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지정된 천연기념물 중 가장 넓은 지역을 가진 것 중 한 곳은 바로 천연기념물 제171호인 설악산 천연보호구역(雪嶽山 天然保護區域)’일 것이다. 사실 천연기념물이라고는 하지만 광대한 지역의 자연보호 구역이기 때문에, 천연기념물인 아닌 보호구역으로 설정을 해놓았다.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에 걸쳐 넓게 펼쳐져 있다. ‘설악(雪岳)’이란 이름은 주봉인 해발 1708m의 대청봉이 1년 중 56개월 동안 눈에 덮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눈에 덮힌 큰 산이라는 뜻으로 삼산오악 중 오악에 한 곳이다.

 

 

화강암 암반으로 조성된 수려한 경관

 

설악산은 연평균 기온이 10를 넘지 않는 저온지대에 속하며, 연 강우량은 내설악이 1,000정도, 외설악이 1,300정도이다. 설악산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대규모의 화강암 관입과 더불어, 암질과 절리의 차이에 따른 차별침식의 결과로 보고 있다. 곳곳에 화강암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절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설악산은 사계절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절경을 이루고 있어, 각 지역마다 계절별 풍광이 다르다고 한다. 가장 많은 등산객들이 설악산을 선호하는 이유는 이런 아름다운 경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설악산이 가을 단풍이 들면 설악이 불이 붙었다.’고 할 정도로 아름답다. 눈산이라는 설악이 단풍까지 아름답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산의 다양성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동식물의 보고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설악산 천연보호구역 내의 식물은 약 1,013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신갈나무, 당단풍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등의 활엽수림과 소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등의 침엽수림이 섞여 숲을 이룬다. 그 밖에 금강배나무, 금강봄맞이, 금강소나무, 등대시호, 만리화, 눈설악주목, 설악아구장나무, 설악금강초롱, 솜다리 등 특산물 65, 눈측백 노랑만병초, 난쟁이붓꽃, 난사초, 한계령풀 등 희귀식물 56종이 보고되고 있다.

 

천연보호구역 내의 동물은 1,562종이 보고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반달가슴곰(천연기념물 제329), 사향노루(천연기념물 제216), 산양(천연기념물 제217), 수달(천연기념물 제330),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 황조롱이(천연기념물 제323-8), 붉은배새매(천연기념물 제323-2), 열목어(천연기념물 제73), 어름치(천연기념물 제259) 등은 별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 그대로 보존해야 할 설악산

 

천연기념물인 설악산 천연보호구역은 특별히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의 지질과 지형 및 동물과 식물 자원이 풍부하며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전통 사찰 등 많은 문화유산들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 중의 하나이므로, 설악산 전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서 그 산에 대한 고마움을 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산은 그저 경치나 구경하고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오르는 곳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적어도 산 전체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설악산의 경우는 신령하기까지 하다고 한다. 이 산에서 돌맹이 하나 풀 한 포기를 훼손하는 행위는 곧 천연기념물을 훼손하는 행위이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준다. 받은 만큼 우리가 돌려줄 것은 바로 자연 그대로의 보전이다.

이천시 관고동 401-2에 소재한 이천시 향토유적 제5호인 관고리 오층석탑’. 이천 도자기 축제장이 있는 설봉공원 안쪽, 관고리 저수지 안을 지나 토야랜드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탑의 형태나 규모로 보아서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되는 이 오층석탑은 훼손이 심해 거의 원형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 탑이 발견이 된 곳은 관고리 저수지 위편 밭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석재를, 1978년에 수습하여 옛 절터 앞에 복원을 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석재들이 흩어져 있던 곳을 절터라고는 하지만, 어떤 절이었으며 어느 시대에 창건된 것인지 등은 알 수가 없다. 또한 현재 이 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도, 원래의 탑이 있던 자리였는지도 알 수가 없다.

