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읍에서 신륵사 입구를 지나 북내면 소재지를 지나면 양평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구불거리는 지방도를 따라가면, 우측으로 금당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게 된다. 다리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보면 <석우리 선돌>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꺾어 장암리 방향으로 600m 정도를 들어가면, 양어장 안에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곳이 있다. 그 안쪽에 서 있는 것이 경기도 기념물 제 132호인 석우리 선돌이다.

 


 

석우리 선돌이 무슨 용도로 사용이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는 것이다. 석우리는 1895년까지 강원도 원주군 지내면에 속해 있었다. 1895년 여주군에 편입이 되고, 1914년 일제에 의해 실시된 대대적인 행정통폐합에 따라 석장, 입석, 장우동을 병합하여 석우리라 하였다.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행정통폐합은, 우리나라 마을의 고유한 이름을 모두 잊어버리고 뜻도 없는 마을이름으로 바뀐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지금도 안타깝다.

 

이곳이 1895년도까지 도계(道界)였기 때문에 ‘경계석’으로 세웠을 가능성이 짙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선돌이 서 있는 근처의 마을이름이 북쪽 마을은 '담모랭이' 라 하고, 남쪽 마을은 '돌담'이라 부르는 것도 이 선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전 경계 표시로 선돌을 세우면 주변을 돌담으로 쌓기 때문에, 그 돌담 근처에 있다고 해서 담모랭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볼 수가 있다. 돌담은 아마 남쪽마을이 담을 끼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석우리 선돌은 양어장이 길 쪽을 제외한 삼면을 둘러싸고 있다. 선돌이 선 곳은 큰 나무들이 서 있으며, 마을에서는 최근까지도 정월 대보름에 선돌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선돌은 높이 2.45m, 너비가 0.8m, 두께가 0,6m 정도의 장방형으로 되어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앞으로 남한강의 지류인 금당천이 흐르고 있다.

 

  
윗부분은 손질을 한 흔적이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정월 대보름에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다.


예전에 이 선돌의 기능이 어떠했는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지만, 최근까지도 마을에서 위하는 마을의 '신석(神石)'의 기능을 가졌던 석우리 선돌. 대개는 경계표시로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신앙적 거석문화로 볼 수도 있다. 단순히 경계표시로만 세웠다면, 마을에서 굳이 위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석우리 선돌의 주변에 있었다는 지석묘를 보아도,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물의 한 형태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여름철 주변 숲이 무성할 때 다시 찾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지금보다는 좀 더 운치 있는 모습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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