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에서 734번 도로를 따라 영광IC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우측으로 장성군 삼계면 사창리가 나온다. 이 도로변 우측으로 키 큰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정자가 서 있다. 기영정, 이 정자는 1543년 처음으로 왕명에 의해서 지어진 정자이다.

 

지지당 송흠(1459-1547) 은 세조 5년인 1459에 참봉 송가원의 아들로 출생했다. 명종 2년인 1547년에 8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며 만고효자로 칭송을 받았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도 노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하여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전주부윤으로 전임한 뒤, 광주 나주의 목사, 담양과 장흥의 부사를 지냈다.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지만, 노모와 떨어져 사는 것이 죄스럽다고 하여 왕의 특허를 받고 집에 돌아갔으며, 101세를 산 모친을 봉양하였다. 7회에 걸쳐 효렴으로써 상을 받은 송흠은 1538년 청백리에 녹선이 되고, 1696년에는 효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기영정에는 서로 다른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에는 다른 글씨로 쓴 현판이 두 개가 걸려있다

 

기영정은 1543년 당시 전라도 감찰사인 규암 송인수가 송흠을 위하여 왕명을 받들어 지은 정자이다. 정자는 키 큰 소나무들이 늘어선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용암천이 흘러 경치가 뛰어나다. 중종이 송흠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였던 것 같다. 중종은 전라감찰사로 부임을 하는 규암 송인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송흠을 위한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기영정이라고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사람이 올바른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면, 세상 누구인들 그 사람을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아마 송흠도 천하에 효자로써 어머니 모시기를 정성을 다하였으니, 당연히 중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기영정은 전쟁으로 소실이 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송인수의 10세손인 송겸수가 영광군수로 부임을 하면서 철종 7년인 185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정자 앞으로는 내가 흐르고 철 늦은 은행잎이 노랗다


방을 놓지 않고 사방을 트이게 했다. 주름이 진 기둥이 기영정의 역사를 알려준다


소나무 숲길을 따라 기영정에 오른다. 방도 없이 사방이 탁 트인 정자가 시원하다. 앞으로 흐르는 용암천가에 아직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가 노랗다. 정자 앞에는 잎을 다 떨어트린 백일홍이 서 있다. 기영정이란 다른 글씨의 현판이 좌우에 걸려있는 정자는 주춧돌도 자연석이다. 그저 자연을 닮아 평생을 효로써 마친 정자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다. 아마 뒤로 난 도로가 없었다면, 그리고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없었다면 소나무 가지에 앉은 새들의 지저귐만 남았을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요직을 거쳤으면서도, 노모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송흠. 그에게 내려진 중종임금의 사랑이 깃들어서인가 마음부터 숙연해진다. 수많은 정자를 돌아보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기영정에 올라 효심(孝心) 하나를 배워간다.         

 

주변에는 열녀와 효부, 효자각 등이 서 있어 더 엄숙해

 

마을에서는 이 나무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누구는 천년이라고 하고, 누구는 1,200년이라고 한다.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되어 우리나라 최고령 은행나무라고도 한다.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에 소재한 천연기념물 제76영월 하송리 은행나무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수백 년만 되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입을 벌린다. 그 세월이 가늠이 되질 않아서이다. 그런데 1,2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는 소리에, 나무가 그렇게 신령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나무의 높이는 29m, 가슴높이의 둘레가 14.5m에 밑동의 둘레는 13.8m에 이른다, 가지는 동서로 22.5m에 남북으로 22m나 된다고 하니 가히 일품이다.

 

답사 길에서 만난 영월 은행나무. 지나는 길에 이정표를 찾아들어간 마을에서 만난 은행나무는 한 마디로 대박이었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가끔 이렇게 생각지도 않았던 문화재 등을 만나기도 한다. 그럴 때는 흡사 로또라도 맞은 듯한 기분이다. 영월의 은행나무를 보았을 때도,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처음에는 이곳에 대정사(對井寺)’라는 절이 있었고, 그 앞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이 사라지고 주택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마을 가운데에 위치하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의 원래 줄기는 죽어 없어지고, 새롭게 난 줄기가 지금의 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영험한 은행나무로 마을에서 신목으로 제사를 지내

 

이 나무에는 옛날부터 커다란 뱀이 살았어.”

