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과음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이 아니라 거의 날마다 과음을 하는 수준이긴 하지만요. 술은 한 가지만 먹으라고 하는데, 영 그것이 마음대로 안되네요.

 

수원시청 화장실에 기면 이런 문구가 붙어 있습니다. '119운동' 이라고요

 

119운동이 무엇인고 하면, 술은 한 가지만 마시며 1차로 끝내고 오후 9시 이전에 집에 들어가자는 운동이랍니다. 말은 참 좋습니다. 하지만 술을 마시다가 보면 그것이 마음대로 되질 않으니 문제죠. 다음 날 아침이면 술이 잘 안깹니다. 정신도 맑지 않고요. 그럴 때 제가 잘 먹는 것이 바로 '속풀이 황태 해장국' 입니다.

 

 

우선은 번거롭지 않아 좋습니다. 집에 늘 떨어지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이용하면 되니까요. 술 자주 마시는 분, 그리고 해장국 끓여주실 분이 안 계신분은 이렇게 해주면 엄청 편합니다. 우선 파는 잘 씻어서 잘게 써러 냉동실에 보관하면 필요할 때 꺼내서 사용하시면 됩니다.

 

그리도 마늘은 찧어서 냉장실에 보관을 합니다. 저는 간을 소금으로 맟우지 않고 새우젓으로 간을 마춥니다. 국물이 시원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날달걀 한개에 황태 포만 있으면 됩니다. 머 복잡할 것도 없습니다. 이것 다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죠. 음식 한다고 요란 떨 것도 없습니다. 10분이면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속풀이 왕태 해장국'이 완성 되니까요.

 

 

인생이란 것이 참 묘합니다. 술은 1차에서 끝내는 것이 바람직한데, 참 그게 마음대로 되질 않네요. 그래서 '술이 사람을 먹는다' 라는 말이 생겼나 봅니다. 어제는 정말 1차에서 끝내려고 했는데, 낮술이 거의 깨가는데 누가 전화를 해서 또 나갔습니다. 술 마시러요

 

아침이 되면 속은 괜찮은데 머리가 조금 휑합니다. 술이 아직 깨지 않았다는 것이죠. 무엇인가 빨리 해결을 하고 일을 보아야 하는데, 이럴 때 황태해장국이 제격입니다. 빨리 해서 먹을 수 있고, 머리 맑아지고 말이죠.

 

 

남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술 취하는 것이 싫으면 안 마시면 되지'라고 말이죠.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좋은 사람들과 술 한 잔 못 마신다고 하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여우같은 여자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토끼같은 자식이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런 나를 그래도 심심찮게 해 주겠다고 술 자리로 초대를 하는데 안 가겠습니까?

 

암튼 그렇게 있는 것 집어 넣고 끓이다가 팔팔 끓을 때 새우젓으로 간을 마칩니다. 그리고 계란 하나 깨서 집어넣고 잘 저어주면 위와 같이 먹음직한 '속풀이 황태 해장국' 이 됩니다. 만들기 참 쉽죠? 맞습니다. 한 그릇에 찬 밥 말아 먹고 트름 한 번하면 속 풀립니다. 이제 또 취재히러 가여죠.  

 

어디 여행이라도 떠날라치면, 제일 문제가 바로 먹거리이다. 20년 넘게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다가 보면, 정말이지 입에 맞는 음식 한 그릇을 먹는다는 것이 그렇게 행복일 수가 없다. 그래서인가 이젠 어느 곳에 가든지, 나만이 좋아하는 음식점 몇 곳을 찾아놓았다. 그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니 말이다.

 

수원은 참 착한 먹거리가 많은 곳이다. 사람들은 수원에 오면 여기저기 착한 가격에 맛 좋은 음식점을 찾아다닌다. 요즈음에는 인터넷 검색으로 맛집을 검색해서 찾아오기 때문에, 일부러 홍보를 하지 않아도 나름 유명세를 타기도 한다. 요즈음 수원 화성 일대의 식당 중에서는 호황을 누리고 있는 집들이 있다. 바로 12일의 덕분이기도 하다.

 

지난해 팸투어에 참가한 캔디(최명희)님 사진

 

수원 왕갈비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화성 행궁 앞에 있는 맛이 있다는 집을 찾아가면, 토요일은 거의 자리가 없다. 그만큼 검색으로 인한 외지인들이 찾아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젊은 사람들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던 선술집에, 요즈음은 심심찮게 젊은이들이 찾아든다고 한다. 바로 인터넷 검색으로 찾았다는 대답이다. 맛있고 값싼 맛집, 여행객들에게 이보다 좋은 집이 어디 있을까?

