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9월 한 달 동안 수원시 팔달구 행궁동 일원에서 열렸던 생태교통 수원2013’. '생태교통 수원 2013'으로 명명된 생태교통 시범사업은 CLEI(자치단체 국제환경협의회) 및 유엔 HABITAT(인간주거계획) 등과 함께 한 달 동안 행궁동 일원에서 주민들이 자가용 이용을 자제하고, 자전거 등 무동력, 친환경 동력수단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생활하는 과정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난 해 생태교통 기간 중 1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행궁동을 방문했으며, 그들은 자동차가 없이도 인간이 생존하는 방법을 배워가면서 즐거워했다. 지난 해 9월에 열린 생태교통은 201331일 처음으로 자동차로부터 해방을 선언하고 차 없는 거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주민 모두가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생태교통 시범을 마친바 있다.

 

 

성공적으로 마친 생태교통을 기억하다

 

미래의 운송수단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생태교통 수원2013’이 한 달 간의 프로젝트를 끝낸 지 일 년이 훌쩍 지났다. 아직도 생태교통 시범지역인 행궁동 일원에는 옛 생태교통의 차 없는 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91, 1년이 지난날을 기억하는 즐거운 도시산책 생태교통 수원백서가 발간이 되었다,

 

한 권의 책과 한 장의 CD에 수록된 1년 전의 생태교통을 기록하고 있는 이 백서는, 기존의 행정부서에서 내던 백서와는 판이하다. 그 안에는 1년 전 생태교통의 모든 것을 빠트리지 않고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좌측엔 한글로 우측엔 영문으로 기록이 된 생태교통. 그 첫 머리에 사람이 곧 생태교통이라는 글이 보인다.

 

 

걷고, 뛰고, 날고 싶은 인간의 욕구는 너무나 강렬했다

그 욕구는 각종 교통수단을 만들고 발전시키며 온 우주로 뻗어나갔다

그러나 이제, 신의 걸작인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과의 소통이 필요할 때가 되었다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타며 신의 걸작인 우리의 몸을 잘 활용해보자.

 

91일 행궁동 커뮤니티 공간이 생기다.

 

511시 생태교통 당시 문화슈퍼로 지역민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활용했던 곳이 새롭게 구조변경을 했다. 그리고 91일을 기해 생태교통마을 커뮤니티센터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15명 정도의 행궁동 안내를 맡은 마을 해설사들이 하루에 2교대로 근무를 한다. 행궁동을 찾아온 외지인들에게 생태교통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안내하는 것이다.

 

 

저희들은 모두 2교대로 2명씩 근무를 합니다. 15명 정도의 해설사들이 있는데, 이곳 커뮤니티 센터 주변 정리도 하고, 화초에 물도 주기도 하고요. 주민센터 등을 통해 마을 안내를 요구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성실히 안내를 해드립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종배(, 65. 장안동 화서문 길) 해설사와 이혜영(, 50. 신풍동 138) 해설사의 말이다. 이들은 지난 해 생태교통 수원2013’때 모두 마을 해설사로 담당을 했었다고, 지난해는 거의 3개월 동안 해설사로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전문적인 교육까지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가 저희 생태교통 마을이 시범지역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생태교통을 실천하는 마을이 되어야죠. 아직은 주민 전체가 적극적으로 동참을 하지 않지만 차츰 변화가 될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저희가 먼저 변해야 이곳을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도 생태교통의 중요성을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기대를 하면서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죠.”

 

지난해 생태교통이 끝나고 난 뒤 한 해 동안 행궁동은 천천히 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차 없는 거리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은 한 달에 한번이라도 차 없는 거리를 만들자고 한다. 지금은 불가능할 것 같은 이야기지만, 지난해도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 커뮤니티 공간을 활용하는 주민들에게 더 큰 기대를 걸게 되는 것이다.

 

1130()화성연구회(이사장 이낙천) 회원 30여 명과 함께 떠난 답사. 보령 성주사지와 남포읍성, 서산 부석사를 돌아오는 당일 코스로 길을 떠났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이 바로 백제 때의 절 오합사가 나중에 낭혜화상이 중창을 하면서 이름을 바꾸었다는 성주사지. 국보 1점과 보물 3, 그리고 지방문화재 3점이 있는 곳이다.

 

금당이란 절의 중심부요, 부처님을 모신 곳이다. 절에서는 가장 중요한 곳임은 부언할 필요가 없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성주사는 백제시대 사찰로, 백제멸망 직전에 붉은 말이 이 절에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번이나 절을 돌면서 백제의 멸망을 미리 예시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성주사는 백제 법왕이 왕자일 때인 599,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위해 건립한 사찰이라고 전한다.

