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 팔달구 지동 일대의 골목길에 조성중인 벽화길. 그려지는 그림들도 테마를 주제로 해서 연결을 시키고 있지만, 그 벽화 길에서 만나는 조형물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지동은 화성을 가장 가까이 두고 조성된 마을이다. 건물의 높이 제한은 물론이려니와, 개, 보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곳이다.

 

지동시장에서 제일교회로 올라가 창룡문(화성의 동문)쪽으로 난 날망 길을 흔히 ‘용마루길’이라고 부른다. 이 길을 사이에 두고 화성 쪽으로 난 곳은, 화성으로 인해 모든 규제를 받는 곳이다. 골목은 비좁고 음습하며, 집들은 30년을 훌쩍 넘긴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지동을 벽화로 새롭게 변화시키면서, 지동이 날마다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딴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구조물들

 

지난 해 조성한 2년 차의 벽화 골목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창룡문 방향으로 화성을 바라보고 조성중이다. 이 벽화 길의 총 감독을 맡은 유순혜 작가는 테마가 있는 길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저 처음 지동 벽화골목을 돌아보다가 보면, 조금은 밋밋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 해 그림이 그려진 600m의 벽화골목 중에는 아직 미완선 된 부분들이 있다. 그런 미완성 된 부분도 차츰차츰 정리 중에 있다. 그리고 새로운 IT골목 벽화가 조성 중에 있다. 올해는 더 많은 느낌이 있는 벽화길이 조성된다고 한다. 기대가 크다.

 

 

그런데 지동 벽화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런 그림보다 더 눈에 띠는 것들이 있다. 바로 골목길에 조성 중인 구조물들이다. 지동주민센터 기노헌 총괄팀장과 유순혜 작가에 의해서 조성 중인 이 구조물들은, 골목길을 찾아온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야말로 다양한 변화를 하고 있다.

 

벽에 붙은 평상, 담장 위에 꽃 등

 

지동 벽화골목을 찬찬히 돌아보면 재미있다. 어느 집 담장 밑에는 나란히 화분이 놓여있다. 그 화분들이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화분이 아니고, 목조로 특별 제작한 화분들이다. 초록색에 가까운 목조 화분 위에 핀 꽃들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 그런가 하면, 담장 위에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한 화분들도 꽃을 피우고 있다.

 

 

예전에는 철조망으로 벽이 벌겋게 녹물이 든 집의 담장 위에도 화분이 만들어졌다.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선 화분은, 담장 위에 화단이 하나 생긴 듯하다. 그리고 그 위에도 꽃들이 자라고 있다. 어느 곳에는 청보리가, 어느 곳에는 야생화들이 자라나고 있다. 지동 벽화 길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역시 이 골목의 압권은 바로 담벼락에 매달린 평상이다. 평상시는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가, 주민들이 모여 다모라도 나누려면 손잡이를 돌리면 그 담벼락에 붙은 나무다 내려와 평상이 된다. 보면 볼수록 재미가 있다.

 

“정말 지동 벽화 길은 딴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것들이 있어 좋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벽화 길 조성을 다 마치면, 그 길이가 장장 3km가 넘는 우리나라 최장 벽화 길이라고 하니, 정말 기대가 됩니다.”

 

용인에서 이곳을 보기 위해 가족들과 함께 왔다는 전아무개(남, 41세)는 토요일(6월 1일) 오전 일찍부터 벽화 길을 돌아보고 있다가 이야기를 한다.

 

 

벽화 길의 압권은 아름다운 보도블록과 꽃들

 

그러나 지동 벽화 길에는 또 하나의 압권이라 할만한 곳이 생겨났다. 아직은 짧게 한 구간만 조성을 했지만, 앞으로는 많은 길들이 이렇게 바뀐다고 한다. 보도블록을 예쁘게 깔아놓고, 그 한편에 작은 꽃들을 심어 꽃길을 걷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리고 보도블록 사이에는 잔디를 심어, 그 길을 걷기만 해도 행복함이 밀려온다.

 

지동만의 벽화 길. 지동만의 아름다운 골목, 그리도 지동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조형물들, 지동 벽화 길을 찾는 사람들이 날마다 늘어나고, 지동은 찾아와 벽화 길 조성을 배워가는 지자체들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동의 모든 벽화 골목 조성이 다 끝나게 되면, 아마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골목길이 될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영조 35년인 1759년에 성내 남동에 614호에 2,246명이 살았고, 성내 북동에 462호에 1,862명이 거주를 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 당시 성안에는 1,076호에 4,108명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 초기부터 주변에는 토성 및 석성을 구축하고 적의 침입에 방비를 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성안에 1,044호에 3,631명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혜종 2년인 1836년의 인구는 <남한지>에 의거하여 1,117호에 4,353명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남한산성은 그만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서장대 밑. ‘청량당이라는 당호가 보이는 작은 전각이 있다.

