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방화수류정이다. 수원에서 7년 동안 살면서 가장 많이 가본 곳이기도 하다. 이 방화수류정은 화성의 네 곳에 있는 각루(角樓) 중 하나로 동북각루이다. 방화수류정은 1794년 9월 4일 터 닦기를 시작으로 그 해 10월 19일에 완성을 하였으니, 200년이 지난 역사를 갖고 있다.

 

주변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정자

 

화성은 자연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가장 큰 조형물이라고 한다. 화성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지만, 어느 곳 하나 자연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더욱 놀랍다. 방화수류정은 꽃을 좇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아름다운 정자다. 성벽 밑으로는 용연을 파서 나무를 심어 운치를 더하고, 옆으로는 흐르는 버드내 위에 화홍문을 세워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움을 더했다. 누마루로 깐 정자에 올라서면 사방의 경관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방화수류정의 또 다른 멋이다.

 

 

방화수류정의 동편 바로 옆으로는 북암문이 있어, 쉽게 용연을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화성의 암문은 깊고 후미진 곳에 설치한 비밀 문으로, 적이 모르게 가축이나 사람들을 통용할 수 있도록 낸 문이다. 그러나 이 북암문을 이용하면 방화수류정에서 용연까지 가장 짧은 거리로 이동할 수가 있다. 용연은 방화수류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용연의 가운데는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으며, 전체적인 조화를 보이는 이 용연과 방화수류정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성중에서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2단의 벽돌담으로 쌓은 위에 지은 정자

 

방화수류정은 정자의 모양도 특이하지만, 그보다는 전체적인 조화다. 성벽이 높게 오르기 시작하는 산중턱에 지어진 방화수류정은, 그 서 있는 장소마저 눈에 잘 띄는 곳이다. 정자는 이단의 기단위에 세워졌는데, 기단을 벽돌로 쌓아올렸다. 일단의 벽돌을 쌓은 후 장대석 계단을 놓고, 그 위에 정자의 기둥을 세웠다. 그런 다음 다시 벽돌을 높여 정자를 지었다. 이곳에 모든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하다. 

 

좌측에는 문을 달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했는데, 그 문 또한 아름답다. 그 문 안에로 들어간 병사들이 적을 향해 화살을 쏠 수 있도록 하였다. 적과 교전을 하는 성곽의 건물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정자. 그리고 정자로의 기능만이 아니라, 본연의 성곽 기능을 갖고 있는 정자가 바로 방화수류정이다.   

 

 

아름다운 십자문양의 벽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은 정자만이 아니다. 정자 밑에 있는 쪽문을 돌아서면 벽면이 십자모양의 문양을 넣었다. 이런 조선시대 건축에서 많이 나타나는 문양이기도 하다. 이런 문양 하나가 방화수류정을 지으면서, 얼마나 자연경관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가를 생각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벽면이 사방을 둘렀다면, 그 또한 지금과 같이 아름답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한 벽만 그렇게 처리를 한 것이 더욱 돋보이는 미가 아닐까? 아마 방화수류정을 축조한 공인이 그런 것 하나까지 모두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의 기단을 오르면 정자가 한편으로 서 있게 된다. 정자는 남쪽은 쪽문의 위까지 돌출이 되고, 북쪽은 중앙으로 돌출을 시켜 용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게 했다. 그저 넘길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이 된 아름다움이다. 일단의 기단 위 공백은 네모난 흑색으로 된 돌을 깔았다. 그런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쓴 방화수류정이다.

 

 

지붕위에 올린 용두

 

아마 방화수류정만큼 많은 용두가 지붕 위에 올려 진 건물은 없을 것이다. 방화수류정은 정자가 여기저기 돌출이 되어있고, 그 돌출이 된 곳의 지붕이 서로가 엇물려 있다. 그 양편에 모두 용머리를 올렸다. 또한 한 가운데는 절병통과 같은 모양도 있다. 이렇게 많은 용머리를 올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위치는 정조가 직접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45일 만에 공사가 끝난 이 정자에서 활을 쏘기도 했다. 방화수류정은 정조 자신이 왕권을 상징하는 마음을 알린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정자이기 때문에, 그 많은 용두를 지붕 위에 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방화수류정의 지붕 위에 유난히 많은 용두들. 아마 정조가 끊임없이 추구해 온 힘이 있는 왕조를 상징하는 듯하다.

