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판소리라고 하면 전라도를 먼저 생각한다. 그 곳에 많은 소리꾼이 있고, 섬진강을 경계로 동편제와 서편제가 구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충청간의 소리인 중고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중고제는 한수이남과 금강이북인 경기도와 충청도에 전해지던 소리를 말한다.

 

그 중 경기도 소리는 경제(京制)’라고 하여서 여주 벽절이라는 신륵사에서 명창 염계달이 의해 전해진 소리를 말한다. 예전 판소리의 명창들은 스스로의 소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흔히 <독공>이라 하는 이 소리공부는 동굴 속이나, 혹은 폭포에서 수년에서 10년이란 긴 시간을 소리에만 전념한 것이다.

 

17세에 길에서 장끼전을 주워 벽절 신륵사를 향한 염계달. 낮에는 절에서 불목하니 노릇을 하면서 밤이 되면 소리공부를 시작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날들이었을까? 그렇게 하기를 10. 당당히 명창의 반열에 오른 염계달 명창. 염계달 명창은 조선조 정종 때부터 철종 때까지 활동한 명창이다. 판소리에 경기도 소리조인 경드름을 새롭게 창출해냈다. 판소리 명창들이 '추천목'으로 지목하는 곡도 바로 염계달 명창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리꾼들이 몰려들었던 화성행궁

 

평양 능라도에서 덜미소리 한번을 내어 10리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고 하는 평택 진위출신 모흥갑의 앞에서는 그 누구도 적벽가를 부르지 못했다고 하니 당시 모흥갑의 명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 중고제(中高制)는 판소리에서, 조선 헌종 때의 명창 모흥갑(牟興甲염계달(廉季達김성옥(金成玉)의 법제(法制)를 이어받은 유파를 말한다.

 

이른 시기의 판소리 명창 중에서 모흥갑은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소리꾼 중의 한 사람이다. 신위의 관극시, 송만재의 관우희, 윤달선의 광한루악부, 이유원의 임하필기, 이건창의 이관잡지, 신재효의 광대가등에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춘향가무숙이타령등에도 모흥갑의 이름이 등장한다.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흥갑이라는 명창이 당대에 명성을 떨쳤음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모흥갑은 소리하는 모습이 그림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소리꾼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여덟 폭 짜리 <평양감사부임도> 중에는 능라도에서 많은 구경꾼이 모인 가운데 소리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 있는데, 여기에 소리하는 소리꾼이 모흥갑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수원은 판소리꾼들이 무대를 이어갔다. 그런 수원은 예부터 수원 화령전 옆 건물인 풍화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발탈의 예능보유자 고 이동안 선생이 기거할 때 전국의 소리꾼과 춤꾼들이 이곳에 모여 소리를 하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그런 맥이 흐르고 있는 수원이기에 판소리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서울 성수아트홀 무대에 올린 남도소릿길

 

19일 이른 시간에 서울로 향했다. 그동안 문하생들과 함께 수원의 곳곳에서 남도소리를 들려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흥부가와 적벽가의 이수자인 소리꾼 강승의 선생이 이끄는 무대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서울 성동구에 소재하고 있는 성수아트홀 무대에 오후 7시부터 열린 무대에는 경기안택굿 고성주 명인의 살풀이춤까지 오른다고 하니 일부러 찾아간 것이다.

 

이날 공연은 객석을 메운 사람들로부터 많은 환호를 받았으며 판소리 중 심청가와 흥부가 등을 각색해 관객들이 보기 좋은 무대를 만들었다. 그냥 소리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연출된 무대로 인해 소리극을 보는 것 같아 관객 누구나 좋아할 만한 무대였다. ‘ 남도소릿길 - 풍월을 싣고무대를 감상하면서 수원에서 무대에 올랐던 많은 소리꾼들이 생각난다.

 

이날 남도소릿길에는 많은 인원이 무대에 올랐다. 강승의 선생의 문하생들이 보여준 2시간의 공연. 물론 그들이 모두 소리의 멋을 안 것은 아니다. 이제 소리를 갓 시작한 문하생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시간 가까이 무대를 지켜보면서 이제 수원도 옛 영화를 되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수많은 재인들이 거쳐 간 수원. 우리 전통을 지키고 찾아가는 것은 곧 우리의 정체성을 찾는 길이기 때문이다.

