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그 어느 것 하나에도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학술적인 것이야 전문가들이 더 잘 알아서 설명을 할 테고, 난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그 외에 들을 수 있는 이야기에 더 매력을 느낀다. 누구나 나에게 질문을 한다. 그 힘든 문화재 답사를 왜 하느냐고?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존재감’ 때문이라고 답을 한다. 과거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세월을 지내 오는 동안 그 문화재를 만든 장인은 만날 수 없어도, 문화재로 인해 당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난 그것을 ‘존재감’이라고 설명을 한다. 즉 내가 살아있음을, 그리고 살아감을 느끼는 것이다.


덩그러니 남은 동헌의 문, 죽수절제아문

전남 화순군 능주면 석고리 754번지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인 ‘죽수절제아문’이 남아있다. 조선시대 능주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이 업무를 보던 동헌건물인 녹의당의 정문이다. 이 문은 최초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조 32년인 1599년에 문을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능주목사로 부임한 정윤이 녹의당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지어진 죽수절제아문은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여 있다. 죽수절제아문의 현판은 선조 35년인 1602년 당대의 문필가인 정이(1568∼1625)가 객관인 능성관과 함께 쓴 현판이다.




주변의 거목들로 아문의 역사를 알 수 있어

죽수절제아문은 전라남도에서 보기 드문 구조를 가진 간결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능주는 죽수, 연주 등으로도 불렀으며, 인헌황후 구씨의 관향이라 하여 인조 10년인 1632년 능주목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능주의 동헌건물의 문이 바로 죽수절제아문이다.



죽수절제아문은 현재 능주 관청의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아름드리 거목들이 있어, 이곳의 역사를 알게 한다. 뒤편에는 이곳이 녹의당의 동헌지였음을 알려주는 커다란 석비 하나가 서 있다. 그것마저 없었다고 하면, 얼마나 쓸쓸히 이곳을 지키고 있었을까?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문화재

시간이 지났다. 답사를 하고 정리를 하다가 보면, 가끔은 빠트리는 것도 있다. 그런 것은 답사를 하지 못할 때 하나씩 꺼내어 본다. 그럴 때마다 마치 숨겨 놓은 보물을 만나는 기분이다. 지난 8월 21일 화순군 지역을 답사하다가 만난 죽수절제아문. 당시의 느낌은 소중한 문화재 하나가 천덕꾸러기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문 앞에는 누군가 차를 떡하니 받쳐 놓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도 없게 만들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버젓이 담배를 피워대고 있었다. 문화재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영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한 마디로 문화재의 가치나 중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민족인 듯하다.




수많은 문화재들. 그리고 그 안에 간직한 사연. 그것을 찾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 길이 때로는 힘이 들고 고통도 따른다. 하지만 그것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바로 존재감 때문이라고 늘 스스로 위로를 한다. 그 존재감 안에 내가 있고, 그 길 위에서 만나는 문화재가 있기 때문이다.

전남 화순군 이양면 증리 산195-1 쌍봉사에 소재한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 탑비. 철감선사 도윤의 탑비인 이 통일신라 시대의 석조작품은, 몸돌인 비는 사라지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남아있다. 바로 옆에는 국보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철감선사(798∼868)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이다. 헌덕왕 7년인 82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문성왕 9년인 847년에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신라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하기도 하였다. 전국을 다니다가 이곳의 절경에 반해 절을 짓고, 스스로의 호를 따 절 이름을 ‘쌍봉사’라고 지었다. 이곳에서 71세의 나이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철감’이라 내리었다.