뱀을 보신 분이 있으세요?”

어른들이 그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그런 줄로 알고 있지

이 나무는 얼마나 살았다고 해요?”

천 이백년도 더 되었다고 하네. 아마 그보다 더 오래되었는지도 모르지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워낙 영험한 나무라, 음력 712일에 이 나무에 와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인가 나무 주변에는 가급적이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은행나무에게 불경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나무 주변을 축대를 쌓고 보호를 하고 있다.

 

신령한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그 나무의 수령조차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을주민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은행나무로 기억을 하고 싶어 한다. 잎이 떨어지기 전의 모습은 어떠할까? 내년에는 여름철 은행잎이 무성할 때, 다시 한 번 찾아보아야겠다. 그것도 음력 712일에. 아들을 점지하는 나무라면, 그보다 더한 것도 치성을 드리면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주변에 효자와 열녀각이 자리하고 있는 뜻 깊은 마을

 

이 나무가 더 신령스러워 보이는 것은 은행나무가 서 있는 하송리 한편에 작은 전각이 나란히 서 있다. 온양방씨 열녀각, 경주이씨 효부각, 그리고 김지룡 효자각과 엄윤 효자각이다. 은행나무의 수령만큼이나 오래도록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오랜 세월 효자와 열녀가 없었겠는가?

 

열녀 온양방씨는 17세에 엄병수에게 시집와 4달 만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까지 보양하면서 살았다. 고종 10년인 1873327일에 정려문이 세워졌다. 4달만에 남편과 사별했으니 자손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부모까지 조양했다고 하니 가히 그 효성을 어찌 칭찬하지 않겠는가?

 

효부 경주이씨는 김지학의 처로 가족들이 출타 중에 시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단지요법으로 시아버지의 목숨을 구했다. 효부각은 고종 4년인 1867420일에 정문이 새워졌다. 요즈음을 살아가는 우리네들에게는 단지 옛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그 정성이 갸륵하다.

 

효자 엄윤과 효자 김지룡 역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인물들이다. 답사길에서 우연히 만난 은행나무와 열녀, 효부, 효자각. 이런 뜻 깊은 것들을 만나면 피곤함이 가시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아 아니라, 아름다운 인물들을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원 화서1, · 페트병 자동분리수거기 설치

 

돈을 벌어주는 기계가 있다. 연세가 70이 넘은 어르신들에게는 이 기계가 자식과 같다. 달마다 용돈이며 생활비를 두둑이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이름도 행복하다. '스마일 빈(smile bin)‘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기계는, 캔과 페트병을 자동으로 분리하는 수거기이다. 이 기계를 보고 있으면 환경수도 수원답다는 생각이 든다.

 

화서1동 주민센터 앞에 놓여있는 이 기계 앞으로는, 커다란 자루에 캔과 페트병이 가득하다. 한 어르신은 연신 기계 안으로 페트병을 밀어 널고 있다. 그러면 그 개수가 차곡차곡 입력이 된다. 집어넣기를 마치고 나서 버튼 하나를 누르면, 그것이 돈으로 합산이 되어 나타난다. 그만큼 벌었다는 것이다.

 

 

화서1동에는 굴러다니는 페트병 없어

 

이 기계를 담당하고 있는 화서1동 새마을협의회 한배수씨는 이 기계가 어르신들께 상당히 도움을 줍니다. 연세가 70이 넘으신 분들 중에, 주로 폐지 등을 수거해 생활을 하시는 분들이 이 기계를 이용하고 계십니다. 20여 분이 사용을 하시는데, 그래도 한 달에 20만 원 이상 씩은 받아 가시죠.”