 

 

훼손이 심한 오층석탑

 

탑은 한 마디로 훼손이 너무 심해, 이 탑의 원형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다. 또한 밭에 흩어져 있던 석재들을 모아 쌓은 탑으로, 한 기의 탑의 석재인지도 불분명하다. 현재의 탑은 기단부와 일층 몸돌이 있고, 그 위에 지붕돌인 옥개석을 오층으로 쌓아올린 형태이다. 만일 이 오층석탑의 석재들이 한 기의 탑이었다고 하면, 상당히 장엄한 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탑들은 대개가 장엄하다. 그것은 옛 고토를 회복하려는 뜻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관고리 오층석탑의 경우에도 현재 몸돌이 사라진 채로 쌓아올린 높이만 보아도, 전체적인 규모를 파악할 수가 있다. 현재의 오층석탑은 탑의 상륜부는 존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아 훼손이 심하다.

 

고려 탑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

 

 

기단은 일석으로 조성된 지대석 위에 4매의 돌을 이용해 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기단의 덮개돌은 일석으로 조성을 했으며, 기단 덮개돌은 약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기단의 돌에는 양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덮개돌의 윗면에는 탑의 몸돌을 받을 수 있는 괴임부분을 층이나게 표현하고 있다.

 

몸돌은 1층만이 남아있는데 이것도 1층의 몸돌인가는 정확치가 않다. 몸돌 위에는 5층의 덮개동인 옥개석을 쌓아 올렸는데, 그 크기는 층에 따라 점차 줄어들고 있다. 층급은 1층의 덮개돌은 4단으로 표현하고 있고, 2층부터 5층까지의 층급은 각각 3단이다. 덮개돌의 높이는 1층서부터 150cm, 122cm, 100cm, 74cm, 70cm로 줄어들고 있다.

 

 

현재의 몸돌이 사라진 채 높이가 4.3m에 이르고 있는 점으로 보아, 원래의 이 관고리 오층석탑의 높이는 7~8m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넓고 평평한 편이다. 옥개석의 하면에 낙수 홈이 없는 것도 이 탑의 특징이다.

 

전체적인 규모에서 고려의 힘을 느끼다

 

44일 오후에 찾아간 관고동 오층석탑. 그저 하나의 조형물처럼 저수지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오층석탑은, 멀리서 보아도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졌고 상륜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이가 상당하다. 전체적인 규모로 따진다면 상당히 거대한 석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탑의 8m정도가 된다고 하면, 기단석이나 1층에 올려놓은 몸돌의 형태로 보아 비례가 잘 맞지는 않을 듯하다. 이런 탑의 형태는 대개 지방에 거주하는 장인에 의해 조성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많은 부분이 훼손이 되어있지만, 남아있는 모습만으로도 상당히 위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에 산재한 많은 고려의 석탑에게서 느끼는 강인함이, 관고리 오층석탑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탑을 장엄하게 조성을 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하나를 갖고도 느낄 수가 있는 옛 고려의 염원. 오늘 관고리에서 다시 한 번 그 기운을 받아간다.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인 화길옹주가 시집을 가서 살았다는 ‘궁집’을 돌아보고 난 뒤 앞 정원을 거닐다가 작은 석교(石橋) 하나를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코 지나쳤는데, 다리를 건너보니 작은 돌다리이기는 하지만 무엇인가 예사롭지가 않은 듯하다.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작은 돌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자라, 다시 다리로 가서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길이가 불과 2.5m 남짓인 이 돌다리가, 그냥 예삿다리가 아니라는 알았다.

 

 

 

하나의 돌로 조형한 돌다리

 

돌다리는 둥글게 위가 불룩하니 구름다리 형으로 조성을 하였다. 양편 다리 끝에는 각각 한 마리씩의 해태가 앉아있어, 사방에 해태를 조성하였다. 그리고 다리는 턱이지게 올려졌다. 다리의 옆부분에는 길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바닥을 놓고, 그 밑으로는 원형의 꽃문양을 세긴 버팀목을 질렀다.