 

 

수원 팔경의 하나인 '용지대월'이 용연에

 

보름달이 뜨면 방화수류정에는 네 개의 달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늘에, 또 하나는 바로 용연에 뜬단다. 그리고 세 번째의 달은 술잔에, 네 번째의 달은 사랑하는 님의 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멋진 말은 우리나라 전역에 걸쳐서 나타난다. 강릉 경포호에도 있다. 그러나 화성의 방화수류정 아래 용연은 그것과는 뜻이 다르다. 그래서 용연위에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용지대월(龍池大月)'이라고 하여 수원 팔경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 이 용연은 화성의궤에 나타난 용연과는 다르다. 지금의 용연은 당시의 용연보다 많이 형태가 달라졌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처음 용연을 조성했을 때는, 반달 모양의 연못에서 낚시를 즐겼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당시의 용연은 둘레가 250m에 깊이가 185cm라고 적고 있다. 지금의 연못보다 오히려 크다. 그 연못 가운데 인공 섬을 만들고 아름다운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고 했으니, 그 운치가 어떠했을까?

 

아름다운 용연이 제 모습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도 한결 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름다운 방화수류정, 찬바람도 마다않고 찾아간 곳에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시간을 잃어버렸다.

하늘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다산 정약용이 한 말이다. 다산은 신분타파를 위한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의 생애는 파란이 많았다. 지난 날 드라마 이산에서 보이는 다산을 처음부터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낸 것도, 아마 다산의 그런 파란만장한 일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화성. 당시 30세이던 다산은, 화성의 모든 축성과정을 그려내고 감독하는 소임을 맡았다. 화성을 축조할 때 다산은 서양의 서적을 탐독했다. 그 결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거중기를 만들어 화성축조에 공헌을 하기도 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다산은 대단한 학자요, 과학자였다. 이산에 다산이 처음 등장할 때 성균관 담을 넘는다거나, 망원경 같은 것으로 밖을 관찰하는 등의 행동은 결코 허황된 표현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뒤늦게 벼슬길에 오른 장약용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의 저자로 익히 알려진 사람이다. 다산 정약용과 이산 정조와의 만남은 화성(華城)이라는 시대 최고의 걸작품을 만들어냈다. 화성은 정조 일생일대의 커다란 업적이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 6월 16일에 경기도 광주군 마현리에서 진주 목사 이제원의 넷째아들로 출생하여, 1783년 회시라는 과거에 3등으로 합격을 하였으니 22살에 급제를 한 셈이다. 그러나 바로 벼슬길에 나선 것은 아니다. 1789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 벼슬을 받았으니, 이때의 나이는 이미 27세 때였다.

 

최초로 배를 이용해 강을 건너다

 

요즈음 군인들이 도하작전을 할 때면, 강에 배를 연결해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하작전이 다산이 최초로 사용을 하였다고 하면, 틀린 말이라고 할까?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 보면, 한강을 건널 때 배를 연결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너는 모습을 보인다. 당시의 배다리인 주교는 1795년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화산을 다녀올 때 사용하였다.

 

당시 정조 이산은 1,779명의 문무백관, 나인, 호위군사 등과 함께, 779필의 말로 다리를 건넜다. 당시의 주교는 가로 4m, 세로 11m의 목선 나룻배 37척을 연결해 만들었다. 당시 이산의 능행차도에는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가 그린 반차도에 상세하게 남아있다.

 

우리 기록문화의 최고봉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이는 63쪽의 반차도(班次圖)는 기록문화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이 그림들은 김홍도의 지휘아래 김득신,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 당시 궁중 화원들이 그린 조선 최대의 기록화이다. 반차도를 그대로 재현한 수원 화성문화재의 정조 능행차는 바로 이 반차도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이러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정약용은 이론만 내세우는 인물들과는 달랐다. 실제로 체험을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정리를 하는 학자이기도 했다. 정약용은 당시 서구에서 들어 온 서적은 거의 다 탐독을 했다고 한다. 그만큼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기에 거중기를 만들고,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백성을 자신만큼 생각하는 정약용과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 외에도 탐구가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것은, 그러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와 행정가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강한 군주가 되고 싶어 하는 정조의 굳은 의지와, 애민사랑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화성은 정부와 행정, 그리고 학자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완성을 한 당대 최고의 걸작품이었다.