 

스마일 빈은 하루에 약 2000개 정도의 캔과 페트병을 처리한다고 한다. 기계에 캔을 넣으면 바로 찌그러져서 납작하게 만들어진다. 페트병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용량을 줄인 후 그것을 팔아, 계산기에 합산이 된 금액을 어르신들께 돌려 드린다는 것이다.

 

 

저희 화서1동 거리를 한 번 돌아보세요. 딴 곳처럼 캔이나 페트병들이 굴러다니지를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돈이기 때문이죠. 어르신들이 이렇게 모아오시면, 저희들이 그것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나한테는 이 기계가 자식이나 다름없어

 

지난 해 10월에 설치를 한 캔과 페트병 자동분리 수거기인 스마일 빈을 설치하고 난 후, 처음에는 문제도 있었다고 한다. 화서1동 주민들이 아닌 사람들이 이 기계를 사용하고 돈을 벌어가기도 했다는 것. 그래서 정작 화서1동에서 활동을 하시는 어르신들이 손해를 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안내문을 부치고 단속을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스마일 빈의 전면에 안내문구가 붙어있다.

 

스마일 빈입니다. 재활용 자동분리수거기기는 화서1동 주민들을 위해 설치한 시설입니다. 하지만 타 지역에서 이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여, 화서1동 주민들의 이용에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포인트 지급이나 이용 시 화서1동의 주민이 아닌 경우에는 회원 자격을 정지할 예정이오니, 이 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적고 있다.

 

다만 타 지역 거주자로 화서1동에 근무를 하는 사람들은, 근무지의 주소를 확인 후 정상적인 이용을 할 수가 있다. 또한 포인트 지급 시에는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지참해 달라고 주문을 하고 있다. 밑에 쓰여 있는 날자가 201348일이라고 하니, 그동안 타 지역 사람들이 이 기계를 자주 사용했다는 소리이다.

 

 

이 기계가 나한테는 자식이나 다름없어. 폐지를 수거해 벌 수 있는 돈이 고작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래도 이 기계 때문에 한 달에 20만원을 더 벌고 있으니 자식이지 뭐야. 누가 나한테 이런 돈을 주겠어?”

 

스마일 빈을 이용하신다는 한 어르신의 말씀이다. 마을은 깨끗해져서 좋고, 어르신들은 돈을 벌어서 좋다는 스마일 빈. 이런 작은 기계 하나가 마을의 어르신들께 짭짤한 소득원이 되고 있어서 좋다고 한다.

 

앞으로 캔과 같이 페트병도 그저 누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조각을 낼 수 있도록 해야죠. 이 스마일 빈이 있는 우리 화서1동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이렇게 어르신들을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 좋은 마을에, 좋은 기계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름도 스마일 아닙니까?”

 

어르신들이 페트병을 집어넣는 것을 돕고 있던 관계자의 말이다. 마을의 거리마다 넘쳐나는 캔과 페트병. 이렇게 돈을 벌어 효자 노릇을 할 수 있는 스마일 빈이 있어, 화서1동이 더욱 즐거운 마을이다.

요즈음 방송 등을 보면 '효(孝)'라는 단어는 아예 어디로 종적을 감춘 지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날마다 사람들이 보고 있는 방송 등에서는 효를 알려주는 내용은 거의 없고, 그저 부모에게 달려들고 떼를 쓰거나, 아니면 패륜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등 그야말로 막가는 내용들이 더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세상이 하도 험난한데, 무슨 케케묵은 그런 효를 강조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효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행위다. 효라는 것이 사라진 세상이, 어찌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만고충절 길재의 후손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가면 효자비각이 하나 있다. 그 안에는 화강암으로 조성된 효자비와 목판 정문이 있다. 목판 정문에는 <孝子 學生 吉壽翼之閭>라고 적혀 있는 현판이 걸려있다. 효자인 길수익을 기리는 문이라는 소리다. 비석에는 <길야은선생칠대손효자수익지비(吉冶隱先生七代孫孝子壽翼之碑)>라고 쓰여 있다. 즉 효자 길수익은 야은 길재의 7대손이라는 것이다. 길재는 태상박사를 조정에서 제수했으나 '신하는 두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벼슬을 사양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곳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정종 2년인 1400년 길재의 나이 48세에 조정이 천도를 한 후, 송도를 둘러본 길재가 지은 시이다. 길재는 '만고의 충절'이란 칭호를 들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높이 사 100결의 밭을 식읍으로 내렸으나. 길재는 그 밭에 대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충절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충절을 지킨 길재의 7대손인 길수익

