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횡성군 횡성읍에서 406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보면 공근면 상동리 496-3에 소재한 3층 석탑과 나란히 있는 석불을 도로 옆에서 만날 수가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0호인 이 상동리 석불좌상은 광배만 파손되어 흩어져 있을 뿐,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와 불신이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앞으로는 금계천이 흐르고 있고, 옆에는 상동리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는데, 머리 부분은 잘려나가 흩어져 있던 것을 올려놓았는데, 그것마저 잃어버려 다시 조성한 것이다. 현재의 머리 부분 이전에 모습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에 입가에는 미소를 띠어 자비스럽게 보였다고 한다.

 

 

통일신라 후기의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의 신체부분을 조성한 실력으로 미루어 보아도, 신라 전성기 불상의 이상적 사실미가 엿보인다. 당당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무릎 위에 올려 왼손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러한 수인의 형태는 부처가 깨달음을 상징하는 상징이다.

 

남아있는 신체의 모습을 보면 자연스런 손 모양과 당당한 체구,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의 유려한 옷 주름 등에서도 역시 이상적 사실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머리에서부터 양어깨를 거쳐 무릎에 이르는 선이 유려하다. 이 석불좌상은 그 형태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8세기경에 뛰어난 석공에 의해 조상된 것으로 보인다.

 

 

대좌는 8각 연화좌인데 하대는 안상을 새겨 넣었는데,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다. 그 위로는 두장의 꽃잎이 아래를 향하게 조각을 하였으며, 연꽃을 새긴 원형의 상대와 각 면에 안상을 새긴 중대는 전형적인 9세기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석불좌상에 비해 좌대가 조금 왜소한 듯하다. 이 석불좌상은 부드러운 옷 주름과 8각의 대좌 등에 나타난 표현으로 보아, 8세기의 불상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좌상으로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석탑과 함께 모셔져

 

석불좌상의 옆에는 성덕사의 옛터에 석불좌상과 함께 남아있는 3층 석탑이 서 있다. 석탑의 기단은 이단으로 되어있으며, 아래기단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각 면에 두 개의 안상을 새겨 넣었다. 위기단은 중앙에 탱주와 양편에 우주를 새겼으며,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인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이 있는데, 3층 몸돌은 잃어버려 없어진 것을 탑을 복원하면서 새로 조성을 해 끼워 넣었다고 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1층과 2층은 4단씩, 3층은 3단으로 새겼으며, 낙수면에는 느린 경사가 흐르고 네 귀퉁이는 살짝 위로 들려 있다.

 

 

이 삼층석탑은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나, 지붕돌의 너비가 좁고 두꺼워지는 등 양식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일반적인 밋밋한 형식으로 조성을 한 삼층석탑은 상륜부는 남아있지가 않다.

 

두상을 잃어 새롭게 조형을 해서 올린 상동리 석불좌상. 뛰어난 조각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새로 만들어 조성한 머리로 인해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변했다. 흔히 요즈음 말로 ‘훈남’이 된 것이다. 문화재 답사를 할 때 만나는 이런 문화재로 인해 마음이 아픔이 가실 날이 없다.

 

 

 

 

 

 

 

 

 

 

 

 

 

전국을 돌면서 문화재를 만나다가 보면, 목이 잘린 석불들이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음을 알 수 있다. 석불의 목이 잘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조선조 유생들에 의한 훼파와 더불어, 일제의 석불의 목 훼손이 극성을 떨었다. 근자에 들어서는 종교적인 이질감에 의한 훼손도 합해져, 여기저기 목이 잘린 석불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강원도 원주시 봉산동에 자리한 원주시립박물관 뒤편 길가에 보면 석불좌상 두 기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원주시 중앙동의 폐사지에 있던 것을, 일제 때 남산 추월대로 이전하였다가, 1962년 5월에 강원감영과 포정루 쪽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그 후 현재의 위치인 시립박물관 뒤편으로 옮겼다. 이 두 기의 불상은 머리 부분이 없어져 새로 보수를 하였다. 새로 보수를 한 머리 부분이 조금은 걸맞지 않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요즈음 말로하면 두 기의 목이 잘린 석불의 위에 새로 맞춰 올린 두상은 훈남에 속한다. 이 두 기의 석불좌상은 현재 남아 있는 몸체와 대좌만으로도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고려초기의 뛰어난 석불좌상

 

두 기의 석불좌상은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단정한 체구의 세련된 형태, 법의는 통견에 평행 옷주름 등이 신라 말의 석불양식을 잘 따르고 있어서, 적어도 고려 초기의 수준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다만 얼굴 부분이 사라져서 그 뛰어난 모습의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위와 같은 모습으로 조각이 된 석불좌상. 이 석불도 머리가 잘려나간 것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수인은 깨어진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상태로 보아, 지권인임이 분명하다. 두 기의 석불좌상은 같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데, 두 기가 다 비로자나불 석불좌상으로 추정된다. 손이 깨어진 것조차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누군가에 의해 훼손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법의는 양 어깨로 흘러내려 주름이 잡혀있으며, 가슴에는 내의에 나비매듭을 엮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여 오른발을 젖혀 왼쪽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법의가 무릎까지 덮고 있는데, 주름을 넣어 아름답게 표현을 하였다. 머리가 없어지기는 했지만, 상당히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두 기의 석불좌상이 앉아있는 대좌 역시 뛰어나다.

 

수인은 지권인을 한 모습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을 알 수 있다

 

뛰어난 고려시대의 대좌를 보다.

 

이 두기의 석불좌상을 올려놓은 대좌는 두 기가 모두 사단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정면을 보고 우측에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는 하단에는 팔각으로 조형을 해, 안상을 새기고 그 안에 동물들을 부조로 조각하였다. 이단은 팔각으로 조성을 하고 조각을 했으며, 삼단 역시 팔각으로 해 천인상을 조각하였다.

 

대좌는 모두 4단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맨 위 사단은 원형으로 조성하고 꽃과 받침을 조각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지방의 장인이 아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있는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좌측에 있는 석불좌상 역시 같은 형태로 대좌를 조성했는데, 이단에는 가지를 문양으로 넣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곳도 천인상을 새겼는데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맨 위단에는 꽃을 새기고 넓은 잎을 새겨 넣은 것이 다르다.

 

 

우측 석불좌상의 대좌에 있는 천인상(위)와 가야금과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인(아래)

 

이런 형태로 닮은꼴로 조성이 된 두 기의 석불좌상이, 삼존불 좌상 가운데 양편에 있는 협시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고려 초기의 석불좌상. 비록 머리가 없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 남은 부분만으로도 훌륭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 이 두기의 석불좌상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호로 일괄 지정이 되어 있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