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2 운주사 경내에 소재한, 보물 제797호 운주사석조불감(雲住寺石造佛龕)을 보는 순간 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금동으로 목조각으로 만든 작은 불감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이렇게 거대한 석조불감이 있다니.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뜻하는 것이다.

 

하기에 일반적인 건축물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다탑봉 골짜기에 자리한 운주사 석조불감은 건물 밖에 만들어진 감실의 대표적 예이다. 다탑봉이라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주사 일주문을 들어서면서부터, 산의 정상에 이르는 동안 여러 기의 석탑과 불상을 볼 수 있다.

 

 

팔작지붕으로 꾸민 거대 석조불감 

 

건물을 본뜬 불감감실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양쪽 벽을 판돌로 막아두고 앞뒤를 통하게 하였다. 그 위는 목조 건축의 모양을 본떠 옆에서 보아 여덟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처럼 다듬은 돌을 얹어놓았다. 감실 안에는 2구의 불상이 모셔져 있는데, 특이하게도 등이 서로 맞붙은 모습으로 흔히 볼 수 없는 예이다.

 

불상을 새긴 수법은 그리 정교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들어 나타난 지방적인 특징이 잘 묻어나온다. 이처럼 거대한 석조불감을 만든 유례를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등을 서로 맞댄 감실 안의 두 불상 역시 특이한 형식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의 특징을 그대로

 

불감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안에 계신 부처님의 상을 보니, 눈을 지그시 감고계시다. 누군가가 입을 훼손한 듯도 하다. 꺼멓게 보이는 부분이 아마 무엇인가를 갖고 훼손을 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부처님 스스로 말 많은 세상, 입을 다물어 버리셨는가도 모르겠다. 좀 더 멀리 떨어져 바라다본다. 그래도 석조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은 미동도 없다.

 

그저 세상사 다 접어두고,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누군가 열심히 마음을 다하면 언젠가는 저 눈도 뜨시지는 않을까? 뒤로 돌아가 본다. 또 한분의 부처님이 앉아계시다. 등을 서로 맞대고 계신 두 분의 부처님들이 어떤 말을 우리에게 하는 것일까? 두 손을 모아 가슴으로 올린 부처님 역시 한일자로 굳게 입을 다물고 계시다.

 

 

 

그러나 찬찬히 올려다보면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가 느껴진다.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저 두 분은 등을 마주하고 계시는 것일까? 한분은 인간세계를 바라다보면서 할 말을 잊으신 것이고, 또 한분은 피안(彼岸)인 운주사 안을 바라보면서 참 세상을 알려주시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네 속 좁은 인간들이 그 뜻을 어찌 알리요. 하지만 운주사 불감 안에 계신 부처님들은 오늘도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암시하고 계시다. 혹 그것이 세상을 바로 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마디 일침은 아니었을까?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그런 주문은 아니었을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 불감 안에 좌정하신 부처님을 바라보다가 그만 고개를 숙이고 만다. ‘맞습니다. 세상에 가장 더러운 것은 바로 저랍니다. 오늘 그 모든 것을 참회합니다.’ 눈을 들어보니 주변에 가득한 탑들 위로 초여름의 무더운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불감 안에 두 분이 매우 더우셨는지.

정자를 지을 때 옛 선인들은 무엇을 먼저 생각했을까? 우선은 물과 숲이다.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에는 송림이 우거졌다면, 그것이 정자를 세우는데 최적의 조건이었을 것만 같다. 전국을 다니면서 보면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는 정자들이 상당히 많다. 그 모두가 빼어난 절경에 자리를 하고 있다.

앞으로는 물이 흐르고, 기암절벽 위에 정자가 서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노송 몇 그루가 정자를 가린다. 한편은 대숲이 있어, 바람이 불때마다 대숲이 화답을 한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정자 하나가 서 있지 않다면, 그것이 오히려 자연을 무시하는 처사가 될까? 그렇게 아름다운 정자 송석정(松石亭)은, 전남 화순군 이양면 강성리 762번지에 소재한다.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송석정

당쟁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을 한 양인용이 처음으로 지었다고 전하는 송석정. 양인용은 제주인으로 자는 ‘여함(汝涵)’이요, 호는 송석정(松石亭)이다. 조선조 명종 10년인 1555년 을묘 12월에,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양산립의 장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한 송석정은 소시에 등과하여, 종사품인 훈련원첨정에 이르렀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등극하면서, 당시의 조정은 당쟁으로 인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광해군이 등극해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유폐시키자, 공은 이를 반대하는 충간을 광해군에게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공은 이곳으로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자호를 붙여 ‘송석정’이라 당호를 지었다.



글 속에 남아있는 송석정의 마음

대장부 어지러운 때를 만나
거룩한 진리안고 숲속에 있네.
궁약은 경서 속에 달래보고
공명은 물거품으로 생각하도다.
소나무 어루만져 달아실(=月谷) 바라보며
돌덩이 헤아리며 용두암을 거닐어보네
이 깊은 애정(哀情)을 뉘와 더불어 논할까
좋은 벗들 찾아와 머물었건만

송석정의 원운(原韻)에 보면 나라를 향한 걱정을 하면서 단장의 애한을 달래고 있다.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 공은 많은 시인묵객들과 교류를 하면서 지냈다. 정자 안에 빼곡하게 걸린 수많은 시판들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다.




‘절경’이란 말이 어울리는 정자 송석정

송석정이 차음으로 지어진 것은 400여 년 전이다. 8월 21일 전라남도 답사를 하면서 찾아간 송석정. 많은 사람들이 정자에 올라있다. 무슨 일인가해서 다가갔더니, 공의 후손들이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한다. 바쁜 답사 일정만 아니라면, 나도 그 안에 끼어 함께 즐기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권하는 술잔을 마다하고 돌아서려니, 공이 한마디 할 것만 같다. ‘술 한 잔 마시지 못하고 돌아서는 주변머리 없는 인간’이라고.

송석정은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이다. 덤벙주초를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중앙에 한 칸 온돌을 놓아, 주변경치를 사시사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은 사방을 모두 열어 위로 걸게 하였으며, 한편 마루를 높여 그 아래 아궁이를 두었다.



주변으로는 암반이 솟아있고, 노송들이 가지를 뻗고 있다. 그 밑으로는 물이 흐르고, 앞으로는 들판이 펼쳐진다. 정자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자리에 서 있는 송석정, 그 아름다움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가 않을 듯하다. 언젠가 시간을 내어 다시 한 번 찾아가는 길에는, 그 곳에서 공의 마음을 읽기 위해 술 한 잔 따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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