 

만고 충절을 지킨 충신 길재의 7대손인 길수익. 길수익은 영릉의 수호군으로 이곳 왕대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왕대리는 바로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있는 곳의 산 뒤 마을이다. 이곳에 길수익의 효자정문이 내린 것이 1670년이고, 효종대왕의 능은 1673년도에 이곳으로 옮겨졌으니, 길수익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의 수호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륜가(五倫歌)'에 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가 적혀있다. 7대조인 길재는 <삼강행실도>와 <오륜행실도>에도 오른 인물이었으니, 그 자손인 길수익이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풀속에 저 까마귀 반포한줄 알았거늘

하물며 사람이야 부모은혜 잊을소냐

새벽에 일찍깨서 문안부터 먼저하고

즐기시는 음식으로 정성들여 차려드려

부모한번 잡수시면 자식된맘 기뻤어라

이즉하면 시장할까 날이차면 추워질까

부모님이 하고자 하는일 앞서가며 먼저하고

부모앞에 항상 있어 편안케도 하자꾸나

 

오륜가 중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도리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효자 길수익은 이러한 오륜가를 익혔을 것이다. 왕대리 앞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 아버지가 고기를 낚다가 물에 빠져 헤매자, 아버지를 구하려고 물에 뛰어든 길수익. 그러나 끝내 아버지를 구하지 못하고, 함께 물에 빠져 고혼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길수익의 효를 높이 기리고자, 현종 9년인 1670년에 효자정문이 내려졌다. 지금도 왕대리의 마을 안에 있는 정려각과 비. 후대에 자손들의 귀감을 삼고자 조성된 이 비각 옆에는, 커다란 향나무 한그루가 있다. 그런데 이 향나무 가지들이 모두 밑으로 처져있다. 아마 길효자의 효스런 마음에 감읍하는가 보다.

 

모두에게 살아가는 지표가 되어야 할 소리

 

부모취침 하실적에 자리깔고 물러날 때

온한도를 살펴보세 춥지말고 덥지말게

정성을 하루같이 우리부모 살펴보세

글읽고 행실닦아 군자소리 들어보세

입신양명 하는날에 부모님도 현달한다

가난함을 근심말고 농사하여 봉양하세

물논에는 벼를심고 물밭에는 조를심어

벼는베어 부모봉양 조는베어 우리먹세

뒷산에 뽕따오고 앞밭에 목화심어

명주짜서 부모의복 무명일랑 우리입세

 

끝도 없이 이어지는 오륜가의 부모님에게 자식들이 해야 할 도리이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지금의 우리들은 이런 소리조차 모르고 살아왔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 아마 효자 길수익의 효심을 조금이라도 따를 수만 있다면, 지금 우리 세상이 이렇게 황폐화는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다.

 

모두에게 귀감이 되어야 할 행동

 

 

효자 길수익의 행동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행동이다. 말만 번드르르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륜가는 인간이 살아갈 행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 오륜가를 꼭 듣고 따라야 할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론 인간 모두가 따라야 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사회지도층의 인사라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다가 보면, 스스로 부끄러운 짓을 삼간다. 그런데 이 지도층의 사람들이란 분들의 꼬락서니를 보면,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하니 말이다. 물론 그 중에는 아직도 본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많기는 하다. 오륜가의 다음 한 대목을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스스로가 지도층이라고 하는 분들에게.

