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큰 대궐 같은 집을 ‘99칸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99칸이란 궁을 뺀 일반 가옥에서는 가장 큰 집으로, 이런 큰 집을 가졌다는 것은 집 주인의 세도를 알만한 것이다. 한국민속촌 안에 가면 흔히 ‘중부지방 양반가’라는 22호 집이 있다. 이 집이 바로 99칸의 대명사처럼 불리고 있는 집이다.

‘99칸 집’이라고 부르는 이 가옥은 철종 12년인 1867년에 유학자인 이병진 선생이 건립하였다고 한다. 수원 화성내에 팔달산 아래 지은 이집은 (현 수원시 남창동 95번지 일대) 1973년에 원형 그대로 민속촌으로 옮겨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사당 앞에서 바라다 본 한국민속촌의 99칸 양반집



중부지방의 양반가옥을 대표해

이 99칸 집은 당시 중부지역 민간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 규모로 지어졌다. 우리나라의 전통 양반가옥을 대표하는 남창동 가옥은, 1910년대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근택(1865~1919)이 사용했던 집이기도 하다. 이 가옥의 사랑채는 지난 1950년 한국동란 때 9, 28 서울을 수복 후에는, 수원지방법원 지방검찰청의 임시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도 '여인천하' '대장금' '다모' 등 역사 드라마물 촬영지로 자주 이용되고 있으며, 민속촌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꼭 들리고는 하는 집이다. 남창동가옥을 보면 솟을대문을 둔 대문채, 줄행랑채, 바깥사랑채, 안행랑채, 안사랑채, 내당, 초당, 내별당, 큰사랑채, 외별당, 정각, 사당, 전통정원 등 큰 집 살림에 필요한 모든 공간이 규모 있게 갖추어진 전형적 대가이다.


22호 집인 수원 남창동 99칸 집의 솟을대문(위) 와 행랑채 앞마당


건물 전체에는 마루공간이 많이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굴뚝을 건물에서 떨어져 설치하여 난방의 효율과 함께 조형미를 살린 점은 전형적인 중부 상류층 가옥의 형식이다. 2월 18일 찾아간 이 99칸 집을 한 번에 소개하기는 어렵다. 모든 건물은 각각 독립건물로 구성되어 있어 몇 회로 나누어 소개를 하고자 한다.

바깥사랑과 행랑으로도 규모에 놀라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줄행랑이 좌우로 펼쳐진다. 우측의 행랑과 바깥사랑채 사이에는 후원인 뒤편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ㄷ 자로 된 줄행랑은 모두 19칸이며, 그 안에는 마굿간을 비롯하여 마부방, 측간, 하인방과 부엌, 곳간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이 대문과 연결이 된 줄행랑만 보아도 이 집의 규모가 짐작이 간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ㄷ 자로 꺾인 행랑채가 있다. 이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어 '줄행랑'이라고 부른다. 맨 아래는 큰 사랑이 있는 후원으로 나가는 문이다. 


바깥사랑은 이 집을 찾아 온 손님들이 머물거나 유숙을 하는 곳이다. 사랑채가 공간이 부족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는 이 바깥사랑은 다섯 칸으로 지어져 있으며, 후원으로 나가는 문을 사이에 두고 행랑채와 연결이 된다. 하지만 이 바깥사랑은 엄연히 독립된 공간으로, 행랑채와 구별이 되게 하였다.



바깥사랑채. 행랑채와 문을 사이로 이어져 있으며 손님들이 유숙하는 곳이다.



바깥사랑은 사랑을 바라보면서 좌측 두 칸은 방을 드리고, 두 칸은 대청마루이다. 그리고 우측 한 칸 역시 방을 드려 손님들이 유숙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바깥사랑과 줄행랑의 앞으로는 너른 바깥마당이 있으며, 중문채를 가기에도 거리가 상당하다.

양반집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수원 남창동 99칸 집. 독립적인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면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우리 고택의 전형적인 미를 갖추고 있는 집이기도 하다.