 

수원은 먹거리 중 대표적인 것은 그 유명한 수원왕갈비이다. 수원의 왕갈비가 유명한 것은 전국 3대 우시장 중 한 곳이 바로 수원우시장이었다. 한 해에 거래량만 2만두가 넘었다고 하니, 얼마나 활발한 매매가 이루어진 것일까? 수원에 이렇게 우시장이 호황을 누린 것은 정조대왕의 새정치 육성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정조대왕은 화성을 축성한 후, 화성을 자립기반을 둔 도시로 육성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우선은 만석거와 축만제 등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둔전(屯田)을 실시한 것이다. 그리고 농사를 잘 짓게 하기 위해 종자와 소를 나누어 주었다. 종자를 이용해 농사를 지으면 가을에 수확을 할 때 그 절반을 거두어들이고, 소는 잘 키워 새끼를 낳으면 새끼를 거두어 가고 어미를 소유하게 하였다.

 

 

이런 정책으로 인해 소가 점점 불어나게 되고, 그것을 팔기 위한 장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질 좋은 한우가 우시장에 넘쳐나다 보니, 자연적으로 소를 이용한 음식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수원갈비1940년대 팔달문 밖 장터인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순제과를 경영하던 이귀성씨가 처음으로 화춘옥이란 상호로 해장국을 팔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화춘옥이 처음부터 갈비를 한 것은 아니다. 고기를 듬뿍 넣어주는 해장국을 팔다가 보니, 많이 팔아도 남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양념갈비였다. 양념을 해서 숯불에 구워내는 갈비의 맛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면 수원에 왕갈비만 있을까?

 

재래시장, 골목마다 넘쳐나는 많은 먹거리

 

남수교에서 매향교를 향해 수원천변을 따라 늘어선 통닭집들, 이 통닭골목에 들어서면 기름 냄새를 풍기는 통닭집 앞에,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수원의 통닭거리는 이제 전국적으로 명소가 되다시피 했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다렸다가도 이곳의 통닭 한 마리를 먹고 가려고 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수원에는 그저 어딜 가나 나름대로의 특별한 먹거리가 있다. 그리고 그 먹거리들이 모두 착한가격이라는 것이다. 지동시장의 순대타운 안으로 들어가면 자리가 없을 때가 많다. 권선시장 족발골목의 족발과 순대국도 꽤 명성을 얻고 있다. 거북시장의 30년 전통의 해장국 또한 빠지지 않는다. 행궁 건너편의 우거지해장국도 있다. 곳곳의 전통시장마다 나름대로의 유명세를 타고 있는 맛집들이 포진하고 있다.

 

먹거리 문화의 메카 수원

 

수원 지동, 미나리광, 못골 시장에는 젊은이들과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집들이 있다. 바로 수소문을 해서 찾아오는 집들이다. 장날 만두의 만두는 6개들이 한 팩에 3,000원이다. 웬만한 사람은 6개만 먹으면 배가 불러 못 먹는다. 거기다가 호떡도 있다. 1,000원에 세 개를 준다. 줄을 서야 먹을 수가 있다.

 

어디 그것뿐인가? 못골시장 안으로 들어가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 먹거리이다.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집들이 여기저기 발길을 붙든다. 2,500원짜리 잔치국수, 3,500짜리 칼국수, 거기다가 진열을 하면 불티나게 팔리나가는 족발이며, 튀김 등도 한몫을 거든다. 가히 먹거리 문화의 메카라 불릴 만 하지 않은가?

 

 

저희는 사실 문을 연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홍보도 하지 않았는데 12일이 끝난 다음, 전국에서 손님들이 찾아와요. 인터넷 검색을 했다고요. 매출이 그 전보다 상당히 올랐어요. 모두 12일 덕분이죠.”

 

행궁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아무개씨는, 요즘처럼 장사가 잘되면 살맛난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다가 보니, 재료가 일찍 떨어져 곤욕을 치루기도 한다는 것이다. 주말이면 찾는 사람은 많은데 준비한 재료가 바닥이 나, 일찍 문을 닫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봄날이다. 수원을 찾아 세계문화유산인 화성을 돌아보고, 세계에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 문화공원인 해우재를 돌아보자. 그리고 곳곳에 자리를 한 먹거리에 행복함을 느껴보자. 이 봄철에 이것보다 더한 힐링이 어디 있겠는가?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에 위치한 각연사의 주위로는 보배산, 칠보산 등이 둘러쌓고 있다. 각연사의 일주문에는 '보배산 각연사'라고 적혀있다. 신라 법흥왕 때인 515년에 유일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각연사는, 그 역사가 1500년이나 되는 고찰이다. 그만한 절이 이 곳 산중에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각연사는 어떤 모습일까?