 

 

이회장군을 모신 사당

 

18일 일요일 오후.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찾아간 청량당. 이곳을 찾아온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다. 이곳에서는 매당왕신 도당굿이라는 굿이 펼쳐지기도 하는데, 사전 조사를 하러 처음 찾아간 것이 2002년이었으니,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다.

 

한때는 일제의 문화말살정책과 혹세무민의 미신이나 우상숭배로 몰리기도 하고, 더욱 종교적 사대주의에 기인한 박해로 인해서 중단이 되기도 했던 도당굿. 이 매당왕신 도당굿은 남한산성 축조의 중임을 맡았으나, 지정된 기일 안에 성을 쌓지 못하여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가 된 이회장군과 그 부인 송씨의 넋을 위로하는 굿이다.

 

 

둘레 길을 따라 숨을 헐떡이며 힘들게 올라간 서장대. 굳게 닫혀있는 청량당의 문을 바라보며 조금은 아쉽다. 물론 예전 자료야 갖고 있지만, 새로운 모습을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이회장군의 탱화를 모시고 있는 청량당은, 남한산성 내 일장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 서편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누명을 쓰고 참수당한 이회장군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자 장군을 시기하는 간신의 무리들의 모함에 빠졌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했다는 모함으로 인해, 서장대 앞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되었다.

 

 

이때 장군은 구차스런 변명을 하지 않고,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 만일 매가 오지 않으면 내 죄가 죽어 마땅하지만, 매가 날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단다. 그런데 정말로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하여서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으며, 청량당 안에 매 바위의 화분(탱화)을 그려서 보관하고 있다.

 

이회장군은 성의 축조를 완고히 하기 위해서, 처첩을 삼남지방으로 보내 축성 비용을 모금케도 하였다. 축성자금을 마련하여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장군의 비보를 들은 처첩은, 비분을 금치 못하고 송파 강 머리에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고 하여 당 안에 같이 모셔져 있다.

 

 

1920년도 자료에 보이는 매당왕신

 

1920년대에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남한산성 안에는 매당왕신(鷹堂王神)’이라는 도당이 있었으며, 이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참수를 당한 홍대감을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 위에 화주당을 세웠다고 했다. 또한 처인 산활부인은 그 비보를 듣고 뚝섬 교외 한강변의 저자도에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매가 날아왔다거나 성을 축조할 비용을 주색잡기로 탕진했다는 내용이 서로 일치하고 있어서, 매당왕신 도당이라는 것이 지금의 청량당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2002년도에 청량당을 들렸을 때, 당 안에는 이회장군과 남편의 참형소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순절한 송씨부인, 첩실인 유씨부인, 승병을 이끌고 남한산성 축성을 한 벽암대사의 화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속신인 백마신장과 오방신장, 이회장군의 당을 지키던 나씨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화분으로 모셨다는 대신할머니, 군웅, 별상 등의 화분도 함께 모셨다. 2002년 당시 조사를 할 때, 마을 주민들은 대감당(청량당을 마을 어르신들은 대감당이라고 불렀다)을 조성하고 그 앞에 향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이런 전해지는 이야기로 본다면, 청량당이 지어진 것은 벌써 400여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량당. 꽁꽁 닫힌 전각 안에서 이회장군은 답답함을 호소할 듯하다. 장군이 참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슬피 날아간 매처럼, 문을 열어 훨훨 날아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떨지.

가끔 거리를 걷다가 보면 재미난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예전 같으면 그거 그러려니 하고 지나치겠지만, 요즈음은 나이가 먹어서인지 모든 것이 다 반갑고 새롭기만 하다. 이런 나를 두고 아우 녀석은 “형님도 많이 늙었나보네요. 이제 얼마 보지 못할 것 같으니 그런 것이 다 새록새록 재미가 있는 것인가 봅니다.”란다.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3월 17일(토) 오전에 취재를 나갔다가 행궁길로 접어들었다. 행궁길에는 지난해부터 조성한 화분이 길에 놓여있다. 오늘 보니 그 화분에 심겨져 있던 나무들이 다 사라져버렸다. 아마도 계절이 봄이다 보니, 딴 꽃으로 갈아 심으려는 것인가 보다. 그런데 그 화분 두 개에 참 낯선 것들이 놓여있다.