 

 

숭암사 성주사 사적에 보면 옛 성주사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있다. 불전 80, 행랑 800여 칸, 수고 7, 고사 50칸으로 거의 천여 칸의 거대한 규모를 가진 사찰이었다. 현재 발굴 후 잘 정비가 된 성주사지는, 9천여 평의 대지를 낮은 석축 담으로 둘러싸고 있다. 전날 눈이 내려 아직 눈이 남아있는 성주사지. 많은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 가장 눈길을 붙드는 것은 바로 금당터였다.

 

금당터의 석불좌 설명이 이상해

 

성주사 금당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백제에서 가장 웅장한 가람이었던 성주사에 신라는 왜 금당을 새롭게 조성한 것일까? 통일신라시대에 금당을 조성했다면, 금당터를 오르는 돌계단도 이 시기에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금당터에는 사면으로 계단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 중앙오층석탑 뒤로 오르는 계단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성주사지석계단(聖住寺址石階段)’이다.

 

계단은 잘 다듬은 널찍한 돌을 이용하여 5단으로 쌓아 올렸다. 중앙오층석탑에서 금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남다르다. 정면이기 때문에 양쪽 소맷돌에 사장상을 조각해 앉혀놓았다. 이 사자상은 1986년에 도난을 당한 것을, 옛 사진을 토대로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사자상의 설명을 듣고 나서 계단을 올라 석불좌 앞에 모여섰다. 그런데 이곳에서 해설사의 안내가 영 미덥지가 않았다.

 

 

금당터는 사방이 트였던 것으로 보여

 

금당의 한 가운데는 석불좌가 남아있다. 넓게 석재를 이용해 2단으로 조성한 석불좌는 조형미기 뛰어나다. 큼지막하게 사각형으로 조성한 석불좌. 일반 석불좌처럼 높지가 않은 것은, 아마도 이 부분이 하층기단부이고, 위에는 상층기단부가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는 장대석으로 네모나게 두르고 난 뒤, 그 위에 연꽃잎을 크게 조각한 앙련을 새긴 4장의 석재를 이용해 위 기단을 올렸다. 네 장의 석재를 가변부분을 둥그렇게 조형하였으며, 그 중심을 도드라지게 하였다. 아마도 이 부분에 상층기단인 좌대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남은 석불좌만 보아도 훌륭한 석조각임을 알 수가 있다.

 

 

이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즉 석불좌 사방에 주초가 놓여있고, 북쪽으로 또 하나의 주초가 있다. 이렇게 석불좌와 주초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금당터 가까이만 전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높게 조성을 한 금당터의 사방에 계단이 있고, 중앙에만 주초가 있었다는 것은, 사방에서 이 금당터를 올라 예를 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금당터 사방이 트여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해설사의 해설이 못 미더워

 

그런데 정말 웃지 못 할 일이 생겼다. 금당터 중앙에 있는 석불좌를 설명하는데, 영 미덥지가 않다. 해설사의 말로는

 

이 석불좌 위에 신라시대에 조성한 철불이 있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철불을 조각내어 가져가버렸다. 그리고 이 석불좌는 깨진 것이다. 이 위에 철불이 있었는데, 그 흔적이 여기 이렇게 녹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설명이다.

 

 

석불좌가 깨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개 석불좌는 거대한 돌을 구할 수 없을 때, 몇 조각으로 나누어 조성을 한다. 대개는 두 조각이나 네 조각으로 조성을 하는데, 깨진 석조각이 4조각으로 칼로 그은 듯 깨질 수가 있을까?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석불좌는 하단부이다. 그 위에 커다란 네모난 돌을 앉고 앙련을 하단부에 새겨진 조각의 반대형으로 조각을 한다.

 

철불이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라도 석불좌가 깨졌다거나, 그 위에 바로 철불을 올려 그 흔적이 남았다는 것은 영 미덥지가 않다. 거기다가 국보인 낭혜화상 탑비를 70이 넘은 마을 어르신이 업고 다녔다는 설명에서는, 그저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비 몸돌의 높이가 263cm, 너비 155cm, 두께 43cm나 되기 때문이다. 장정 몇 사람이 들어도 힘든 비를 노인네가 업고 다녔다는 설명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문화재 해설이란 정확한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이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하는 문화재 해설. 참 웃지도 못하겠다. 문화재 답사를 많이 하는 나로서는 가끔 이렇게 해설사들이 입증이 안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하기에 내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해설사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문화재 해설,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근거가 없이 하는 가정의 해설, 또는 본인의 생각만으로 추정하는 문화재 해설은 삼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문화재 해설이란 가장 정확한 내용, 가급적이면 역사적으로 입증이 된 내용을 관람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된 사적 제206호인 ‘화성 융릉과 건릉’은 화성시 안녕동 산 1-1에 소재한다. 융릉은 후에 장조로 추존된 장헌세자(사도세자)와, 역시 사후에 헌경의황후로 추존된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 능이다. 이 융릉은 합장 능이면서도 혼유석은 하나이다. 후에 의황제로 추존한 장헌세자의 능인 융릉은, 세자의 묘인 원의 형식에 병풍석을 설치하고, 상, 하계 공간으로 나누어 공간을 왕릉처럼 조영한 능이다.

