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많은 전설을 간직한 이 미륵대원의 동쪽. ‘하늘재’로 오르는 길목에 서 있는 석탑 한기. 모든 석조물들이 아래편에 모여 있는데 비해, 이 삼층석탑만 떨어져 있다. 석탑을 찾아 오르다보면 좌측에 솟대와 장승이 서 있고, 하늘재를 오르는 길임을 표시하는 석비가 서 있다.

이 석탑을 찾았던 날은 눈이 채 녹지 않은 주변이 미끄럽다. 눈밭 위에 누군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게 하는 발자국이 찍혀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미륵리 사지이다 보니, 이곳이라고 찾지 않았을 리가 없다. 탑 너머로 아름다운 월악산 줄기의 자태가 보인다. 탑과 월악산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신라의 양식을 따른 고려 초기의 비보석탑

월악산을 배경으로 하늘재를 오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삼층석탑.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석탑은, 일반형의 단순한 삼층석탑이다. 석탑에는 고려시대의 탑에서 보이는 안상이나, 석불 등을 조각하지 않았다. 밋밋한 삼층석탑은 기단이 견실하다. 그리고 그 위에 삼층의 몸돌과 노반을 얹었는데, 몸돌은 위로가면서 급격히 줄고 있다.

탑 전체의 분위기는 매우 안정적이며,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에서 신라탑의 유형을 본다, 이 탑이 미륵리 사지의 한편에 올라앉아 있는 이유를, 지기를 충족시키는 비보사탑 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비보사탑설이란 도선국사에 의해 제기된 논리로, 땅 기운이 약한 곳에 세워 기운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김두규 교수는 『풍수지리의문화의 이해』에서 「비보진압풍수 행위란 부족하거나 지나친 것을 눌러주는 풍수 행위로서, 물이 부족한 지역에 연못을 파거나, 골바람이 부는 곳에 나무를 심거나, 잘못된 물길을 돌리거나, 군사적 취약점에 있는 곳에 비보사찰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한 미신행위가 아니라, 정교한 과학적 논리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주변과 어우러진 단아한 모습

백제의 석탑은 7세기 이후에 목탑을 석탑으로 변화를 시키면서, 독창적인 조탑의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신라의 경우에는 백제보다 늦은 7세기경에 석탑을 쌓기 시작해, 8세기에 들어서 본격적인 탑의 조성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초기의 석탑이라고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전체적인 모습으로 보면 지방 장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리의 많은 석조물 등을 보아도 섬세하기보다는 단아하고 장중하다. 삼층의 기단은 먼저 지대석을 놓고, 지대석 위에 하대, 하대중대, 하대갑석의 순으로 하층기단을 구성하고 있다. 하층기단의 돌들은 서로 엇갈리게 놓아, 무게의 중심을 분산해 견실하게 하였다. 그 위에는 4매의 판석을 세워 상대중석을 만들고 상대갑석을 얹어 상층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상대중석에는 양우주와 중앙에 탱주를 모각했다.

몸돌은 밋밋하게 조형하였으며, 옥개석은 낙수면이 완만하다. 옥개석의 받침은 5단으로 꾸몄으며, 위에는 4매의 노반을 얹었다. 이렇게 기단을 견실하게 만든 이유도 비보사탑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천년세월을 월악산과 한몸이 된 석탑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월악산과 함께 했다. 뒤로 보이는 월악산이 마치 한 몸인 양 느껴진다. 눈이 쌓인 탑 주변과 군데군데 눈이 쌓인 탑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마 저 밑에 보이는 미륵대원지의 모든 것을, 이 석탑이 품어 안고 있었을 것이다. 이 삼층석탑이 서 있는 곳이 남북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하기에 이 석탑 앞에서 이곳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추어 숨을 돌리고는 했을 것이다. 천년 세월을 그렇게 말없이 서 있는 삼층석탑. 지금은 여기저기 파손이 되고, 탑의 틈새는 벌어져 있지만, 그 단아함은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이다. 이러한 소중한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는 우리 땅의 곳곳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는 생각을 한다.

삼층석탑을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있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천 년 전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 남북으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삼층석탑.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 하나를 간직할지 궁금하다.

‘천령’은 ‘하늘재’라는 소리이다. 지금의 경남 함양군이 바로 신라 때 명칭이 천령이었다.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이라 칭하였으나, 신라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천령군으로 개칭하였다. 당시는 이곳이 육로를 이용해 다니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했던가? 함양군에는 어느 곳 보다도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만큼 이 곳의 산천경계가 좋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함양군의 곳곳에는 수많은 정자가 즐비하게 서 있다. 물이 있고 산이 아름다우면, 그곳에는 반드시 정자가 서 있기 마련이다. 함양군에는 정말 아름다운 정자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손으로 꼽자면 난 당연 거연정을 머리에 둔다.


바위 위에 홀로 서 있는 거연정

거연정은 1872년에 지어졌으니, 130년 정도가 지난 정자이다. 정자의 연륜은 오래되지 않았으나, 화림재 전시서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7세손인 전재학, 전민진 등이 건립을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가 자연 안에 거하고, 자연이 내안에 거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팔정팔담(八亭八潭)이라고 했던가.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거연정 앞을 흐르는 내에는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가 있었다는 곳이다. 그만큼 바위 암벽을 타고 흐르는 내는 절경을 만들고 있다. 중층 누각으로 지어진 거연정은 내부에 판방을 두고 있으나, 뒷벽의 판재만 남아있고 삼면의 문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




바위에 부딪는 물소리, 선계가 따로 없어

비는 줄기차게 쏟아진다. 전날 밤에 많은 비가 내렸는지, 계곡을 차고 흐르는 물이 잿빛이다. 바위에 부딪는 물은 금방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저만큼 거연정이 보인다. 암벽 위에 홀로 서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정자. 겹처마에 합각지붕을 이고, 자연 암반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건너편에서 구름다리로 연결해 건널 수 있도록 한 거연정. 멀리서 사진을 찍고 나서 다리를 건넌다.




물소리가 더욱 거칠다. 정자 뒤편 낮은 암반을 타고 흐른 물이, 깊은 소에서 춤을 추며 맴돈다. 빗소리가 절로 흥취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발길을 멈춘 것이나 아닌지. 정자 안에는 여기저기 편액이 걸려있다. 저편 바위에는 붉은 글씨로 각자를 해놓았다. 정자 밑으로 내려가니, 이런 멋을 어디서 또 볼 것인가?

마음에 여유를 본다. 높고 낮은 바위를 그대로 이용해 많은 기둥을 세웠다. 기둥이 서기 힘든 곳은 층이 나게 주추를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올렸다. 앞뒤, 사방으로 물길이다. 그 물길 안에 거연정이 바람처럼 홀로 서 있다. 누구랴 이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저만큼 한줄기 거센 물살이 몰려온다. 아마 저 위 바위틈에서 거연정의 경치에 반해, 길을 멈추고 있었나보다. 그 물길이 거연정으로 몰려들어, 소리를 내며 소 깊숙이 빨려 들어간다.



지금은 비록 낡고 퇴락한 정자. 그 흔한 단청 하나 하지 않은 맨살을 들어내고 있는 정자. 거연정은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비가 오는 날 찾은 거연정은, 그렇게 스스로를 물 위에 내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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