동영상 제작은 한국민속촌 답사에 동행한 '수원 씨티넷'의 김홍범 부장이 제작했다

전남 구례에 유명한 집을 들라고 하면 당연히 운조루일 것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사랑채에 붙어 있던 현판이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운조루란 명칭으로 부른다. 이 운조루를 다녀 온 것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나가는 도로 좌측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운조루는, 중요민속자료 제8호이며 토지면 오미리에 해당한다.

고택 기행을 하면서 많은 집들을 찾아다녔지만,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 것은 처음인 듯하다. 물론 일인당 1,000원을 받기는 하지만, 그 집의 가치를 돈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일 테고.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계시는 운조루는, 한 때는 우리나라의 최고 명당에 자리한 집으로 유명했다. 남한 3대 길지 중 한곳이라는 운조루. 금환낙지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는 이 집은, 조선조 영조 52년인 1776년에 당시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집이다.



T 자로 구성된 사랑채(위)와 대문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집

운조루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처음 질 때와는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18칸이나 되는 문간채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가운데 솟을대문을 둔 운조루는 좌우로 - 자형으로 길게 대문채와 행랑채가 자리를 한다. 이 대문을 들어서면 T자형으로 마련한 사랑채가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서 좌측이 큰사랑이고, 우측이 작은사랑이 된다.

운조루는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는 집이란 생각이다. 이집을 둘러보면 참으로 사람이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 작은 사랑에서 중문을 들어서려면 길이 비탈이 져있다. 혹여 그런 비탈에 사람이라도 다칠까봐, 널빤지를 이용해 비탈을 바로 잡았다. 중문 안을 들어서면 나무로 만든 통이 있다. 통 밑에는 한 사람이 먹을 만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기관을 장치했는데, 이 나무독이 바로 그 유명한 ‘타인능해’이다.



큰사랑의 툇마루와 괴임돌. 작은 사랑에 비탈길을 바로잡는 널판(가운데)와 없는 사람들을 구호하는 쌀독인 타인능해

타인능해는 쌀 두가마가 들어간다고 한다. 이곳에 쌀을 넣어놓고 양식이 없는 사람들이 와서 쌀을 가져가도록 만든 것이다. 나눔의 미학을 이루는 곳 운조루. 민도리집으로 지은 이집은 사랑채와 안채의 지붕이 연이어져 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

운조루의 솟을대문 위에는 호랑이 뼈를 걸어놓았다. 아마 집의 용맹함을 알리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집안에서 태어나는 남자들이 호랑이와 같은 용맹을 떨치기를 바라서 였거나. 큰사랑채는 앞에 놓인 툇마루가 이집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듯, 나무마루를 두텁게 놓고, 마루를 받치고 있는 고임돌도 각이 진 것을 사용하였다. 사랑채 끝에는 개방을 한 누정을 만들어 멋을 더했다.


대문 위에 걸린 호랑이 뼈(위) 와 안채

중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안채는 ㄷ 자형이다,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광이 있고, 방과 대청이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안채의 부엌 쪽은 이층으로 꾸며놓아 멋을 더했다. 수많은 한옥을 찾아다녔지만, 운조루 만큼 멋을 보이는 집은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 다락방의 형태로 꾸며진 부엌의 위에도, 난간을 둘러놓아 밋밋함을 피해 멋을 부렸다.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면 운조루의 건축기법이 색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명당에 집을 지었다고 해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 명당도 퇴색이 되는 것일까? 집안의 내력을 들어보면 아픔이 있는 집이다. 큰사랑 뒤편에 있었다는 별당은 사라지고, 이제는 연세가 많은 노마님이 집을 지키고 있다.


광채와 부엌을 모두 이층으로 꾸며 놓았다. 운조루에서 볼 수 있는 멋이다.

한때는 사랑 누정에서 긴 장죽을 물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노심초사했을 이 운조루의 주인은, 이야기로만 남아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이곳을 들리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갈 것이니, 아직도 운조루의 명성은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