몸돌은 어디로 가고...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아 있다. 귀부를 받치고 있는 네모난 바닥돌 위에 올려진 거북은, 용의 머리를 하고 여의주를 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이다. 이 탑비에서 특이할 점은 오른쪽 앞발을 살짝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한걸음 앞으로 나갈 듯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귀부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사실적으로 표현을 하고 있는 작품을 볼 수가 없다. 오른쪽 앞발 하나를 위로 살짝 치켜 올려진 모습이, 나그네를 즐겁게 만든다. 입의 양편 입가에는 수염이 나 있고, 입에 문 여의주는 방금이라도 굴러 떨어질 듯하다. 사실적이고 섬세한 조각이 눈에 띠는 작품이다,



몸은 거북이요, 머리는 용두로 조각을 한 귀부의 형태는, 통일신라 때부터 고려 초기로 넘어오면서 보이는 특징적인 조각술이다. 그런 점으로 보아 철감선사 탑비가 이런 용두의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은 아니었을까 생각도 해본다.

용은 사라지고 구름만 채운 이수

철감선사 탑비의 머릿돌은 용조각을 생략한 채, 구름무늬만으로 채우고 있다. 아마도 구름무늬만으로 이렇게 조각을 한 이수도 나름대로 특이한 형태이다. 옛 이수들을 보면 용이 거의가 조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수는 측면에서 보면 앞면을 절단을 한 것처럼 반듯하게 보이고, 뒤로는 삐져나오게 조각을 하였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뛰어난 수작이다. 철감선사 탑비는 여러 가지 특별한 것이 있다. 거북이의 등에 새겨진 귀갑문도 이중 형태의 6각형 테두리로 새겼다. 마치 기존의 탑비의 형태를 따라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방법으로 탑비를 꾸몄다는 점이다.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에 세워진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전체적인 조각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격렬한 거북받침돌인 귀부의 조각들은 매우 훌륭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렇게 귀부의 거북이가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 곳은 어디였을까? 부처의 세계였을까? 아니면 선사의 속가 고향인 황해도 봉산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탑비 주의를 돌아본다. 이수 위에 꽂힌 장식 하나가 사라진 것이 영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래서 답사를 하면서 받는 마음의 상처는 하루도 가실 날이 없는가 보다.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중리 산195-1 번지에 소재한 쌍봉사. 쌍봉사에서 좌측으로 산길을 조금 오르면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이 자리한다. 이 철감선사탑은 철감선사의 부도탑이다. 부도란 옛 고승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일종의 무덤을 말한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당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신라 문성왕 9년인 847년에는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다. 경문왕대 때에 이 곳 화순의 아름다운 경치에 끌려 절을 지었는데, 절 이름을 그의 호인 ‘쌍봉’을 따서 ‘쌍봉사’라고 이름 하였다. 경문왕 8년인 868년에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을 하였으며, 경문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국보 제57호인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 조각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있다


뛰어난 조각술이 돋보이는 철감선사탑

8월 21일에 쌍봉사를 찾았으니,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간다. 화순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찾아간 쌍봉사. 쌍봉사는 고찰답게 많은 문화재들이 경내에 소재한다. 철감선사탑이 있다는 곳으로 오른다. 주변을 담을 쌓은 안에 자리한 탑 옆에는, 보물 제170호인 비문이 사라진 탑비도 함께 있다. 담이 터진 입구 쪽으로는 탑이 서 있고, 그 안쪽에 탑비가 있다.

철감선사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통일신라 때의 일반적인 탑의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탑은 전체적으로 모두 남아있으나, 아쉬운 것은 꼭대기의 상륜부인 머리장식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철감선사탑은 기단이 상중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기단부의 장식이 화려한데 그 중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화려하다.





하층기단인 밑돌은 2단으로 조성했는데 8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이 사자들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마치 탑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이다. 사자의 아래는 조금 넓게 조성을 해 구름문양을 조각하였다, 그래서 마치 사자들이 구름위에 앉은 모습을 표현하였다.

조각한 장인의 염원이 담긴 탑

상층의 윗돌 역시 2단으로 조성을 하였다. 아래에는 커다란 앙화를 조각해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를 새겼다. 이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 비천상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몸돌에는 사천왕상과 함께 비천상까지 돋을새감으로 조각하였다(위) 천상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들은 모두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몸돌의 조각은 사천왕상을 조각하는 것에 비해, 철감선사탑은 비천상까지 함께 새겨져 더욱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지붕돌은 뛰어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뛰어난 장인에 의해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철감선사탑을 조성한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인 868년쯤으로 추정된다. 상륜부가 사라져 아쉽기는 하지만, 조각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다듬은 장인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걸작품이다. 아마도 이 탑을 조성한 장인은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운 비천인이나 가릉빈가들이 살고 있다는 극락을 염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8마리의 사자들은 각각 자세를 달리해 앞을 주시하고 있다. 탑을 지키기 위한 것일까? 