같은 강씨성을 가진 분들이다. 한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난 예인이요, 또 한 사람은 현재 대단한 인기를 눌고 있는 연예인이다. 한 분은 제자들이 주는 용채까지 꼼꼼히 기록한 분이시고, 한 사람은 탈세의 용의자가 된 사람이다. 왜 강호동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돌아가신 강도근 명창의 생각이 나는 것일까?

강도근 명창. 남원이 마지막 판소리 보루라고 인정을 받게 만든 장본인이다 이 시대에 수많은 기교를 부리는 많은 창자들이 있었다면, 강도근 명창은 그저 우직하게 판소리 본바탕을 그대로 이어 온 명창이다. 강도근은 농사꾼 아버지인 강원중과 어머니 이판녀 사이에서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18년 지금의 남원시 향교동에서 태어났다.

국악의 성지 이층 전시실에는 강도근 명창의 관련자료들이 전시가 되어 있다.


강도근의 호적명은 강맹근이다. 그의 집안에는 음악가들이 많았는데, 대금산조의 무형문화재 강백천(1898∼1982)이 그의 사촌형이고, 판소리와 창극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산홍과 가야금의 명인 강정열은 당질이며, 가야금산조로 남원과 진주에서 활동했던 강순영 또한 그와 사촌간이다.

만들어지는 소리를 거부한 강도근 명창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 <흥보가>의 전통을 가장 충실하게 지킨 판소리 소리꾼이라고 한다. 그는 항상 ‘자작은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전통기법을 그대로 지켜간다는 이야기이다. 소리꾼들은 조금 소리를 익히면 나름대로의 목을 만드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강도근 명창은 통성 위주의 목으로, 소리 끝을 짧게 끊어내는 대마디대장단을 충실하게 구사했다.



강도근 명창의 주변에는 늘 많은 전통예술인들이 있어, 명창의 학습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강도근 명창의 소리는 전형적인 동편제 판소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도근 명창의 목소리는 철성이다. 철성이란 쇳소리와 같이 조금은 탁한 듯한 소리로 웅장하고 남성적인 호탕함이 있다. 송만갑, 김정문으로 이어진 동편제 판소리의 특징적인 목이다.

현대 판소리 명창 중에서는 유일하게 강도근 명창만이 철성을 가졌다고 한다. 강도근 명창은 판소리가 쇠퇴기에 잡어 든 1970~80년대에 남원국악원의 창악 강사로, 후진들을 양성했다. 강도근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남원이 우리나라 판소리의 최후 보루라는 평가를 받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강도근 명창이 살아생전 정리한 수강료 납부장. 제자들이 주고 간 용채까지 일일이 기록을 해두었다.
아래편 출석부는 날마다 수기로 출석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고 있다.


꼼꼼하게 수기로 적은 출석부, 눈물이 나다

남원시 운봉을 가면 ‘가왕’이란 칭호로 한 세대를 풍미한 명창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그리고 그 조금 아래에는 여류명창 박초월의 생가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 커다란 건물이 바로 ‘남원 국악의 성지’이다. 이 건물 안에는 전시관과 함께 남원시립국악단의 연습실 등이 자리하고 있다.

1층에는 사무실과 민속국악실 1관과, 판소리 전수관이 있고, 2층에는 민속국악실 2관과 공연장 등이 자리한다. 이 2층 전시실 한편으로는 남원국악원에서 창악강사로 후배들을 가르치던 강도근 명창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강도근 명창이 직접 수기로 쓴, 수강료 납부 장부와 출석부가 전시되어 있다. 수강료 장부에는 제자들이 강도근 명창을 찾아 용채를 쓰시라고 주고 간 돈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생각해서 준 돈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출석부에는 그날그날 출석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어 놓았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강도근 명창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온전히 판소리를 제대로 부르다가 가신 명창 한 분. 이 분이야말로 세상에 흐트러짐이 없이 살다간 진정한 예인(藝人)이 아닐까? 정말 좋아하는 연예인이었다. 그리고 우직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 온 그를 화면을 통해서 만나는 것을 무엇보다 즐겨했다.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언제가는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그런데 그런 소문이 났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이프다. 그런데 왜 명창의 그 수강료 납부장이 생각이 난 것일까? 


판소리를 하는 명창들의 이야기는 참 우리로서는 상상을 초월하게 만든다. 소리를 얻는 것을 ‘득음(得音)’이라 하지만, 그 득음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가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짧게는 3~4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혼자 소리공부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우리는 ‘독공(獨功)’이라고 한다.

