문처럼 웅장하고 단단한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을 테고, 또 누군가는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난 서방이나 아들이 꼭 장원급제하기를 염원해서 성혈을 파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문을 받치고 있는 든든한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파면서 얼마나 속으로 많이 기원을 했을 것인가?

 

장안문 기단석에 파여진 성혈들

 

나는 장안문에 올라서면 항상 머리를 잠시 숙이고 마음속으로 기원을 한다. 그것은 장안문에 성혈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장안문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람들에게 믿음이 가는 성문이 아니던가? 정조 역시 화성 행궁으로 행차를 하면, 이 장안문을 통해서 출입을 했다.

 

그러기에 아마도 혹 누군가는 정조의 안녕과 강한군주, 그리고 강한국가를 위해서 성혈을 팠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성혈이 장안문에 있다는 것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래서 문화재를 돌아볼 때는, 돌 하나도 빠짐없이 살펴보라고 당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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