괴강삼거리에서 올갱이 해장국 한 그릇으로 점심을 때우고, 각연사로 행했다. 도로에서 각연사로 향해 마을길로 접어들자 좁은 도로가 이어진다. 눈은 치웠다고 하나, 여기저기 얼음이 얼어 미끄럽다, 거기다가 앞에서 차가 나오는 바람에 100여m를 후진을 해야만 했다.


절을 찾을 때도, 뒤로 할 때도 몇 번이고 후진을 해야 하는 길. 중간 중간 차가 비켜설 수 있도록 길을 내주면 좋으련만. 이 산중에 있는 고찰을 겨울에 가족들과 함께 찾는 사람들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자칫 초보운전이라도 되는 날은 그냥 울고 싶을 것이다.

까마귀와 연못에 얽힌 전설

각연사에는 전설이 전한다, 어느 절이나 그러하지만, 천년 넘는 고찰에는 그럴듯한 전설 한 가지는 전하기 마련이다. '각연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이러한 전설과 연결이 된다.


각연사 일주문과 경내에 있는 석물.좌대인 듯하다. 각연사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유일대사가 절을 짓고자 지금의 칠성면 쌍곡리에 있는 절골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절을 짓고 있는 곳으로 까마귀 떼들이 날아들었다. 이 까마귀 떼는 절을 짓는 현장에 있는 나무토막과 대패 밥 등을 들고 어디론가 날아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는 기이한 까마귀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어느 날 까마귀 떼를 쫒아갔다. 그랬더니 현재 각연사의 자리에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물 위에 나뭇가지와 대배 밥이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유일대사가 연못 안을 들여다보니 석불이 있고, 그곳에서 광채가 일었다.

유일대사는 깨달음을 얻어 연못을 메우고, 그곳에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의 이름을 '각연(覺淵)'이라 하였단다. 지금 각연사의 비로전이 선 자리가 바로 그 연못이 있던 저리이고, 비로전 안에 모신 보물 제433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연못 속에 있던 석불이라는 것이다.」


대웅전과 돌계단. 장대석에서 각연사가 고찰임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신라 제23대 법흥왕은 재위기간이 514년~540년이다. 이 석조비로나자불 좌상이 신라말기의 작품이라면 년대 차이가 많이 난다. 하지만 전설이란 전해지면서 조금씩 변화하는 것이니 무슨 상관이랴. 이 비로전과 각연사라는 절의 명칭이 그런 연유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설화 삼아 알 수 있다면, 그 또한 귀가 솔깃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는지.

뛰어난 경계에 자리한 각연사

각연사를 들어가는 길은 4km나 된다. 좁은 길이 계곡을 끼고, 숲이 우거진 길을 올라간다. 말은 오른다고 하지만, 평지나 다름없다. 걸어서가도 30 ~ 40분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거리이다. 봄철에는 주변 산을 아름답게 수놓는 봄꽃의 향에 취해 걸어볼 만한 길이다. 아니, 이 길은 걸어야 각연사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을 듯하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신 비로전과 비로전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덤벙주초


일주문을 지나 10여분을 걸어 경내로 들어선다. 중앙에 낮은 구릉을 뒤로하고 대웅전이 자리한다. 대웅전은 충북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정면 세 칸, 축면 두 칸의 다포식 맞배집이다.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 혹은, 고려 초의 통일대사가 지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짜임새 있는 건물이다.

상량문에 의하면 그동안 각연사의 대웅전은 몇 차례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융경 년간(1567~1572), 순치 년간(1644~1661), 강희 년간(1662~1722)에 보수를 하였고, 영조 44년인 1768년에 중건을 하였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서는 1979년에 보수를 하였다.

보물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비로전

각연사라는 명칭을 갖게 했다는 비로전. 전설에 의하면 이 비로전이 있는 곳이 연못이었다는 것이다. 비로전은 현재 충북 유형문화재 제125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지어진 이 비로전은, 인조 26년인 1648년, 효종 6년인 1655년, 광무 3년인 1899년, 그리고 1926년에 중수하였다.

초석은 신라 때 사용하던 자연석 위에 원형으로 깎아 도드라진 위로 배흘림기둥을 세웠다. 이 비로전 안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모시고 있는데, 그 뛰어난 조각 솜씨에 압도당한다. 앞에가 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듯하다.

각연사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두 가지 문화재인 보물 제1370호 각연사 통일대사 부도와, 보물 제1295호인 통일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으나, 아직은 길이 녹지를 않아 다음으로 미루었다. 경내를 돌아보면 기단을 쌓은 장대석이나 주추 등이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적당히 자리를 잡은 전각들이 화려하지는 않으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꽃이 피는 봄에 다시 한 번 각연사를 찾아보리라 마음을 먹고, 보개산을 뒤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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