 독공의 과정은 정말 이야기만 들어도 아찔하다. 전공을 국악을 했기 때문에 고 박동진 명창을 스승으로 모셨었다. 그리고 방송국에서 생활을 하면서, 박동진 명창과 몇 날을 함께 방송제작을 하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들은 이야기가 바로 명창들의 득음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동백 명창이 득음을 했다는 동굴이 있는 흐리산

‘독공(獨功)’은 ‘독공(毒恐)’이라니.

대개 독공을 하고자 하는 소리꾼들은 동굴이나 폭포를 찾아간다. 동굴 속에 들어가면 2~3년을 동굴을 막아버리고, 겨우 음식물이나 변기 정도가 드나들 구멍 하나만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리를 얻어, 그 동굴을 막아 놓은 것이 무너져야 나온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하는 명창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폭포 독공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권삼득 명창이 콩 서 말을 들고 남원 용담폭포로 가서, 소리 한 바탕을 할 때마다 콩알 하나씩을 폭포의 소에 던졌다는 이야기도 맥락을 같이한다.

“독공이란 것은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아. 그래서 목에서 피가 넘어오지. 터진목에 예닐곱 번은 그렇게 터지고 아물어야 혀”

얼마나 그 독공이란 것이 힘이 들었을까? 그렇게 십년 가까이 소리공부를 마친 후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서 소리 한 대목을 한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하면 ‘귀명창’들에게 시험을 보는 과정이다. 그 소리판에서 명창 반열에 들지 못하면, 다시 독공을 시작해야 한다니. 독공이란 것이 과연 독을 마시는 것과 같은 두려움이 있을 만도 하다.



흐리산 중턱에서 소리가 들려

이동백 명창은 ‘전무후무한 대명창’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생긴 것이 준수하고 소리의 성음이 남들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동백 선생님이 소리를 할 때면 객석에서 난리가 나지. 서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그래서 소리를 할 때 선생님은 항상 맨 뒤에 순서를 맡았어. 선생님이 일찍 순서를 마치고 나면, 사람들이 다 가버렸거든.”

얼마나 그 생김새가 준수했는지, 지금의 인터넷 등에서 검색을 할 수 있는 자료를 보아도 알만하다. 이동백 명창은 어렸을 때는 한문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공부에는 취미가 없고 소리에만 전념을 하다가, 서천 장항 빗금내에 있는 김문의 소리꾼인 김정근 문하로 들어간다. 무숙이타령의 대가라고 하는 김정근 명창은, 김창룡 명창과 김창진 명창의 부친이다. 정노식은 『조선창극사』에서 ‘조선의 소리는 김문에서 되다시피 했다’고 적고 있다.


그 후 김세종 문하로 들어간 이동백 명창은 고향인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로 돌아온다. 그곳 흐리산(희이산) 중턱의 동굴 앞에 나무를 엮어 초가를 짓는다. 멀리 장항으로 나가는 길목이 보이는 이곳에서 2년간 동굴독공을 한다. ‘그 2년 동안 북채가 10다발은 끊어졌다’고 후세 사람들은 즐겨 이야기를 한다.

“정말 잘났지. 새색시 때도 힐금거리며 보았으니까?”

벌써 20년이 지났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이동백 명창의 생가마을을 찾았었다. 그곳에서 평소 이동백 명창을 보았다는 김부월 할머니(당시 93세였던 것 같다)는 이동백 명창을 이렇게 소개했다.

“정말 잘났지. 논둑길을 걸어오면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대장부였어. 새색시였었는데 옆에 시아주버님도 계셨지만 곁눈질로 보았으니까”

아마도 당시로 치면 지금의 인기가수 뺨칠 정도였는가 보다. 그렇게 흐리산 중턱 동굴에서 독공을 마친 이동백 명창은, 어전에 나아가 소리 한 대목으로 벼슬을 얻는다. 당상관인 통정대부를 제수 받았다고 하니 참으로 대단한 소리였나 보다. 신재효의 ‘광대가’의 첫 머리는 바로 이동백 명창을 기준으로 삼았을 정도라는 소문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야 한다는 동굴독공. KBS 다큐멘터리 '중고제'장면 캡쳐

흉내 낼 수 없는 소리 ‘새타령’

