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집단을 이루어 살다가보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단순히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마을의 이야기는, '아주 오랜 옛날'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이 된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전설 속의 실체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증평시내에서 충주 방향으로 가다보면 사곡리 이정표가 나온다. 이 이정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사곡2리 사청마을이 나온다. 마을회관을 지나면 마을 안 길가에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이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다.

 

 

1456년에 판 사곡리의 우물 '영천(靈泉)'

 

우물에 다가가니 우물 옆 집 벽쪽에 커다랗게 '말세를 알리는 우물'이라는 돌로 만든 안내판이 걸려있다. 그 내용을 보니 우물의 깊이는 5.4m인데, 수심이 2.8m 정도 된다는 것이다. 조선 제7대 왕인 세조(1455∼1468)가 조카인 단종(1452∼1455 )을 폐하고 왕위를 빼앗은 후 나라에는 가뭄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마을에 장삼을 길게 늘어트린 한 노승이 지나다가 물이 마시고 싶어 한 집에 들려 물을 한 그릇 마실 수 없느냐고 청을 넣었다.

 

"집에 길어다 놓은 물이 없으니, 툇마루에서 좀 기다리시면 마실 물을 길어오겠습니다."

 

그릇을 들고 집을 나선 아낙네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노승이 오랜 시간 기다리고 있으려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땀을 뻘뻘 흘리며 아낙네가 돌아왔다.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아낙네는 물을 떠 노승에게 건넸다. 노승이 물을 마신 후 늦은 사연을 물으니, 아낙네는 20여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왔다는 것이다.

 

 

 

노승이 잡아 준 우물터, 말세를 예고한다

 

마을에 전하는 전설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낙의 수고에 감사한 마음이 든 노승은 지팡이로 땅을 몇 번 쳤다.

 

"허허, 이곳 땅은 층층이 암반이로다. 초목인들 제대로 자랄 수 있겠는가. 일찍이 선인들이 터를 잘못 잡았도다."

"어찌된 영문인지 물이 나지 않아 지금도 마을장정들이 우물을 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물이 나는 곳을 알려드리리다. 자, 여기를 어서 파시오. 겨울이면 따뜻한 물이 솟을 것이고, 여름이면 찬 물을 얻을 것이오. 여기 우물을 파기만 하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장마가 닥쳐도 물이 더 이상 늘지 않을 것이외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지팡이로 여기저기를 두드려보던 노승이 정해준 곳은 큰 고목이 서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나서 노승은 마을을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더했다는 것이다.

 

"이 곳에 우물을 파면 넘치거나 줄어들지는 않겠지만, 꼭 세 번 넘칠 날이 있을 것이오. 넘칠 때마다 나라에 큰 변이 일어날 것이고, 세 번째 우물이 넘치는 날에는 말세(末世)가 될 것이니 그때는 지체 없이 이 마을을 떠나시오."

 

 

말을 마친 후 노인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사람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목을 베어내고 그곳을 팠는데, 노승의 말대로 맑은 물이 솟아올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이 넘치면 세상에 말세가 온다는 노승의 말이 있어 주민들은 이 우물에 각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 영천, 벌써 두 번 넘쳐

 

이 사곡리의 우물은 사람이 물에 빠져도 가라앉지 않는다고 한다. 물을 긷다가 몇 명이 빠졌으나, 그대로 다 물에 떠 있어 생명을 건졌다는 것이다. 그 사실을 우물 옆 안내판에 자세히 기록해 놓고 있다.

 

장옥분(당시 16세 부인), 연기남(13세, 소녀), 연규인(14세, 소녀), 연경세(11세, 소녀) 등 4명이다. 그러나 1947년 음력 2월 경 우물 하부 석축이 우그러들어 재공사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보릿고개에 시달려서 명샘에 고사도 못 올리고 지내던 중, 연규성씨 딸 10세 소녀가 물을 긷다가 변을 당했다. 마을 사람들은 용왕님의 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경악하면서 정성을 다하여 가가호호 촛불을 밝히고 무녀를 들여 굿을 하였다.

 

이러한 우물이 벌써 두 번이 넘쳤다고 한다. 이제 한 번 더 넘치게 되면 말세라는 것이다. 첫 번째로 넘치던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라고 한다. 어느 날 우물에 물을 길러간 한 아낙이 우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마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소문은 인근에도 퍼져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던 며칠 후, 왜병이 쳐들어 왔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노승의 말대로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정초에 우물이 처음으로 넘쳤다.

 

 

두 번째로 우물이 넘친 것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때의 일이다. 그 후 6·25 때는 우물이 지면 1m 내·외로 불어나 전쟁발생을 예고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우물을 시멘트로 바꿔 간이 상수도로 사용했으나, 마을에 액운이 잦아 원상복구를 했다고 한다. 1995년 11월에는 2 ∼ 3일간 우물이 불어났다 줄었다 하기도 했고, 마을에서는 해마다 봄·가을 두 차례 물을 퍼내 청소를 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쏟고 있다.

 

말세를 알려주는 우물, 벌써 500년 가까이 마을사람들이 '영천'이라고 생각하는 이 우물은 이제 두 번이 넘쳐나고, 마지막 한 번이 남았다고 한다. 우물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에도 어르신 한 분은 곁에서 떠나시지 않는다. 행여 우물에 나쁜 짓이라도 할까보아 걱정이신지. 우물을 뒤로하면서 속으로 기원을 한다. 세 번째로 넘쳐나는 일이 절대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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