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탱자가 익어가는 가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을 가? 이상한 사람이구만’ 그래 난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려, 안 가고는 견디질 못한다. 나하고 순흥은 아무런 관계도 없다. 순흥은 경북 영주시에 속한다. 순흥에는 유명한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 순흥을 왜 술병을 들고 찾아갈까?

소수서원은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다.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내가 가을마다 찾아가는 곳이 있다.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다. 이 계절, 탱자가 익어가는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가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서 죽어간 금성대군 때문이다.


32세에 처형이 된 불귀의 원혼

금성대군은 이름이 유이며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다.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대군으로 봉해졌다.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한다. 그러나 수양이 왕위에 오를 야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한다.

단종 3년인 1455년 금성대군은 모반을 했다는 협의를 뒤집어쓰고, 현 경기도 연천인 삭녕으로 유배가 된다. 세조 2년인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위리안치, 그 통한의 형벌이여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아마도 처음 이곳 순흥에 온 금성대군은 단순한 안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이곳 순흥에 바로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남아있다. 위리안치는 그야말로 인간을 말려죽이기에 적당한 형벌이다. 장정의 키보다 높은 돌 웅덩이 안은 지름이 2m가 조금 넘을만한 둥근 형태이다. 그 안은 맨바닥이고, 어디 편하게 기댈 수조차 없다. 사방이 모두 돌로 쌓여 있으니, 벽에라도 기댈라치면 배기기 일쑤이다.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어디 한 곳 발을 뻗고 편히 몸을 누일만한 곳이 없다. 지붕은 비를 피하도록 덮었다고 하지만,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올 것이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촘촘히 심어 놓은 탱자나무 울타리를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가시에 온 살이 찢겨도 빠져 나가지를 못한다. 나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뿐이다. 그곳은 더욱 나갈 수가 없다. 결국 처형을 당할 때까지, 그 습한 웅덩이에서 발 한 번 제대로 뻗지 못하고 고통을 당해야만 한다. 그것이 위리안치이다.

오늘 이 술 한 잔으로 몸이나 녹이시오.

그래서 가을이 되면 순흥을 간다. 술 한 잔 따라놓지 않으면 죄 없이 역사의 제물로 희생이 된 분에게 너무 죄스럽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처음으로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찾아간 곳에서, 역사의 아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월에 이곳을 다시 찾았다. 술 한 병을 사들고. 그 뒤 10월이면 이곳을 간다. 요즘 사극이 인기를 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재미로 보는 사극 뒤편에는 이런 엄청난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 것일까?


그저 술 한 잔 따라놓고, 넋두리를 해댄다. 세상을 달라졌다고 해도, 아직 대군의 통한의 아픔을 따라 사는 자들은 그치지를 않았노라고.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막걸리 한 병 사들고, 순흥으로 길을 나서야겠다.


탱자나무의 수령이 550년이라면 ‘엄청 나네.’라고 말할까? 아니면 ‘꽤 오래 되었네’라고 말을 할까? 그러나 탱자나무가 550년이라는 세월을 살았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천연기념물 제78호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수령이 400년, 제79호인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가 400년인 점을 보면, 천안향교 앞의 탱자나무는 그 수령상으로는 으뜸 일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탱자나무가 주로 영, 호남지방에 많이 분포하며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탱자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된다. 탱자나무의 줄기에는 무수한 가시가 돋아 있어, 과수원의 울타리용 등으로 적합하다.


탱자나무 하나로 글을...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딴 분들은 여러 가지를 엮어 한 개의 글을 올리는데, 왜 꼭 하나만을 갖고 글을 쓰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웃고 말았다. 내 딴에는 꼼수일 수도 있다. 물론 주변에 많은 것을 엮어 글을 쓰면, 나도 편해서 좋기는 하다. 그만큼 글을 쓸 소재가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렇게 볼 것은 아니란 생각이, 하나만 갖고도 소개를 하자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작 한 가지 소재로 글을 쓰는 이유는, 현장을 다녀야 하는 나로서는 묶어서 글을 쓴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답사를 나가 1박 2일이나 2박 3일을 돌아다니면서 들고 온 자료가, 며칠 만에 밑천이 떨어진다면 어떻게 그 다음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다.


보호수로 지정딘 탱자나무. 밑동을 보니 이 나무의 수령이 보인다.

550년 한결같은 탱자나무

수령이 550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 온 나무는, 천안시 유량동 190에 소재한 충남 기념물 제110호인 천안향교 입구 우측에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인 탱자나무들은 그 높이가 3m 정도인데 비해, 이 나무는 높이가 7.5m에 둘레가 1.3m나 되는 거목이다. 현재 충남 도지정 제110호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다.

