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사 일주문을 지나 원통보전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보면 돌로 만든 문이 나온다. 이 문은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이다. 이 홍예문은 전각이 없이 세웠던  것을, 1963년도에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전각을 세워 아름다움을 더했다.

이 문루는 주변 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홍예석 주위에 자연석을 쌓아서 특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조가 조성할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수령이 석재를 하나씩 내어 26개의 화강석으로 홍예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석재는 화강암 장대석으로 꾸며졌으며, 2단의 기대석을 놓고 그 위에 두 줄로 조성을 하였다.


아픔을 간직한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의 홍예문은 2005년 양양지역에 난 산불로 인해서 홍예문 위에 세운 누각이 소실이 되었다. 화마는 낙산사 일대를 뒤덮어 홍예문은 물론, 원통보전과 종각 등을 모두 한줌 재로 만들어버렸다. 당시 TV를 통해 불이타는 낙산사를 보면서, 마음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만큼 낙산사는 동해를 바라보며 선 해수관음을 비롯하여 아름답게 자리잡은 절이었다.

이번 양양답사를 하면서 일부러 낙산사를 일정에 집어 넣었다. 숙소도 해돋이도 볼 겸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잡았으나, 정작 아침에 구름이 가득 낀 흐린 날씨 탓에 해돋이는 보질 못하고 낙산사로 향했다. 일주문을 들어서는 길에 늘어선 노송숲을 보면서, 더 마음이 아픈 낙산사의 정경이다. 저렇게 울창하던 해송 숲이 거의 다 타버렸기 때문이다.



홍예문은 26개 고을에서 가져 온 26개의 장대석을 두 줄로 쌓아 올렸다.

다시 조성된 홍예문,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

일주문을 지나 차를 놓고, 조금 걸어올라가니 홍예문이 보인다. 현재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홍예문이다. 새롭게 조성을 한 홍예문은 마치 새단장을 한 신부처럼 말끔하게 보인다. 천천히 걸어 홍예문 앞으로 다가서니, 문 위에 올린 누각이 보인다. 예전에는 문루 주변을 강돌로 조형을 하였던 것을, 불이 난 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산돌로 꾸몄다고 한다.

문루는 처음과 같은 형태로 조성을 하였다. 문루 앙편에 용의 머리가 돌출이 되어 위엄을 보인다. 홍예문은 두 단의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두 줄로 나란히 올렸다. 장대석을 다듬은 것도 일정한 규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만든 홍예문은 숱한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그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는 한다. 아픔이 있어 더 아름다워 보이는 낙산사 홍예문. 


문루는 2005년에 난 산불로 인해 소실이 되었던 것을 다시 복구하였다.

사람들은 그 아픔을 알고 있기에 문을 들어서면서 멈칫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런 아름다운 문화재들이 수도없이 소실 된 재난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역사의 아픔속에서 그래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낙산사의 홍예문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인 듯하다. 

전북 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 남원시 산곡동 16-1에 소재한 이 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의 천연적인 지형지세를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으로 그 둘레는 3,120m이다. 9월 18일 한 낮의 날씨는 아직도 무덥다. 남원으로 들어가 교룡산성을 오르는 길은, 그리 가파르지만 않지만 그래도 꽤나 시간이 걸리는 거리이다. 성은 보이지를 않는데 숨이 차고 땀은 비오 듯 흐른다.

산성 앞으로 가니 성 안에서 무슨 공사를 하는지, 성벽이 터진 곳으로 차들이 드나든다. 차를 왕래하게 하느라, 물길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공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저렇게 아름다운 물길을 막아 찻길을 내 놓은 것이 아쉽다. 교룡산성은 언제 축성이 되었는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다만 성을 쌓은 방식이나 입지의 형태로 보아 백제 때의 성으로 보인다.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남아있어

현재는 산성의 동문인 홍예문과,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옹성이 남아있다. 그리고 동문의 양 편으로 길게 복원을 한 성곽이 보인다. 군데군데 아직 성벽이 남아있다는 교룡산성. 신라와의 전쟁을 대비해 쌓았다는 이 산성은,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무대인 광한루원과, 매월당 김시습의 단편소설인『만복사저포기』의 무대인 만복사지가 남아있는 곳이다. 그만큼 역사 속에서 정치, 군사, 문화의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교룡산성 안에는 우물 99개와 계곡이 있어, 산성 주변의 주민들이 유사시에 대피나 전투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좋았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아직도 성 안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군기터 등 당시의 흔적이 보인다.




주변 성곽 중에서 가장 보존상태가 양호해

남원에는 주변지역을 합해 20여 개의 산성이 있던 곳이다. 그만큼 군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기도 했다. 그 중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룡산성이다. 고려 말에는 이성계가 퇴각하는 왜구를 맞아 싸웠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승병장 처영이 성을 수축하였다고 한다. 성안에는 무기고를 비롯해 별장청, 장대, 염고, 산창 등의 시설이 있었다. 전쟁에 대비해 정유재란 시에는 남원도호부 관내인 운봉, 장수, 임실, 구례, 곡성, 담양, 옥과 등의 양곡을 거두어 교룡산성에 보관하였는데, 각 지역의 곡식을 저장하는 곡성창, 구례창 등의 곡식창고가 있었다.



홍예문 안에 줄지어 선 비(위) 홍예문 안에서 밖을 보면 옹성이 드러 쌓고 있다(가운데) 홍예문 위에서 본 옹성 

홍예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홍예문 아래편에는 문틀을 달았던 흔적이 보인다. 움푹 파인 돌에는 물이 고여 있어, 흔적 없이 사라진 당시의 영화를 아쉬워한다. 높이 4.5m의 성벽은 단단하게 축성이 되었으며, 축성 당시에는 치첩 1,016개소에 달했다고 하니, 교룡산성의 축성이 대단했음을 알 수가 있다.

홍예문 안쪽으로는 줄지어선 공덕비 등이 보인다. 홍예문의 위로 올라서니 비탈길에 조성한 옹성이 단단해 보인다. 성문을 공격하려면 그 옹성 위에서 쏟아지는 불과 기름, 돌 등을 피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을 것 같다. 동문 옆으로는 산 정상부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빠져나가고 있다. 아마 저곳에 수문이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교룡산성 안에는 물이 풍부했다는 것을 일 수 있다.



백제 때 축성한 교룡산성. 성곽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을 밟으며 걸어본다. 발아래 밟히는 풀들이 소리를 낸다. 백제 때에 처음으로 축성을 하여, 그동안 얼마나 많은 전쟁의 회오리를 거쳤을까? 아마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도 이렇게 성곽을 밟으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느라 밤잠을 설치지는 않았을까? 성 안에 자리한 초옥에서 낯선 사람을 경계하는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다. 그렇게 9월 중순 땀을 흘리며 찾아간 교룡산성은,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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