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점동면에서 삼합리 쪽으로 가는 길을 들어가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이 바로 삼합리이다. 이 삼합리에서 충주 앙성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가다가 보면, 이정표가 하나 나타난다.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44호인 <오갑사지 석불좌상>이 있다는 표시다. 그런데 이 표지가 있는 곳에서 얼마나 들어가는지, 거리가 적혀있지가 않다.

 

두 번이나 찾아 헤맨 끝에 만난 석불좌상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으려고 헤매다가, 결국엔 찾지를 못하고 뒤돌아선 적이 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았지만 소용이 없다. 두 번째 답사 길이다. 이번에는 앙성면 사무소를 찾아들어가 오갑사지 석불입상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약도까지 펼쳐 보이며 안내를 한다. 면사무소 직원이 적어주는 주소를 갖고, 번지를 찍어 보았다. 여주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한참을 가니 '동막마을'이라는 석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곳으로 부터는 '대물낚시터'라는 저수지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내비게이션이 지난번에 들어왔던 곳을 도착하자, 찾는 곳의 근처에 왔다는 안내를 끝으로 멎어버렸다. 이런 낭패가 또 있을까? 요즈음은 날씨가 추워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더구나 몇 집 되지도 않는 마을이라, 사람들을 찾기도 힘들다. 그 주변을 몇 바퀴를 돌았다. 마침 차가 한 대 나오기에 길을 막고 물었더니, 이곳에서 한참 들어가야 한단다.

 

 

 

고개를 넘어 도로 같지도 않은 좁은 길을 들어섰지만, 마을회관이 보이지를 않는다. 차가 지나가면 서로 비켜주어야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다. 재차 묻는다. 한참 가야 한단다. 이러니 내비게이션이 알려줄 수가 없었나보다. 길도 표시되지 않은 곳을 10여분을 가서야 겨우 마을회관을 찾았다.

 

파손이 심한 오갑사지 석불좌상

 

마을회관 집 뒤라고 알려준 대로,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런데 밖에서 보니 아무 곳에도 석불좌상이 보이지를 않는다. 묶어 놓은 개 두 마리가 무슨 낮도둑이라도 되는 양 짖어댄다. 요즈음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개들하고 한창이나 실랑이를 해야 할 때가 많다. 마침 사람이 나오기에 재차 물었다. 집 뒤편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결국 두 번째 답사 길에서, 그것도 몇 바퀴를 돌면서 헤맨 끝에 만난 오갑사지 석불좌상. 한 마디로 너무 많은 훼손이 되어 있다. 충북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석불좌상 하나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이다. 그러나 파손이 되었다고 해서, 소중한 문화재가 아닐 수는 없다.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찾아온 여행자가 반갑기라도 한 듯, 석불좌상은 엷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연꽃 문양을 한 대좌와 석불좌상

 

오갑사지 석불좌상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작고 아담한 이 석불좌상은 고려 전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사실주의적 기법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연화대좌는 밑에 원형으로 받침을 만들고, 8각형의 지주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는 연꽃잎을 조각하였다. 3단으로 조성이 된 대좌는 화려하지는 않으나, 소박한 면이 있다. 고려 석불에서 나타나는 대좌의 형식이다.

 

 

 

석불좌상은 얼굴과 머리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고, 손은 양팔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형태로 남아있어 정확한 수인의 형태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법의는 깊게 처리가 되어 있어, 조금은 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은 얼굴 표정은 미소를 띠우고 있다. 발은 결가부좌를 해 발가락이 법의 밖으로 삐져나왔으며, 무릎도 파손이 된 것을 떼어놓았다. 전체적으로는 약간 불균형적인 듯하지만, 조각 기법 등은 매우 우수하다.

 

오갑사의 주불상이었을 석불좌상

 

이 석불좌상이 있는 곳에서는 '명창3년임자(明昌三年壬子)'라고 명문이 새겨진 기와와, '오갑사'라고 쓴 명문의 기와가 다수 출토되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명창 3년인 1192년에 대대적인 중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보존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석불좌상의 뒷면까지 법의를 표현하였고, 다리를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도 조각을 하는 등, 나름대로 소중한 문화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에 봉착을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소중한 문화재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비록 높은 산을 오르고, 또 내려오다가 미끄러져 다치는 수도 왕왕 있지만, 소중한 우리문화재를 찾아나서는 길에 게으름을 떨 수는 없지 않은가? 오갑사지 석불이 아무리 심한 훼손이 되었다고 해도, 그 역시 소중한 우리의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고려 경종 4년인 979년에 조형되었으니, 벌써 천년 세월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산54-1 연곡사 경내에 세워진 보물 제152호인 현각선사탑비. 임진왜란 때 몸돌인 비는 파손되고 현재는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이 남아있다. 고려 전기의 승려인 현각선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이다.

