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을 축성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할까? 눈앞에 보이는 화성을 바라다볼 때마다 갖는 의문이다. 화성은 잘 가다듬은 방형의 돌을 이용한 곳도 있고, 전각이 있는 곳에는 장대석으로 다듬어 사용을 한 곳도 있다. 그런가하면 그저 막 쌓기를 한 성벽은 굳이 다듬지를 않았어도, 나름대로 잘 맞게 돌을 이용했다.

 

그 화성의 성돌에 이용한 채석장은 수원 곳곳에서 보인다. 가깝게는 팔달산 지석묘가 있는 곳으로부터 서둔동 일대, 숙지산 등, 인근지역에서 돌이 있는 곳은 모두가 채석을 했을 것이다. 그 중 서둔동 농촌진흥청 내에 속한 수원시 향토유적 제7호인 ‘여기산 선사유적지’ 안에 있는 채석장소를 찾아갔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여기산

 

화성의 돌을 채석하던 숙지산 채석장(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은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 산 41번지인 화서전철역 옛 연초제조창의 건너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일대는 화성의 성돌을 채석해 공급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일대에서 채석한 돌은 수레를 이용하여 치도를 통해 화성의 축성 장소까지 운반을 하였다. 현재 선사유적지가 있었던 여기산은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다. 이곳 여기산 선사유적지는 서호 서쪽의 구능산에 있다. 1979~1984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한 곳이다.

 

 

 

이 여기산 선사유적지에서는 청동기시대의 집터와 경질무문토기, 두드림무늬토기 등이 출터가 되어 이곳이 철기시대 전기와 삼국시대 전기(AD 0 ~ 300)의 집터가 발견이 되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집터의 시설 중에서는 온돌시설의 초기형태라 할 수 있는 부뚜막이 있는 화덕자리가 발견이 되기도 했다.

 

여기산 채석흔적을 찾아가다

 

농촌진흥청을 들려 여기산에 오르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입산금지’지역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다.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는 여기산은 흙길이다. 비가 온 뒤라 그동안 말랐던 풀과 나뭇잎들이 새롭게 색을 만들어 가고 있다. 흙길을 밟는 감촉이 위로 전해진다. 도심 한 가운데 살아있는 자연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

 

 

 

위로 길을 따라 오르니 우장춘박사의 묘가 보인다. 그리고 조금 후, 숲길 앙편에 세워놓은 석주가 있다. 아마 이곳에 예전 절터라도 있었던 것인지. 그 석주 좌측으로 바위가 보인다. 그리 크지 않은 바위. 밑에는 작은 바위들이 몇 개 널려있다. 이 바위를 보면서 생각을 해본다. 처음에는 얼마나 큰 바위였을까? 그리고 왜 이 바위만 남아있는 것일까?

 

바위 위에 남아있는 성혈,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바위에는 성벽을 뜨기 위한 자국이 남아있다. 바위의 앞면이 편편한 것을 보니 이곳에 쐐기를 박아 잘라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위의 중간 부분에도 쐐기를 박기 위한 자국이 있다. 그런데 왜 단단한 이 바위를 성돌로 사용하기 위해 쪼개다가 그만두었을까? 바위 의편을 보니 성혈인 듯한 흔적이 보인다.

 

커다란 바위위에 남아있는 성혈의 흔적. 그렇다면 이 바위돌은 혹 지석묘는 아니었을까? 이곳이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였다는 점이, 더욱 이 바위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지석묘인 고인돌은 탁자식, 바둑판식, 그리고 방을 땅 속에 두고 위에 커다란 돌을 얹어놓는 개석식이 있다.

 

수원인근의 오산 등지에서도 이 개석식 고인돌이 집단으로 발견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커다란 바위가 지석묘일 가능성을 유추해본다. 문화재 답사를 20년이 넘게 하다가보니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보는 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다 생각해 본다. 그래서 하나의 바위를 두고도 쉽게 곁을 떠나지 못한다. 아마도 그동안 생긴 고질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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