향교를 찾아갔다가 문이 닫혀있어, 담 밖을 맴돌다가 우연히 만난 탱자나무다. 이럴 때 ‘수지맞았다’라고 하는 것인지. 나무의 밑동을 보니 나무가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저기 쇠기둥을 받쳐 놓은 것은 그만큼 가지가 넓게 퍼졌기 때문이다. 550년이란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열매를 많이 달고 있다. 간수를 잘했는지 잎과 열매가 튼실해 보인다.



굵은 가지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이고, 잔가지들은 춤을 추는 듯하다. 세월의 춤을...

제멋대로 퍼져나간 줄기는 오랜 연륜을 말하는 듯, 여기저기 굵은 홈이 파여져 있다. 구불거리면서 자란 줄기가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다. 그 오랜 세월을 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으니, 나무 스스로가 주변 환경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법을 익히지나 않았을까? 그 앞에 서보니 한낱 인간이라고 떠들어 댄 것이 부끄럽기만 하다.

탱자나무에게서 배우는 세상을 사는 지혜는 무엇일까? 아마 변함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사는 인간들을 비웃는 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구불거리는 가지들이 마구 웃는 것만 같다. ‘자연을 섬기지 못하는 인간들이 가소롭다’는 그런 웃음을. 오늘 이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세상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거친 풍파를 다 이겨내는 것만이 온전한 삶이라는 사실을.



오랜 세월을 지냈으면서도 아직도 많은 열매를 달고 있다. 자연은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나간다.


일반적으로 탱자나무의 키는 보통 3m 정도 자란다. 탱자나무는 줄기와 가지 곳곳에 커다랗고 뾰족한 가시들이 달려 있다. 이 가시는 단단해 촘촘히 심으면 아무도 근처에 얼씬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남쪽 지방에서는 탱자나무를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있다. 탱지니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일부의 학자들은 한국에서도 자생해왔다고 주장하지만, 오래 전 중국에서 전해졌다는 견해가 많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에 소재한 장수황씨 종택,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면서 좌측으로 보면 탱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탱자나무는 수령이 400년이 지난 것으로,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135호이다.


황희정승의 후손이 심은 탱자나무

이 나무는 일반적인 탱지나무보다 생육이 좋다. 높이는 6m에 이르고, 나뭇가지는 동서로 10,8m, 남북으로는 11,2m나 되며 수관을 자랑하고 있다. 이 탱자나무는 사실은 두 그루이다. 마치 한 그루가 자라난 것 같지만 밑 부분을 보면 두 그루가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나무의 수령이 400년이나 되었다고 보는 것은, 황희정승의 7세손인 칠봉 황시간(1558 ~ 1642)이 이곳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면서 심었던 것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돌아보니 밑 부분은 수술을 하였다. 강화 등지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탱자나무가 있기도 하지만, 전국을 돌아보아도 이렇게 생육이 좋은 나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나무는 두 그루의 나무가 붙어 몇 개의 가지를 위로 뻗고 있다. 밑 부분은 많이 파여 수술을 했으나, 가지 등을 보면 아직도 건재하다.




탱자나무를 보면 마음 아픈 사연이

푸른 나뭇잎들이 달려있는 나무에는 열매도 보인다. 나무의 크기답게 긴 가시들이 사람을 위협을 한다. 이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 아픈 기억이 새롭다. 예전 경상북도 영주시를 답사할 때인가 보다. 소수서원 건너편에 보면 금성단이 있다. 이 금성단을 지나 마을 안길로 들어가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곳이 나온다.

위리안치란 형벌 가운데서도 가장 두려운 형벌로 알려져 있다. 신체적인 고통은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그 어느 것보다도 크다는 것이다. 인가도 없는 들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둔다. 구덩이는 돌로 둥그렇게 앃은 후 맨바닥이라, 사람이 재데로 앉아 있을 수도 없다. 물론 그 안에 갇힌 사람은 밖으로 나올 수가 없다. 그리고 주변을 바로 이 탱자나무로 두른다. 입구 한 편만 열어놓는데, 그곳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촘촘히 심어놓은 탱자나무는 틈이 없다. 나뭇가지를 벌린다고 해도, 그 가시들 때문에 손으로 잡기도 힘들다. 결국 사람도 없는 웅덩이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다. 탱자나무를 볼 때마다 금성대군이 갇혔던 위리안치지가 생각이 난다. 그 안에서 얼마나 몸부림을 쳤을까? 약재로 사용하는 탱자나무이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모진 나무가 될 수도 있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진다. 장수황씨 종택의 탱자나무는 사랑채와 사당 앞에 심겨져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같은 나무이면서도 어찌 전혀 다른 세상을 살고 있을까? 그것이 세상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 탱자나무를 보면서 가슴이 아프다. 미처 몰랐다. 이 나무 하나가 주는 아픈 기억이 그리 오래 갈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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