이런 풍산개 두 마리가 천연덕스럽게 화분 안에 들어가 있다. 배를 깔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두 녀석. 풍산개인 행궁이(암, 3개월)와 풍산이(수, 3개월)이다. 이 녀석들 안에 넣어두었더니 스트레스를 받아서 저희들끼리 치고 받는다고. 그래서 화분 위에 올려놓았다는데, 이 녀석들 아무래도 저희가 개 꽃인줄로 알거나, 아니면 전생에 꽃이었거나.



이 두 녀석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녀도, 화분 안에서 나오려고 하질 않는다. 토요일 졸지에 행궁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인가가 좋아진 행궁이와 풍산이. 이 녀석들은 인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예전에, 아마 10여년은 되었을 것이다. 현재 수원 행궁 앞에서 매교동으로 내려가는 현재의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날만 저물면 술이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저 몸을 흔들면서 노상방뇨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런 행궁 길에 대한 기억이 영 가시지를 않았다.

12월 첫 날, 오후에 들려본 행궁 길. 예전에 모습은 단 한 곳도 찾을 수가 없다. 깨끗한 거리에는 커다란 화분위에 사철나무가 심겨져, 날이 추워졌는데도 불구하고 푸른색을 자랑하고 있다. 몇몇 집은 공사를 하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행궁 길, 이름에 걸맞아

행궁 길이라는 어둡고 우중충한 뒷골목이 변화를 한 것은 몇몇 사람에 의해서였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몇 사람 지나다니지 않는 뒷골목으로 들어 온 예술가들에 의해, 어둡고 침침하던 행궁 길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20여명의 예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이 거리를 살리기 위해 자비를 들여, 거리축제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아는 예인들을 끌어들여 함께 축제에 동참을 했고, 서서히 그 축제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와를 이용해 담장을 아름답게 꾸몄다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하루 종일 기다려보아도 사람을 볼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 날이 저물면 술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고요.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리축제를 시작하게 되었죠. 이 거리가 이렇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작년서부터 였나 봐요. 2~3년 전부터 도로를 파헤치는데 하나가 끝나면 또 파기 시작하고, 참 대책이 없었죠.”




그렇게 아름답게 변한 도로에 걸 맞는 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행궁 길에 입점한 예술인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체험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등을 개발하고 본격적인 거리축제를 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입점을 하기도 힘들어

“현재 이곳에는 공방이 15군데 정도 들어와 있어요. 이곳에 입점을 하려고 도자, 공예작가 등 5~6명이 대기를 하고 계신데 점포가 비질 않아요. 이렇게 길이 아름답게 변했으니 누가 이곳을 떠나려고 하겠어요?”

‘나녕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행궁 길 테마거리 예술인회 김난영 사무국장은, 이제는 들어오려는 예술인들이 있어도 자리가 없다고 귀띔을 한다.




행궁 길을 걷다보면 재미가 있다. 옛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집들이 있고, 가끔은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들도 보인다. 걷는 재미만으로도 쏠쏠한 행궁 길에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자리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행궁 길에서 ‘소담 국시방’이라는 잔치국수전문점이 보인다. 겉모양으로만 보아도 예사 국수집이 아니다. 알고 보니 주인 김영수씨는 칠보공예작가라고 한다. 이렇게 나름대로의 예술인들이 모여 자비를 들여 축제를 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거리를 조성하는데 가장 신경을 쓴 것은 바로 간판과 기와로 만든 외벽의 장식, 그리고 집 앞에 놓인 커다란 화분입니다. 이 화분에는 각자 이름이 적혀 있어요. 관리를 맡은 점주들이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으면, 바로 딴 것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그래서 각자 명패를 달고 있는 것이죠.”

행궁 길 조성에 심혈을 기울인 예술인회 박영환 회장(우)과 사무국장 김난영

염태영 수원시장의 그린정책에 동반하여, 수원을 더 알릴 수 있는 공예품을 생산하겠다는 아름다운 행궁 길 예술가들. 2011년 3월부터 시작한 거리축제는 이제 전국에서 사람들이 찾아들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래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팔달구청과 행궁동에서 많은 신경을 써주어 더 좋은 거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수원의 아름다운 행궁 길. 앞으로 이런 아름다운 길이 수원의 여러 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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