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그 문화재에서 기운을 얻고는 한다. 언젠가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만난 노스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는 그렇게 천년이 지난 것들을 보고 다니니, 그것에서 나오는 기운을 많이 받을 것이네’라는 말씀이셨다. 아마도 그런 기운이 답사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517-2에는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45호인 흥법사 터가 있다. 이 흥법사 터에는 보물 제463호인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와 제464호인 흥법사지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 진공대사 탑비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진공대사(869∼940)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비문이 새겨진 탑비의 몸돌은 깨어진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놓아, 이곳에는 비의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 있다.

 

 

뛰어난 조각기술이 돋보이는 받침돌인 귀부

 

진공대사는 장순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수도하고 공양왕 때 귀국하여 왕사가 되었다. 신라가 망하고 고려의 건국 후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그의 설법에 감응하여 스승으로 머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진공대사는 이를 사양하고 소백산으로 들어가 수도하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입적하니 태조가 손수 비문을 짓고, 최광윤이 당나라 태종의 글씨를 모아 비를 세웠다.

 

탑의 몸돌이 없어져 받침인 귀부 위에 머릿돌인 이수를 올려놓은 형태로 있는 진공대사 탑비 귀부 및 이수. 거북의 몸에 용머리를 한 고려 초기의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이 귀부는 용머리의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귀의 옆에는 물고기의 아가미가 벌어진 것처럼 펼쳐져 있으며, 귀는 위로 솟아 있다. 용의 머리 위에는 네모난 구멍이 나 있는데, 이 구멍은 용 뿔을 조각해서 끼웠던 것으로 보인다.

 

 

 

 

앞 뒤 네발로 바닥을 힘차게 딛고 있는 형태로 조각이 된 발은, 동적인 힘을 느낄 수가 있다. 목은 짧은 편이며 거북의 등껍질 무늬는 정육각형으로, 만(卍)자 무늬와 연꽃을 새겨 넣었다.

 

머릿돌의 조각솜씨 보고 절로 탄성이

 

비의 몸돌이 없어져 귀부 위에 이수만 얹혀 있는 진공대사 탑비의 머릿돌. 앞면 중앙에는 <진공대사>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을 조각하였다. 머릿돌에는 모두 여섯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중앙으로 용 두 마리가 서로 무섭게 노려보고 있고, 양편에 밖을 주시하고 있는 각각 한 마리씩의 용이 있다. 뒤편으로도 양편에 한 마리씩의 용이 있어, 전체적으로 네 마리의 용이 사방을 주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이 이수의 형태는 웅장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섬세하게 조각되어, 당시의 높은 예술수준이 엿보인다. 돌로 만든 조각품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진공대사 탑비의 받침돌과 머릿돌.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비의 몸돌은, 여러 개의 조각으로 깨져있어 부분적으로 비문을 알아보기가 힘든 상태라고 한다. 그러나 그 비문에는 진공대사의 생애와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흥법사지 정비 아쉬워

 

원주 지정면에서 다리를 건너 양평군 양동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문막으로 빠지는 새로 난 길이 있다. 이 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다가 우측으로 난 소로 길로 따라 들어가면 흥법사지가 있다. 현재 흥법사지에는 보물인 삼층석탑과 진공대사 탑비 귀두와 이수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주변을 살펴보면 여기저기 주춧돌이었을 석물들도 보인다.

 

 

 

 

탑 옆에는 누군가 밭을 일구었고, 막 쌓은 축대 주변에도 모두 밭을 개간했다. 조성된 석물로 보아 한 때는 많은 사람들이 찾았을 흥법사지. 그러나 이렇게 오랜 세월 방치가 되어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두 기의 뛰어난 보물이 서 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정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진입로나 주변이 속히 정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우리 문화재의 우수함을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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