화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답게 축성한 성이다. 이렇게 자연과 조형을 이루면서 축성이 된 화성은, 물자를 조달하는데도 강제적으로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철저하게 그에 맞는 비용을 지불하고, 물자를 구입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화성성역의궤>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있어, 당시 기록문화가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가 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만1천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만6천960냥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의 성돌 채취흔적

 

가까운 곳에서 돌을 채취해 와

 

화성을 축성 할 때 사용된 돌은 그 무게로 인해 멀리서 운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성 축성의 장소에서 가까운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권동 둥에서 석재를 채취했다. 지금도 팔달산과 숙지산, 여기산 일대에는 당시 돌을 뜬 자국들이 남아있다.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은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라고 감탄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옛 지명을 보면, 다 그렇게 변하게 된다. 앞을 내다본 선조들의 예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숙지산의 성돌 채취흔적(위)와 여기산의 흔적

 

부석소를 설치하고 성돌을 떠내

 

공석면 숙지산은 현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이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만1천100덩어리, 여기산 6만2천400덩어리, 권동 3만2천덩어리, 팔달산 1만3천900덩어리 등 18만9천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렇다고 부석소에서 떠 낸 돌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커다랗게 떼어내 옮겨온 돌은 치석소로 보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후에 사용을 했다. 특히 성곽에 사용된 돌의 경우 일정한 규격에 의해 척수에 따라 대. 중. 소로 규격화한 다음, 축성현장으로 옮겨져 성을 쌓는데 사용된 것이다.

 

 공석면 숙지산의 부석소 표지

 

각종 운반용 수레 사용

 

부석소에서 캐어낸 돌을 어떻게 화성의 축성현장까지 옮겼을까? 돌덩이 하나가 상당히 컸던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 돌을 나르는 것도 힘이 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돌을 옮기기 위해서 지시를 내린다. 즉 도로를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하게' 도로를 개설하라고 지시했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날랐으며, 때로는 썰매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 40마리가 끌었다는 대거에 올린 돌의 크기는 상당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화성의 축성에 사용된 돌, 지금은 팔달산과 여기산, 숙지산 등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는 정도지만, 그 역사의 현장을 가늠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모든 것이 <화성성역의궤>에 고스란히 기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동문인 창룡문 성벽에 이름이 각자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독은 누가 했으며, 석수는 누구, 그 외에 몇 명이 참여를 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이러한 실명제로 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성역의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기록을 해 두었다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적힌 기록을 보면 심지어 어느 지역 출신 아무개가 언제부터 어디서 일을 했는지, 또 임금은 얼마를 받았는지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단 한 명이라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던 정조의 애민주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적은 것은 팔달문과 화서문에도 보인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해 복원을 한 화성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20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때문이었다. 돌 하나 목재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기록을 해 놓았으며, 일일이 그림을 그려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에 누가 얼마를 받았는지도 꼼꼼히 기록을 해 놓았다.

 

화성을 돌다가 보면, 성을 쌓은 형태가 여러 가지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구간마다 성을 쌓은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오랜 세월 풍화에 지워져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성벽의 기록으로 보아, 모든 장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축성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처럼 머릿돌에 해당하는 회사명을 적어놓듯, 그렇게 책임자들의 성명을 기록한 것이다.

 

 

 

 

밥숟가락의 숫자까지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화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과, 벽돌, 목재, 각종 철물, 일꾼들을 먹일 식량과 땔감, 자재를 나를 수레와 우마, 공사를 기록할 지필묵, 단청에 들어가는 물감은 물론, 가마니와 땔감, 숯, 노끈, 공구, 석회 등 화성성역의궤에는 위와 같은 물자들 외에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 자질구레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자의 세세한 항목과 수량, 단가, 구입처 등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다.  