 

융릉은 조선 후기의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병풍석을 설치하였으나 난간석이 없으며, 병풍석 덮개의 12방위 연꽃 형의 조각은 융릉만의 독특한 형식이다. 장명등의 8면에 조각된 매난국의 무늬는 매우 아름답다.

 

융릉의 병풍석 / 사진자료 문화재청 

 

여러 번 명칭이 바뀐 융릉

 

1762년 윤 5월 21일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뒤주 속에 갇혀 숨진 장헌세자는, 그해 7월 23일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인 양주 배봉산 아래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아들을 죽인 것을 후회한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에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고, 묘호를 ‘수은묘’라고 하였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를 원으로 격상시켜 ‘영우원’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정조 13년인 1789년에는 무덤을 화성시 안녕동의 현재 위치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그 뒤 순조 15년인 1815년 12월 15일에는 혜경궁 홍씨가 춘추 81세로 승하하자, 순조 16년인 1816년 3월 3일 현륭원에 합장하였다.

 

고종은 황제로 즉위한지 3년이 되는 광무 3년인 1899년 11월 12일,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렸기에 ‘융릉’이라고 능호를 정하였으며, 곧이어 12월 19일에는 황제로 추존하여 ‘장조 의황제’라 하였으며, 혜경궁 홍씨도 ‘헌경의황후’로 추존 되었다.

 

 융릉으로 들어가는 길(위)과 가을빛이 물든 곤신지

 

뛰어난 융릉의 석물과 곤신지

 

지난 11월 10일(토), 융건릉을 찾아 나섰다. 융건릉을 다 돌아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융릉의 석물을 보면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를 기억해 내고 싶어서였다. 입구에서부터 융릉으로 들어가는 숲은 가을이 내려 앉아있었다. 발밑에서는 낙엽이 밟히는 소리가 정겹다. 누군가 가을은 발밑에서 온다고 했던가. 숲을 벗어나면 곤신지가 나타난다. 곤신지는 원형 연못으로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인 1790년에 조성이 된 연못이다.

 

곤신지는 융릉의 남서방향을 뜻하는 ‘곤신방’에 조성을 한 연못으로, 묘지에서 처음 보인다는 물을 뜻하는 ‘생방’으로, 이곳이 길지이기에 조성을 했다고 한다. 원형의 곤신지에도 가을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천천히 융릉으로 향한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 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 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융릉 전경

 

융릉 앞에 조성한 석인도 사실적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낸다. 효성이 깊은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당대의 최고 석공들을 데려다가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장부터 뒤틀리기 시작한 심사

 

11월 10일의 답사는 ‘도란도란 수원e야기’의 블로거들과 동행을 한 답사였다. 그런데 곤신지를 지나 융릉의 홍살문 앞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심사가 영 불편하다. 홍살문 옆에는 ‘판위’라고 하는 조형물이 있다. 네모나게 조성을 한 판위는 임금이 능에 제사를 올리려고 찾아왔을 때, 능을 바라보고 절을 하던 곳이다.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는 사람

 

판위 앞에는 한 무리의 학생인 듯한 사람들이 서 있다. 문화재를 해설하는 분인지 학생을 인솔하고 온 선생님인지는 모르겠지만, 판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하고 있다. 적어도 남들에게 문화재를 안내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판위 위에 올라서서 해설을 할 수 있을까? 이 분 제대로 문화재 해설을 할 수 있는 소양은 갖추었는지 궁금하다.

 

 융릉의 정자각과 비각

 

석물 보러 갔다가 숲만 보고 왔지요.

 

정자각을 돌아본 후 비각으로 향했다. 비문 등을 자세히 살펴보고 능으로 올라 석물을 보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능으로 오르는 것을 금지시킨다는 푯말이 붙어있다. 물론 출입통제를 하는 목책 울타리도 쳐놓았다. 어이가 없다. 조선 후기 가장 뛰어나게 조성을 했다는 융릉의 병풍석 등을 보러왔는데, 먼발치에서만 보아야 하다니.

 

그것도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처음부터 뒤틀린 심사가 급기야 울화로 변한다. 물론 문화재보호를 위해 출입을 통제시키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능 근처에도 들어가 볼 수가 없게 만들다니. 여주 세종대왕 능에도 관람을 할 수 있는 관람통로를 내놓았다. 그렇다고 문화재가 훼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능이 높아 윗부분 밖에는 보이지 않는 융릉과 블로거들에게 설명을 하는 e수원뉴스 김우영 주간 앞으로 보이는 통제 목책

 

참으로 어이가 없다. 보호란 무조건 사람들이 근접하지 못하게 만들어야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결국 융릉을 먼발치에서, 능위로 보이는 것만 보고 온 셈이다. 융릉을 보러갔다가 가을이 깊은 숲만 보고 왔다. 바람에 날려 땅을 구르는 낙엽처럼, 씁쓸한 마음만을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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