사라진 비의 몸돌에는 현각선사의 일대기를 적었는데, 비문은 학사 왕융이 짓고, 장신원이 글을 썼다고 한다. 비는 임진왜란 때 화재로 손상을 입은 것이 풍화로 파손이 되고, 그 뒤에는 구한말에 의병항쟁 때 일본군의 방화와 약탈 등으로 더 손상이 된 것을, 1970년에 떨어진 조각들을 모아 붙여 놓았다고 한다. 천년 세월을 지켜 낸 비가 일제의 만행에 의해서 두 번이나 화를 당한 셈이다.


커다란 몸통의 현각선사 비

우선 현각선사탑비의 받침인 귀부를 보면 그 크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일반적인 귀부보다 상당히 크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여덟 마리의 용이, 앞면과 뒷면에 각 네 마리씩 새겨져 있다. 이 여덟 마리의 용은 구름 속에서 화염에 싸인 여의주를 다투는 것과, 바깥쪽을 향해 있는 것으로 나뉘어 있다.

거북의 몸통은 귀갑문을 등에 새긴 거북이의 형상이다 네 발은 사방으로 뻗쳐 납작하게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다. 머리는 용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눈방울이 부리부리하다. 눈썹은 길게 위로 뻗쳐 있으며, 입 주위에는 수염이 길게 자라 목 뒤편까지 뻗어져 끝이 모여 있다. 두 개의 커다란 콧구멍은 금방이라도 강한 바람을 뿜어 낼 듯하다.



받침돌인 귀부의 열굴은 크고 웅장하다. 콧구멍은 바람이라도 나올 듯. 등에는 귀갑문이 새겨져 있는데 일제에 의해 판손이 된 것을 붙인 자국이 보인다.

이수에 조각한 여덟 마리의 용,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다. 서로가 여의주를 탐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가운데의 용들은, 서로가 얽혀있어 힘이 넘치는 모습이다. 발가락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맹금류의 발을 닮았다. 밖으로 돌출이 된 용들은 사실적으로 표현이 되었으나, 뿔이 없어 조금은 해괴한 모습이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용들을 표현한 이수는 흔하지가 않다. 비석을 세우기 위한 몸통 위에 연결부분에는 안상과 귀꽃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빗물이 고이면 물이 흘러나갈 수 있도록 한 편에 배수구를 내 놓았다. 이렇게 세심하게 조각을 한 현각선사탑비의 비가 몸돌이 사라졌다는 것에 아쉬움이 더한다.



머릿돌인 이수에는 모두 여덟 마리의 용이 조각되어 있다. 밖을 바라보는 용들은 뿔이 없어 해괴한 모습이다. 용의 발은 맹금류의 발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가졌다.

국보 2점과 함께 연곡사의 보물 중 하나인 현각선사의 탑비. 고려 초기에 형성이 된 이 거대한 조각품이 이렇게 몸돌을 잃은 체 서 있다는 것에 대해, 새삼 우리 문화재의 아픈 과거에 대한 반성을 해본다. 전국에 이렇게 비문이 사라진 문화재가 곳곳에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알게 모르게 문화재의 훼파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도대체 반성이라고는 할 줄을 모르는 민족이란 생각이다.


 이질감에 의해서 부수어지고, 거기다가 행정당국에 의해서 나 몰라라 식의 훼파까지 이어진다. 언제까지 말로만 떠드는 문화재보호에 문화국가임을 주절거릴 것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가슴이 아프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2에 소재한 사적 제104호 ‘황산대첩비지(荒山大捷碑址)’ 고려 말에 이성계가 황산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이곳에는 1573년에 다시 만든 비가 있는데도, 대첩비지라고 한 것은 두 가자의 이유가 있다. 그 첫째는 이곳에 비만 있던 것이 아니라, 보호각과 외삼문, 그리고 비를 보호하던 별장청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이 추론을 할 수 있다. 처음에 역사적으로 유명한 싸움인 황산전투의 승리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조선조 선조 10년인 1577년에 대첩비를 세웠다. 그 후 현종 8년인 1677년에 보호각을 세우고,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보호각을 고쳐지었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대첩비가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이 파괴된 비를 ‘파비각’을 지어 보관하였기 때문에, 원래의 비가 사라져 대첩비지라고 볼 수도 있다.



조선 개국의 태동이 된 황산전투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이 비석을 새겨 자시 세울 때, 원래의 좌대인 귀부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1973년에는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과 홍살문, 삼문과 담장 등을 새로 조성을 하였으며, 파비각 등을 조성하여 일제에 의해 파손이 된 원래의 대첩비를 보관하고 있다.

운봉읍 화수리를 찾아갔다가 들려 본 대첩비지. 이곳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성계는 전주 이목대에서 전주 이씨 문중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은연중에 비친다. 결국 이 황산의 전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한 곳이니 역대의 왕들이 이곳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선조의 명에 의해서 대첩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비 받침인 귀부, 정말로 기이하네.

