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최승일이 그려내는 작가의 속마음

 

“사람이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노력을 하는 사람은 성공을 합니다. 하지만 노력보다 더 자기의 성취도를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일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즐길 줄 아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7월 8일(목) 오후, 비가 뿌리는 날 수원시 팔달구 남창동 131-2에 소재한 임 아트갤러리에서 전시 개막준비를 하고 있는 회화작가 최승일이 한 말이다. 7월 8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최승일전은 개막을 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길을 끈다. 비가 오는 날 개막이라니 사람들이 찾아올까 걱정을 하지만, 정작 작가는 그러 것에는 걱정이 없다는 말투이다.

 

 

“제 작품은 볼트와 전구입니다”

 

갤러리 벽에 걸린 작품들. 작품을 일일이 짚어가면서 설명을 하지만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미술에는 워낙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작업은 예술가에게 있어서 자아실현의 통로이며,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키려는 또 다른 삶의 표현방식이라고 생각 됩니다. 판화라는 간접적인 매체가 지니고 있는 함축적인 표현과 독특한 재질감, 그로 인한 절제된 형상 등은 일상의 다양한 요소들을 형상화하고 이를 통하여 작가의 행위가 간접적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작가 최승일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그림을 그려오면서 자신만의 내명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으로 다작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그림을 손에서 떼어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새벽 시간과 낮 시간을 이용해 주로 작업을 하죠. 저는 작업을 매체의 이미지를 통하여 표면이 아닌 내면에 잠재된 조형적 언어를 표출하고 싶습니다. 하기에 남들은 제 그림을 보고 볼트와 전구라고도 표현을 합니다. 볼트란 조이기도 하지만 풀기도 하죠.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는 물질입니다. 즉 제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바로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싶은 갈망입니다”

 

1년에 세 차례의 개인전을 열기도

 

현재는 수원시 팔달구 교동 등 세 곳에서 ‘호우와 자명’이라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 최승일도 한 때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단다.

 

 

“졸업을 하고나서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죠. 그 때는 정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2004년에는 한 해에 개인전을 3회나 열기도 했습니다. 쉴 새 없이 그림을 그린 것이죠. 남들은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그림을 그리면서 나 스스로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렇게 그림을 열심히 그리는 것은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노력을 한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라고 한다. 외국을 다니면서 만나는 선배나 동료, 혹은 후배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단다.

 

“외국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다가 보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침부터 포트폴리오를 작성해 갤러리마다 찾아다니면서 스스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먹고 놀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감성이 예민해 자신만 노력을 하면 얼마든지 외국에서도 성공을 할 수 있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결국 그런 것들이 작품 활동을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것.

 

 

해외에도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작가

 

“저는 일상적인 재료에서 찾아낸 어떠한 특성이 또 다른 공간에서도 나타나는 표현 행위 속에서 스스로 창조되는 환경을 설정하여, 이러한 가변적 재료들은 그 무엇을 초월하면서도 모든 것에 공통되고 모든 것과 연결된 어떤 무엇에 접하고 있다는 일종의 암시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1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런데 그 10회의 개인전 중 9회가 일 년에 세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4년 3회, 2010년 3회, 2011년 3회이다. 그 중 세 번의 개인전은 해외에서 갖기도 했다. 작가 최승일은 국내보다는 주로 국제전에 더 많은 작품을 냈다. 1995년 동경미술관 임팩트 비엔날레, 2010년 Art by Geneve 2010 아트페어(팔렉스포 제네바), Art Asia 마이애미 국제 아트페어(마이애미, 미국) 등 10여 차례 국제전을 가졌다.

 

 

최승일 작가의 그림은 해외에도 소장이 되어있다. AD갤러리(프랑스 리옹), 스위스 국립의료재단 등 해외에서도 그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나혜석 여성미술대전 심사위원이면서 한국미협, 수원미협 회원으로도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최승일. 14일(일)까지 임 아트갤러리를 찾아가면, 또 다른 작가의 속마음을 만날 수가 있다.

나혜석, 참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이름이다. 도대체 나혜석이란 여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 실체를 안다는 것은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지 못한 사람은 힘든 일이다. 혹여 글 하나로 인해 지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2월 26일,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고 한다. 영하 10도를 조금 밑돈다고 하지만, 체감온도는 그보다 더 추은 듯하다. 수원박물관에서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 까지 열린다는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를 보기 위해서이다. 개막식을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지만,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조용히 나혜석을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수원박물관 특별기획 전시 '나는 나혜석이다'의 입구


수원출신의 여성해방론자 나혜석

나혜석을 바라보는 시각은 두 가지이다. 혹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유화가요 문학가이며, 민족운동가에 여성해방론자’ 라는 긴 수식어로 표현을 한다. 하지만 그와 상반되는 견해도 없지는 않다. 혹자는 나혜석을 ‘현대를 살아가는 개방적인 여성이라는 것에는 찬성을 하지만, 결코 미화될 수 없는 난해함’을 지닌 여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이번 특별전은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을 하였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제목이 말해주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잘못된 나혜석에 대한 사고를 바꾸어 놓기 위한 자리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수원에서 태어났다'의 나혜석의 학창시절, 학교에서 사용했던 양금과 아코디언, 그리고 가계도


‘여자도 사람이다’

나혜석이 추구한 것은 시집살이라는 올무에 갇혀 음지에서 살아가는 여성이 아닌, 세상 밖으로 나와 남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살아가는 그런 여성을 추구했다. 인간으로, 그것도 당당한 여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 것이다. 남자들도 하기 어려운 세계여행을 1927~8년에 했다는 것은, 나혜석이 얼마나 신문물에 목말라 했는지 가늠이 간다.

결국 그러한 세계여행이나 그녀가 쓴 글들에서 치열하게 남들보다 앞장서서 세상을 살았던 나혜석이,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혜석이다” 이 전시회에서 우리가 나혜석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단지 사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좀 더 진취적이고 불꽃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혜석은 문학가이기도 했다. 많은 책들에 실린 니혜석의 글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


나혜석은 유화를 그리기 전 삽화작업도 했다. 아래는 나혜석의 유화가 소개된 책들


전시실에는 나혜석이라는 존재를 알기에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많은 글과 그림 등을 통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 속에 녹아있는 수많은 꿈과 이상을 만날 수가 있다.

「조선 남자들은 참 이상합니다. 자신들은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자신의 부인에게는 정조 지키기를 강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나혜석의 이혼고백장, 1934년 삼천리)」

이 한 구절의 이야기가 어쩌면 나혜석이라는 여인이, 조선의 남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여성들을 자신들의 아래에 두고 비하시키는 그러한 사회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온 나혜석. 그녀는 오늘 “나는 나혜석이다.”라고 절규를 하고 있다. 1896년 수원 신풍동에서 태어나, 40세 때인 1935년 다시 수원으로 돌아 온 나혜석은 1937년 수덕사, 다솔사, 해인사 등으로 돌아다녔다.


나혜석이 그린 유화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기도 한 나혜석의 흔적


10여 년 동안 절집을 돌아다니면서 나혜석은 세상에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1948년 53세의 나이로 서울 시립 자재원에서 세상을 떠난 나혜석은, 아직도 세상에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하다. 수원박물관 학예팀의 이동근의 말이다.

“나혜석에 대한 자료는 많지가 않습니다. 그 자료도 모두 뿔뿔이 흩어진 것을, 할 수 있는 만큼 모았습니다. 오늘 이 자료가 나혜석이라는 한 여성을 재조명하기에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최린(위),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 나혜석은 아픔을 당하고, 사회에서 나혜석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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