당시에 만들어진 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평가를 받고 있는 철감선사탑. 그곳을 떠나기 아쉬운 것은 언제 또 다시 이런 아름다운 탑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다

전라남도 화순군 춘양면 우봉리에는 수령 450년이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자리하고 이 느티나무는 마을에서 심기는 신목(神木)이다. 이 나무를 보러 갔던 것은 아니다. 바로 그 느티나무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인, ‘침수정’을 만나기 위해 비가 오는 널인데도 길을 나선 것이다.

마을에 도착하니 어르신들이 어디 야유회라도 가시는 것인지, 버스에 탑승을 하고 계시다. 할머니 몇 분이 나무아래 계시기에 왜 안 가시느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저 웃기만 하신다. 느티나무를 지나 야산으로 조금 오르다가 보면 침수정이 자리한다. 침수정은 윤선도의 문인이던 홍경고가 17세기에 지었다고 전한다.


수수함이 더 아름다운 침수정

침수정을 다녀온 지는 날이 꽤 지났다. 지난 8월 20일에 화순군을 답사하면서 다녀 온 곳이다. 마침 그 전날 온 비로 인해, 침수정을 오르는 길이 많이 파였다. 물길을 피해 침수정으로 오르니, 정자는 전라도 지역의 전형적인 정자의 형태로 지어졌다. 중앙 가운에 한 칸 방을 드린 조촐한 정자이다.

정자 안벽에는 송사, 기우만 등 문인들의 글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글만 해도 37개나 된다. 아마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홍경고의 사람 사귐이 대단했나보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 팔작집으로 지어진 침수정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저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소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가운데에 방을 한 칸 드렸다. 그러나 실제로 방은 두 칸 방이 된다. 옆에서 보면 중앙서부터 뒤편까지 방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누마루를 깐 주변에도 무엇 하나 시설물들이 없다. 아마도 정자의 주인이 앞서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인 듯, 그저 수수한 촌 아낙 같은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 펼쳐지는 벌판을 바라보며 시심을 일깨웠을까?

침수정을 한 바퀴 돌아본다. 잎으로 펼쳐지는 벌판에서 시원한 비바람이 불어온다. 답사를 하면서 흘린 땀을 바람이 식혀준다. 그도 고맙기만 하다. 마루에 걸터앉는다. 앞에 배롱나무에는 꽃을 붉게 피웠다. 저 나무는 얼마나 오래 전부터 이곳에 서 있었을까? 아니면 누군가 허전한 정자를 벗 삼으라고 심어놓은 것일까?

별안간 벌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 보니 정자 안 기둥에 꽤 큰 말집이 하나 달렸다. 그리고는 벌들의 요란스레 나는 소리가 들린다. 낯선 나그네의 등장이 별로 달갑지 않다는 것인지. 자연석으로 그냥 철버덕 갖다가 놓은 덤벙주초가 눈길을 끈다. 저렇게 자연이 그 자리에 있어 좋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흐르는 지석강이 저만치 보인다. 그 강물이 굽이굽이 돌아 정자 앞으로 다가왔으면 좋으련만. 빗줄기가 세차진다. 갈 길은 멀고 돌아보아야 할 곳은 많다. 오늘 해 안에 몇 곳을 더 들리려면, 빗속에서라도 길을 나서야 할 판. 정자 주인의 고매한 성격 한 자락 들고 침수정을 뒤로한다.