이동백 명창의 소리는 일본 빅타레코드사에서 취입을 한 것을, ‘서울음반’에서 CD로 복각을 하였다. 그래서 많은 소리를 들을 수가 있다. 그 중 압권은 당연 새타령이다. 뻐꾸기 울음소리 대목으로 가면, 정말로 뻐꾸기가 우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이다. 오랜 독공에서 얻은 명창이라는 칭호가 명불허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제는 소리로만 기억할 수 있는 이동백 명창. 1993년에 들려본 후 15년 만인 2008년 9월 9일 생가터를 찾아갔을 때는, 예전의 집이 아닌 잘 지어진 가옥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당에는 철을 알리는 코스모스가 한껏 자태를 자랑하고. 저 뒤편에 보이는 흐리산 자락에서는, 금방이라도 새타령 한 대목을 부르며 논둑길을 걸어오는 명창의 모습이 눈에 보일 듯하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은 명창의 마을이다. 일찍 우리 판소리사에 한 획을 그은 가왕(歌王) 송흥록 선생이 이 마을 출신이며, 여류 국창이라는 박초월 선생이 바로 이웃집에서 태어나셨다. 이 마을에는 현재 명창의 생가라는 두 채의 집이 10여 m도 안 되는 거리에 남아 있다.

운봉을 찾아 간 것은 바로 이 명창들의 삶을 보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떻게 일세를 풍미하는 명창들이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은 도대체 얼마나 노력을 하였기에, 우리 판소리사에 없어서는 안 될 귀한 인물들로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일까?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을 찾아가 본다.



이웃하고 있는 두 분의 명창 생가

지금은 밖으로 초가대문을 내어놓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나온다. 소리를 하는 동상이 서 잇다. 한 사람의 소리꾼과 한 사람의 고수의 형태이다. 이 뒤편으로 가왕 송흥록의 생가가 있다. 송흥록의 집은 정면 세 칸에 측면은 한 칸 반의 초가집이다. 한 칸은 부엌이고 가운데 한 칸은 사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그리고 맨 끝에 있는 방이 바로 안방이 된다. 박초월의 집은 그 앞에 좌측에 자리하고 있으며, 송흥록의 집과는 역으로 꾸며졌다.

부엌은 방보다 앞으로 돌출이 되어있고, 뒤편에도 문을 내었다. 가운에 방은 앞으로 툇마루를 놓고, 끝 방은 한편에 아궁이를 들였다. 경국 방의 넓이는 정면과 측면 모두 한 칸인 셈이다. 이 비좁은 집에서 가왕 송흥록이 태어난 것이다. 송흥록은 조선조 정조 초기인 1780년경에, 명창 권삼득의 고수인 송첨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왕 송흥록의 생가. 세칸으로 된 초가에서 태어났다.

귀곡성의 대가 가왕 송흥록

12세에 백운산 월광선사에게 공부를 했다는 송흥록명창. 중고제의 시조인 김성옥과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김성옥이 여산 동굴로 들어가 동굴독공을 하다가 만들어진 진양조를, 송흥록에게 전해주고 찬 굴에서 얻은 관절염의 일종인 학슬풍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송흥록은 그 소리를 판소리에 접목을 시켜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 조선말기 우리 판소리에 소리의 극치라는 계면조와 진양조가 송흥록에게서 완성이 된 것이다.

박초월은 이곳에서 태어나 12세 때에 김정문에게 흥부가를 익히고, 송만갑에게서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를 익혔다. 김정문은 남원 출신의 명창이며, 일제 강점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소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긴 명창이다. 송만갑은 송흥록, 그의 동생 송광록과 광록의 아들 우룡, 우룡의 아들인 송만갑으로 이어지는 소리꾼의 집안이다.



명창 박초월의 생가. 송흥록명창 생가 앞에 있다.

결국 박초월은 송흥록과 같은 소리의 맥을 이어왔다고 볼 수 있다. 박초월은 (사) 한국국악협회 초대이사장을 역임했으며, 한국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1967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수궁가의 예능보유자로 인정을 받았다. 시대를 거슬려 두 명의 명창이 태어난 이곳. 사람들은 그 내력을 잘 모르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살았을까를 걱정을 한다.

사는 집이 중요한 것일까? 그 좁은 초가 삼 칸 집에서 일세를 풍미하는 두 명의 명창들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그 소리들은 우리 판소리사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운봉을 떠나면서 뒤로 들리는 소리가 발길을 붙들고 있다. 언제 또 이곳을 찾을 수 있으려나. 이동백 명창이 세상을 떠날 즈음에 한 야산에 올라 북을 치면서 했다는 말이 생각이 난다.



‘이제 소리를 알만하니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다‘ 라는 말이. 그렇게 전국을 20년이 넘는 세월을 돌아다니면서, 우리 문화제를 알만하니 기운이 달린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