 

화성성역의궤의 제5~6권은 ‘재용(財用)편’으로, 여기에는 화성 성역에 사용 된 각종 물품의 종류와 수량, 성곽과 각 부대시설별로 소요된 물품의 내용 과 단가가 기록돼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화성축성 공사에 들어간 총 공사비용은, 물자와 인건비 등을 합쳐 모두 87만3천517냥7전9푼이 소요됐다고 적고 있다.  

 

 

 

2달만 일을 하면 초가집을 한 채 살 수 있어

 

정조는 화성 성역을 하면서 각 처에서 올라온 인부들에게 꼬박꼬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 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기록에 의하면 화성 축성 및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고 한다.

 

화성의 축성시 장인들에게 지급된 품삯 총액은, 12만8735냥4전3푼이었다. 이 가운데 석수에게 지급된 금액이 7만3164냥으로 52.3%를 차지했고, 미장이에게 2만4419냥7전으로 19%, 목수들에게는 1만3381냥으로 10.4%, 대장장이는 1만745냥8전7푼으로 8.3% 등의 순이었다.  

 

전문 기술자들인 장인 외에 잡역부인 ‘모군(募軍)’에게 지급한 돈이 11만7520냥 8전7푼이었으며, 목재나 돌을 운반하는 ‘담군(擔軍)’에게는 5만8561냥5전7푼이 지급되어 축성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지급된 총 품삯의 액수는 30만4817냥8전4푼에 달했다. 화성 축성에 쓰인 목재와 석재 등의 총액이 39만201냥1전1푼임을 감안하면 일꾼들에게 지급된 품삯의 비중을 알 수 있다.

 

 

 

참고로 이때 성인 잡부 하루치 품삯이 대략 2전5푼이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축성 예정지에 있던 집들을 사들이면서 후한 값을 지불했는데, 북리 지역에 살던 송복동이라는 사람의 5칸짜리 초가집을 수용하면서 15냥 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인부들이 당시 5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려면 집의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2개월 정도 잡역을 하면 됐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화성이 딴 성과는 달리 치밀하고 아름답게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실명제와 함께 임금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그냥 겉도는 화성이 아니라, 화성을 하나하나 보아가면서 느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산 정조는 화성을 축성할 때, 직접 화성축성 장소까지 행차를 하기도 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보면 8일 간의 화성행차(1795년 윤 2월 9일 ~ 16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은 물론, 행차에 들어간 비용과 물품, 재료, 비용 등 하루의 일과를 자세히 적고 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현릉원에 참배를 한 후 8일간의 행차 중 넷째 날인 윤 2월 12일에 오후와 야간에 화성에서 두 차례 대단위 군사훈련을 한다. 이 군사훈련의 모습은 ‘성조(城操)’와 ‘야조(夜操)’라고 하여, 김홍도의 그림 ‘서장대 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 ‘연거도’ 등에 자세히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연거도에 보면 횃불을 든 군사들이 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성안의 집집마다 등에 불을 밝힌 모습이다.

 

 

 

이산 정조의 꿈인 야조

 

정조는 왜 두 차례에 걸쳐 화성에서 군사훈련을 강행하였을까? 정조는 왕권강화를 위해 무단히 노력을 한 군왕이었다. 그런 정조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화성에 행차를 한 것도, 군사 훈련을 두 차례 실시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안에 내재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즉 친위부대인 장용영 외영의 1만 명이 넘는 군사의 막강한 군세를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당시 화성의 장용영 군사들은 팔달문 일대에 주둔하는 팔달위에 3,218명, 행궁 일대인 신풍위에 1,651명, 화서문 일대의 병력인 화서위에 3,028명, 장안문 일대인 장안위에 병력이 3,098명, 창룡문 일대의 병력인 창룡위에 2,906명이었다. 그 전체 병력이 자그마치 13,899명이었다.