 

위태한데 가지마라 부모근심 하시리라

주색잡기 멀리하자 부모에게 욕되리라

처자동기 화목하면 부모님이 기뻐하신다

문중자랑 더욱하면 부모감동 하시리라

 

 

왕대리에 서 있는 효자비와 비각. 오늘도 그 앞에는 어린 아이들이 와서 돌아보고는 한다. 교육의 지표가 되어야 할 곳이다. 그러나 정작 이런 길효자를 따라 부끄러운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오늘도 숱한 인생의 오류를 범하고만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비각 하나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가 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심으로 모신 효자였다. <난중일기>에는 이러한 이충무공의 내력을 적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3년 6월에서 12월 사이에 팔순에 가까운 어머니를, 여수 웅천동 송현마을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고 수시로 문안을 드렸다고 한다.

하루는 노모를 뵙기 위해 일찍 배를 타고 송현마을로 문안을 드리러 왔는데, 기운이 많이 떨어진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사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장군은 어머니를 뵈러 갈 때는 흰 머리카락을 모두 뽑고는 했는데, 이는 늙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께서 마음 아파할 것을 생각해서였다고.


장군의 모친이 살던 집터를 찾아가다.

10일 아침 일찍 여수 수산시장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 여수에 사는 지인을 만나 함께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장군의 어머니께서 사셨다는 집터를 찾아갔다. 길가에는 ‘이충무공 어머님 사시던 곳’이란 푯말이 붙어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요즘 주변 정리를 하느라, 한창 공사 중이다. 전남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 1420-1번지. 옛 집터 인 듯한 곳에는 거북선에 비를 세운 형상물이 있는데, 이 근처 어디인가 이충무공의 모친이 5년간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거북비가 서 있는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 7칸 정도에, 측면 두 칸 반 정도의 팔작 겹처마 지붕으로 된 집이 있다. 현재 이 집은 사람들이 거주를 하고 있는데, 현재 거주를 하시는 분은 정평호(남, 79세)로 임지뢔란 시 활동을 하던 정대수 장군의 후손이라고 한다. 이분은 임진왜란 때부터 선조들이 대대로 이 터에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고택다운 옛집, 1930년대 지은 것으로 전해져

현재의 집주인도 이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조상 대대로 이 집터에서 살았다는 분들. 집터는 옛집 터지만, 집은 그동안 여러 번 개축을 한 것인지 옛 모습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현재 이 집은 예전 충무공의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은 아니다. 당시 발굴을 할 때 대들보 등이 발굴된 곳은, 현재 정대수 장군의 후손인 정평호옹이 살고 계시는 집의 부엌과 장독대에 걸쳐 있다고 전한다.

현재 주인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 옛 선조들이 살던 집터에 나중에 보수, 개축을 했다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는 아마 사랑채나 별채에 기거를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대수 장군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문 앞에 선 안내문에 보면 「1972년 옛 집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에서 대들보, 마룻대, 세살창문과 같은 집 구조물과 맷돌, 디딜방아용 절구, 솥 같은 세간들을 찾아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 주변으로는 수령 300년이 넘는 팽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팽나무는 수고가 25m에, 나무의 둘레는 5.2m나 되는 거목이다.



문화재 발굴조사 후 문화재지정도 고려 해

집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사집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주춧돌은 원형으로 다듬었으며, 그 위에 팔각기둥을 세웠다. 사방에는 처마 끝에 활주를 받쳐 놓았으며, 전체적으로 보아도 고택의 멋스러움이 그대로 배어있다.

여수시 문화재 관련 담당자는 내년에 발굴에 필요한 예산 신청을 했다고 한다. 발굴 후에 이 터가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살던 집이라고 밝혀진다면, 이곳에 복원계획도 고려해 보겠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현재의 집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만일 이 터가 발굴조사 후에도 정확한 고증이 들어나지 않는다면, 관광자원으로 활용을 할 것이라고 한다. 어차피 난중일기에 밝혔듯이, 송현마을에 어머니를 모셨다고 기록이 있고, 현재의 집이 당시 정대수 장군의 집터이기 때문이다. 충신이요 효자인 이충무공의 어머니가 살았다는 집터. 그곳에는 충무공에 관한 역사를 안내판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아직 발굴이 끝나지 않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