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궁(行宮)’이란 임금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과 휴양, 혹은 능원 등에 참배를 하기 위해, 정궁을 벗어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행궁은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를 계속 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행궁, 남한산성 내의 광주부행궁 등이 있다. 왕의 병의 치료를 위해서 다니던 온양행궁은,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이다. 기록에 의하면 온양행궁은 조선 세종 이래 역대 왕이 즐겨 찾던 곳이다.



남군영의 건물과 신풍루에서 바라다본 남군영의 지붕(뒤편 좌측), 그리고 신풍루에서 바라다 본 북군영의 지붕(뒤편 우측. 맨 아래)


능원의 참배와 정조의 힘을 보이기 위한 곳

화성 행궁은 왕이 지방의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이다. 화성 행궁은 단지 능원의 참배뿐이 아니라, 정조대왕이 양위를 하고 난 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직접 살기 위해 지은 별궁이다. 그만큼 딴 행궁에 비해 정조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어진 곳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행궁과는 그 규모와 격이 달랐다고 볼 수 있다.

화성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곳은 명당 중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한남정맥의 중조산인 광교산과 백운산의 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남진하여, 광교저수지에 모이게 된다. 이 물은 다시 화성의 중심부를 관통하며 수원천으로 남진해 서해로 흘러든다.


남군영의 행각. 장용외영의 기마병들이 묵는 곳으로 방과 광(무기고, 식량창고 등), 100명의 장용외영의 기마부대가 묵었던 곳이다.


산과 물이 일체가 되어 있는, 그 기가 모이는 곳에 행궁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지으면서, 진남루라는 행궁 정문의 이름을 ‘신풍’으로 바꾸어 달게 하였다. '신풍'이란 명칭은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한 마디로 제2의 고향으로 화성을 마음속에 둔 것이다.

정조의 위엄은 군영에 있었다.

정조대왕이 화산으로 행차를 할 때보면, 장용외영의 군사들의 위엄을 느낄 수가 있다. 아마도 정조는 강력한 군주가 되길 원했다. 정조는 자신의 금군이었던 장용외영을 화성에 주둔시켰다는 것만 보아도, 정조가 생각한 화성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장용영은 정조의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를 혁파 한 후, 정조 9년인 1785년에 설치된 금군 조직이다.


남군영의 현판과 남군영 대청에 전시가 되어있는 당시의 갑주들


정조는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 발전시킨 군영을 조직하여, 막강한 군사조직으로 편제를 조성했다. 이 장용영은 내영과 외영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화성에 주둔하였다. 화성 행궁의 정문이었던 신풍루 좌우에는 군영이 자리하고 있다. 신풍루를 바라보고 좌, 우측에 자리한 군영은,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가 좌, 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건물이다.

원래 이 군영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처음으로 지었으며, 정조 18년인 1794년에는 좌우에 익량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다.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친위부대인 장용외영의 기마부대를, 화성과 행궁을 위주로 주둔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화성을 거점으로 한 강력한 군주상을 세우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정조가 세우고자 했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먼저 충직하고 강력한 군권만이, 강한 군주를 만들기 있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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