화순군 남면 유마리 321번지, 모후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유마사. 유마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승보종찰인 송광사의 말사이다. 유마사에 대한 기록은 『동복읍지』와 『유마사향각변건상량문』등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백제 무왕 28년인 627년에 중국 당나라의 고관이었던 ‘유마운(維摩雲)’과 그의 딸 ‘보안(普安)이 창건하였다. 당시 유마운이 수행하기 위해 지은 암자가, 지금의 귀정암의 옛터로 뒤쪽에 아직도 유마운의 탑의 남아있다. 유마운의 딸 보안 역시 불법을 깊이 깨달았는데, 동복 이서면의 보산 뒤에 보안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보아 유마사의 창건연도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이라는 것이다.



보안이 놓았다는 다리 보안교

유마사는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안으로는 차가 들어갈 수 없다. 등산로로 만들어진 도로는 양편으로 숲이 우거져 있으며, 한편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8월 21일 찾아간 유마사. 입구서부터 길은 양편으로 갈라진다. 등산로로 이용하는 우측 길과, 일주문을 통과하는 좌측 길이 있다.

일주문이 보이는 좌측 길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바위 위에 돌탑을 쌓아놓았다. 저렇게 위태롭게 몇 날을 버티고 있었던 것일까? 돌탑이 허물어지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레 발길을 옮긴다. 계곡가에 문화재 안내판이 서 있다.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30호 ‘보안교’라고 적혀있다.



명문이 적혀있는 자리

1400년 전에 놓았다는 보안교

당에서 건너왔다는 유마운.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왜 딸 보안을 데리고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그리고 보안은 왜 멀지 않은 곳에 보안사를 창건한 것일까? 그런 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해줄 사람은 없다. 다만 보안이 채로 달을 건져 올려 비구승을 공부시켰다는 제월천과, 보안이 치마폭에 싸 옮겨 놓았다는 ‘보안교(普安橋)’가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좌측 냇가에 걸려있을 뿐이다.

만일 이 보안교가 전설대로 보안이 놓은 다리라면, 이미 그 역사는 1400년이나 된다. 아마도 자연석으로 만든 다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석조다리일 것이다. 지금은 사용을 하지 않는 보안교. 양편을 철책으로 막아놓아 출입을 금지시켰다. 예전에는 이 다리를 건너 유마사로 출입을 했을 것이다.

다리는 계곡 동서양편을 걸쳐 연결하고 있다. 길이는 510cm 정도이고, 너비는 넓은 곳이 315cm, 좁은 곳은 200cm 정도이다. 화강암 일석으로 만들어진 보안교는 그 두께가 55cm 정도이다. 이 보안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1919년 이전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난 이 보안교에 얽힌 전설대로 1400여년이 되었다고 믿고 싶다.

 



단 한 장의 널다리로 꾸민 보안교

커다란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은 보안교. 흔히 ‘널다리’라고 하는 이 보안교는 여러 장의 석재를 이용한 것이 아니고, 화강암으로 된 단 한 장의 석재를 계곡 양편에 걸쳐 놓은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돌다리는 전통적인 돌다리와는 그 형태가 판이해, 그 조성 연대를 추정하기도 쉽지가 않다.

일설에는 유마사 기록인 1919년에 쓴 <동북군유마사봉향각창건상량문>에 나타나기 때문에, 1919년 이전에 놓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다고 하면, 오히려 전설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는 것이 본인의 주장이다.

돌다리에는 두 곳에 명문이 적혀있다. 계곡 아래쪽에는 ‘유마동천보안교’리고 적었으며, 계곡의 북쪽에는 ‘관세음보살 양연호’라고 엷게 음각을 하였다. 글씨의 크기나 그 새겨진 깊이 등으로 보아, 이 명문은 후대에 양연호라는 인물이 팠을 것으로 보인다.


이 보안교의 역사는 유마사를 살펴보면 전설에 기인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유마사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보물 제1116호 유마사 해련부도의 조성시기가 고려 전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이전에 보안교를 건너 유마사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장의 석재로 놓여 진 유마사 보안교. 그 안에 얽힌 전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낸다. 답사를 하다가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다가 보면, 답사의 일정이 늦어지기도 하지, 그도 또한 답사의 묘미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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