 

그런데 이 다이가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보아도 틈새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갖은 조형물을 조성하기는 했지만, 어디 한 곳도 틈을 발견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단단한 화강암을 갖고 참 정교하게 조형을 하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정교하다고 해도, 어디 한 곳이라도 빈틈은 있게 마련이다.

 

 

 

놀아운 조상들의 석재 다루는 솜씨

 

돌다리를 살펴본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놀라울 수가. 이 돌다리는 커다란 화강석 한 장을 이용해 조성을 한 것이다. 조형물을 갖다가 붙인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커다란 돌을 이용해 다리를 만들었다. 어떻게 이 작지 않은 돌다리를 한 장의 석재로 만들 수가 있었을까? 조상님들의 돌을 다루는 솜씨가 그저 놀랍기만 하다.

 

하긴 선조들의 솜씨에 감탄한 것이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깎아지른 절벽에 돋을새김을 한 마애불을 보고 있노라, 서산에 해가 지는 것도 모른 적도 있었다. 부도탑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보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비에 새겨진 받침의 용두와 머릿돌의 꿈틀거리는 용을 보고, 흠칫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한 뛰어난 석재를 다루는 선조들이었다. 새삼 주변을 돌아본다. 여기저기 널린 석재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은 내 위에 걸린 이 돌다리는 그것들 중에서도 눈에 띤다. 단 한 장의 석재를 깎아내어, 이런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지금처럼 장비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망치에 정 하나만을 갖고 이 작품을 완성했을 것이다. 이 돌다리 하나가 7월 17일 뙤약볕 아래서 구슬땀을 흘리고 답사를 한 나에게, 선조들의 배려인 듯해 고맙기만 하다. 물론 나만의 생각이겠지만.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나와 안동 쪽으로 가는 큰길을 벗어나, 마을 안으로 난 작은 길로 접어들면 우측에 우뚝 선 전탑이 보인다.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이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소재한 이 전탑은 통일신라 때의 작품이다.

 

조탑리 전탑은 안동 동부동의 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축조가 되었다. 탑은 흙으로 쌓은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몸돌을 만들었다. 탑의 높이는 8,65m이고, 기단의 너비는 7m이다. 남면에는 감실을 내었고, 감실 양 편에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다. 인왕상은 아직도 힘이 넘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각 기법이 뛰어나다. 천년 세월을 이 인왕상이 전탑을 지킨 것인지도 모른다.

 

돌과 벽돌로 쌓은 희귀한 전탑

 

1층 지붕돌부터는 한 변이 27cm에 두께가 5,5cm가 되는 벽돌을 사용하여, 어긋나게 쌓아올렸다. 몸돌은 1층의 높이에 비해,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든다. 탑의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으나, 보존 상태는 깨끗하다. 다만 조선시대에 수리를 거치고, 1917년 이후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는 동안, 원형을 많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전탑들은 일반 석탑에 비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은 공을 들였을 것 같다. 국보 제16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안동 신세동 칠층 전탑을 보더라도, 그 탑을 세우기 위한 공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밭 가운데 쓸쓸하게 서 있는 이 전탑을 보면서 우리의 문화재들이 참 수난을 많이 당했음을 느낀다.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주변에 똑 같은 크기의 고무 통에 연꽃을 수도 없이 심어놓았다. 커다란 불심이라도 작용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쓸쓸히 서 있는 보물인 탑이 너무 한적해 보였기 때문인가.

 

 

 

뛰어난 전돌 쌓기로 조성한 탑

 

이 조탑리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으로, 화강암 석재와 벽돌을 혼용해서 만든 특이한 탑이다. 1층의 몸돌은 화강암을 이용했으며, 위로는 전돌을 사용한 탑이다. 우리나라 전탑에는 거의 모두 화강암을 혼용하고 있으나, 이 전탑에서는 그러한 의도가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나 있다.