 

이 많은 인원이 군사훈련을 했다고 하면, 그 위세는 실로 대단했을 것이다. 더욱 장용영의 군사들은 가장 무예가 뛰어난 군사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면, 그 훈련을 보면서 누구도 왕권에 대한 도전을 생각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훈련자체가 실로 어마어마한 압박으로 다가왔을 테니 말이다.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야간 군사훈련

 

제49회 화성문화제의 둘째 날인 10월 8일. 오후 8시부터 1시간 30분 동안 화성의 동문인 창룡문 일대에서 벌어진 ‘화성, 정조의 꿈 야조’는 큰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지난해까지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무예24기 시범단의 숨소리와 마상재의 모습을 보면서, 당시 장용영 군사들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는 그보다 시연장을 더 넓혔다. 관객들은 도로건너 연무대 앞에 자리를 틀었고, 시연은 창룡문 앞 잔디광장 일원에서 펼쳐진다는 것이다. 솔직히 올해 야조를 기대한 것은, 정조 당시 그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인지. 한 마디로 올해 야조는, 전혀 야조답지 않았다는 생각이다. 넓고 크고, 화려한 조명과 음향 등은 대단했다. 그러나 정조의 꿈인 야조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그곳에는 정조의 꿈은 없었다. 그저 화려하게 포장된 그야말로 ‘총체공연’인 공연 모습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처음 20여분 동안 무예24기 시범단의 모습은 늘 보던 대로였다. 늘 보아오지만 창, 검, 봉 등 <무예도보통지>에 보이는 무술과 마상재 등을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보여주었다. 다만 거리가 워낙 멀어서 그들과 함께 호흡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지만. 문제는 정조가 이곳으로 행차를 한 후이다.

 

야간군사훈련의 의미도 해석되지 않은 야조

 

그런 데로 연희가 시작되나보다 했더니, 갑자기 창룡문을 화면을 삼아 스크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새장 안에 갇힌 새가 날고, 말을 탄 군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더니 갑자기 비행기가 폭격을 하고 난리법석을 떤다. 아마도 사도세자의 죽음을 상징한 듯하다. 관람객들이 웅성거린다. 무슨 이유인지 이해가 가질 않기 때문이다.

 

그 후에 나타나는 것은 문에서 쏟아져 나온 무희들이, 창룡문 문루에서 떨어져 내린 긴 천을 끌어다 놓더니, 변형된 도살풀이를 추기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넋이라도 달래 보려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이때쯤엔 이미 ‘야조는 물 건너갔다.’라는 느낌이다.

 

 

 

 

정조의 명에 의해 야간군사 훈련이 행해진다. 성문으로 쏟아져 나온 장용영의 군사들과 적들이 서로 진을 형성한다. 그리고는 ‘학익진을 펼쳐라’라는 호령과 함께 양편이 달라붙었다. 그리고는 끝이 났다. 성문 양편에서 발사가 되는 신기전은 폭죽에 불과했다. 신기전의 위엄은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과 진배없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온다. 거기에는 장용영의 힘도, 정조의 꿈도 없었다. 결국은 이 마무리도 무예24기 시범단이 그나마 분위기를 살려주었을 뿐이다.

 

마지막은 더욱 가관이었다. 정조가 훈련에서 승리를 한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연희를 베풀라’고 명령을 했는데, 신칼을 든 무용수들이 나와 난리를 친다. 신칼은 죽은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추었다는 춤이다.

 

한 마디로 실망스런 야조였다. 많은 예산을 투입해 만들어진 야조는, 그렇게 허무함만 남기고 끝났다. 수원에는 화성이나 야조, 무예 24기 등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분들이 많다. 적어도 이렇게 광대한 무대를 사용할만한 야조를 생각했다면, 연결조차 되지 않는 이상한 물건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야조가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한 학습을 해야만 했다.

 

 

실망만 가득안고 돌아서는데 야조를 늘 보아왔다는 한 시민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린다.

 

“수원시민을 배제한 야조는 있을 수 없다. 수원시민들은 정조의 꿈에 당연히 동참을 해야 한다. 지난해에도 횃불을 들고 행사장에 참여를 해, 우리들의 행사라는 긍지를 가졌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막대한 예산을 서울사람들에게 퍼주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수원시민들은 허수아비를 만들고, 외지인들이 들어와 그들만의 잔치를 하는 것을 우리가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도대체 연결도 안되고 이해도 가지 않는 이런 야조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조대왕의 꿈을 찾을 것인가? 행사를 주관한 수원문화재단 관계자들은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2013년은 수원화성문화제가 50회를 맞이한다. 제발 그 50회 야조에서는 진정한 정조의 꿈을 이룰 수 있는 야조를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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