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자리하고 있는 옛 절터인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인 회암사지는 요즈음 한창 발굴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다. 원래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전에는 회암사지에 수많은 문화재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회암사지에서 보이는 것은 전각들이 서 있던 곳의 축대와 주춧돌, 그리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부도탑 등이다.

2월 25일, 회암사지를 찾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가려고 했던 곳이다. 멀리서 보아도 발굴을 하고 있는 회암사지의 모습은 장관이다. 회암사지에는 보물 제387호 회암사지선각왕사비, 보물 제388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무학대사비, 그리고 회암사지부도탑 등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하나 그 이전에 이미 절이 있었다고도

회암사는 고려 충숙왕 때인 1328년에 승려 지공이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그러나 일설에는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에 의해, 충숙왕 즉위년인 1313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다고도 추정한다. 회암사는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불사를 일으켜 큰 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각별히 관심을 가졌으며, 왕위를 물린 후에도 이곳에서 머무르며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회암사지의 동쪽 능선 위에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의 사리탑이 남과 북으로 나란히 서있고 그 남쪽 끝에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옹은 고려 우왕 2년인 1376년에 삼산양수지기의 비기(秘記)에서 이곳이 인도 나란타사와 지형이 같으므로, 이곳에 절을 일으키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절을 중창했다는 것이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

회암사지는 현재 발굴이 진행되고 있으며,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회암사는, 발굴된 터만 보아도 대가람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세종 6년인 1424년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 후 회암사는 성종 3년인 1472년에는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을 하였으며,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는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기옥을 보면 선조 때까지는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날 꼭 비워야 하나

발굴을 한다는 안내판에는 2012년까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문화재들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다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 사람을 찾으니 대답이 없다. 아마도 일요일이라고 쉬는 모양이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를 발굴을 한다고 해서, 이전을 한다는 것이 영 미덥지가 않다. 혹 이전을 하면서 훼손이라도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안내판을 보니 절터 위에 전망대가 있고, 그 곳에 가면 문화관광 해설사가 있다고 하여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해설사가 있다는 컨테이너는 굳게 닫혀 있다. 요즈음 주말과 일요일이 되면, 가족들이 나들이를 하면서 문화재를 둘러보고는 한다. 자녀들과 함께 온 가족인 듯한데, ‘꼭 일요일에 쉬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한다.

물론 일요일은 모두가 쉬는 날이기 때문에, 그들보고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딴 지역을 돌아보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주말과 일요일은 근무를 하고 평일에 쉬는 곳이 많다. 관광객들이 찾아들기 때문에, 쉬는 날을 변경해 사람들에게 문화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대를 하고 찾아간 회암사지. 결국은 발굴중인 사지에 즐비하게 늘어선 석물만 보고 온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만 갖고도 회암사지가 과거 얼마나 대가람이었는가는 충분히 가늠할 수가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고마울 수밖에.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