 

기단은 흙을 다져 마련하고 그 위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화강석으로 6~7단을 쌓아 1층 몸돌을 이루게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벽돌로 쌓았는데 세울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문양이 있는 벽돌이 남아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2층과 4층 몸돌 남쪽 면에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안동에 있는 다른 전탑과는 달리 기와가 없다. 한 마디로 조탑리 5층 전탑은 일반적인 전탑의 형태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조성을 해 눈길을 끈다.

 

아무리 열변을 토하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문화재를 사랑하고 보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우리 문화재 역시 남다른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온전히 보존할 수가 없다. 안동 조탑리 오층 전탑 주변에 놓인 고무 통 속에 연꽃이 만개를 할 때 다시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문화재답사를 하다가 보면 정말로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천년이 훨씬 지난 세월을 그렇게 버티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서. 경남 거창군 거창읍 양평동에 가면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조여래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조각을 한 솜씨도 뛰어나려니와, 아직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잘 지켜내고 있기 때문이다.

거창읍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는 곳은 예전에 노혜사 또는 금양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석불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조각이나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보물 제377호로 지정된 이 석조여래입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뛰어난 석조불상의 조형미를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히다.

거창군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 길을 나선 1211일은, 아침부터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씨였다. 그래도 바쁘게 움직이다가 보면 추운 줄을 모른다. 답사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것은, 깊은 겨울이 되었을 때 눈길을 돌아보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길이 얼고 눈보라가 치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돌아볼 심산에서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은 그 앞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 편하게 답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주차를 시키고 안으로 들어가니, 전체높이 3.7m, 불상 높이 2.7m 의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머리 위에 올려놓은 갓인 천개는, 근간에 올려 진 것이라고 한다. 아마 석불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방지하기 위함인 듯하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을 처음으로 만나는 순간 숨이 막힌다. 그 조각을 한 솜씨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많은 석불들과는 사뭇 다르다. 화강암으로 조성이 된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예술의 뛰어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조각수법에 감탄을 금치 못하다.

머리에 비해 몸은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늘씬한 체격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전체적인 신체의 비례가 알맞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둥근 얼굴에 반듯한 이목구비. 반쯤 뜬 듯한 눈과 입가에 엷은 미소는, 살아있는 부처의 자비를 보는 것만 같다. 찬 돌을 깎아 조형을 하면서, 어찌 이렇게 섬세한 모습을 표현 할 수 있었을까?

목에는 삼도를 새겨 넣었고 넓지 않은 어깨에는 대의를 걸쳐 입었다. 대의 아래에 치마모양으로 길게 표현된 군의는 주름살 하나부터 접힌 부분까지 세세하게 표현을 하였다. 금방이라도 초겨울 찬바람에 대의 자락이 나부낄 것만 같은 형상이다.

더구나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대의자락을 살짝 잡고 있는 모습은 어떠한가. 왼손은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법의자락을 잡고 남은 손가락은 곧게 폈는데, 그 형상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손가락 하나까지도 따듯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하다. 군의자락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듯한 발은 뭉툭한 느낌이다. 어찌 이런 모습을 그 시대에 정 하나만을 갖고 표현을 할 수가 있었을까?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려 옷깃을 살짝 잡과, 왼손은 아래로 내려 집게손가락으로 법의 자락을 자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놀라운 예술작품

석조여래입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는 둥글게 조성을 했는데, 약간은 투박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불상과는 달리 조금은 투박한 모습이, 오히려 석조여래입상을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효과를 갖고 있다. 위를 이층으로 둥글게 깎아 그 위에 석불을 새우고, 아래는 돌아가면서 연꽃잎을 크게 새겨 넣었다.

양평동 석조여래입상 주변을 돌면서 사진촬영을 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앞으로 돌아가 손을 모아 합장을 한다. 세상 모든 시름을 사라지게 해달라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천년 넘는 세월을 이렇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문화재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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