대첩비를 돌아보는데, 그 비를 받치고 있는 귀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귀부를 제작한 것일까?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오면서 귀부의 형태는 많이 달라진다. 신라 때까지만 해도 거북의 형태를 본 딴 귀부가 성행을 하였으나, 고려에 들어오면서 머리는 용에 몸이 거북이인 형태로 변화가 되었다.

그런데 이 귀부는 도대체 지금까지 보아오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한 나라를 태동하게 한 전투지에 세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듯한 이유이다. 이 귀부를 보면 고려시대의 귀부와는 또 다른 힘이 느껴진다. 머리 부분은 용의 머리인 듯 뿔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있다. 그런데 그 뿔 속이 비어있었던 것처럼 구멍이 나 있다.




용의 발을 가진 귀부와 콧구멍의 비밀

거북이 등의 문양은 같으나 그 다리부분을 보고는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일반적으로 귀부의 머리 부분이 용이라고 해도, 다리는 거북이의 다리를 조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지만 이 거북이의 몸은 다리가 용의 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뒤로 돌아보니 정말로 혀를 찰만큼 대단한 조각이다.

앞뒷발은 모두 용의 비늘로 덥혀있다. 그런데 뒷발을 보니 안쪽 발가락 하나가 위로 솟아있다. 왜 이렇게 발가락 하나만을 위로 추켜세웠을까?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니 그곳은 나란히 있다. 이렇게 추켜세운 발가락 하나가 이 조각이 어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입모양도 특이하다.




입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콧구멍이 있던 곳이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안이 움푹한 것을 보면, 콧구멍 안이 비어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어떻게 돌 안을 이렇게 작은 구멍으로 파낼 수가 있었을까?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는 대첩비의 귀부. 1시간여를 들여다보았지만, 결론을 내지 못하고 길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 조상들의 예술세계에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을 하면서.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344-1에 가면 사적 제104호인 황산대첩비지가 있다. 솟을대문으로 마련한 삼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대첩비가 서 있다. 좌측으로는 사적비가 우측에는 파비각이 보인다. 이 사적지는 고려 말 우왕 6년인 1380년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이성계를 대장군으로 한 고려군은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황산대첩에서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우두머리를 잃은 왜구를 고려군이 몰아쳐 완전히 섬멸하였다. 이곳에서 승리를 한 이성계는 한양으로 돌아가던 길에 전주 이목대에서 잔치를 베풀고, 나라를 일으킬 의중을 보였다.


파비각(破碑閣)에서 분노를 느끼다

일본으로서는 이 황산의 대첩비가 상당한 수모였을 것이다. 그러다가 보니 이 비를 놓아들 리가 없었던 것. 선조 때 개국시조인 이성계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대첩비를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에서는 비문을 쪼고 비신을 파괴하였다. 방치가 되어있는 대첩비를 1977년에 수습을 하고 비각을 세웠다.

파괴된 비는 몇 조각이 나 있다. 그리고 비문에 새겨졌던 글은 모두 쪼아 알 수가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렇게 소중한 역사의 기록을 망쳐놓은 일본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 이런 패악을 저지르고서도 반성은커녕, 아직도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면서도 이 나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조각이 나버린 황산대첩비. 일제는 비를 이렇게 파괴했다.

울분은 극에 달하고

대첩비지를 나와 담을 끼고 돌아가니 전각이 보인다. 안에는 편편한 바위가 있고, 그 위는 축대를 쌓았다. 이 전각을 ‘어휘각’이라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한 후, 다음에 본 석벽에 8원수 4종사관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황산대첩의 승리는 자신의 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승전을 적은 비를 모두 쪼아내 무참하게 훼손을 했다.

이 어휘각의 안에 있는 바위벽의 아래편을 보면 글이 써졌을 것 같은 공간이 보인다. 그런데 그 부분이 심하게 훼손이 되어있다. 600여년이나 잘 보존이 되어있던 이 글씨를, 1945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인해 훼손을 시켰다는 것이다. 일제는 이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글씨를 모두 쪼아버렸다고 한다.

우리의 승전의 역사를 기록한 대첩비. 그것을 모두 훼손한 일제의 만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일본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수많은 문화재를 수탈하고도 돌려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일본. 그러한 나라에 대해 언제나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 도대체 우리 선조들의 기개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오늘 황산대첩비지에서 본 파비와 훼파된 성지를 바라보면서, 이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수탈해 가고,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 했던 책임을 물어야 할 때란 생각이다. 그리고 당당히 우리의 문화재를 돌려달라고 요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이 민족의 상처에 대한 보상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찾는 이 없는 황산대첩비지를 우리민족의 기개를 찾을 수 있는 교육장으로 활용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만이 또 다른 문화말살을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