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과 8, 인계동 청소년문화센터 광장에서 마을 꽃이 피다라는 주제로 열린 2014 수원 마을축제에는 마을만들기 추진단의 부스를 비롯하여, 대추동이 문화마을 추진단, 칠보산마을연구소, 매탄1동 르네상스협의회, 권선예절원, 청솔 한라비발디 마을가꾸기 등 각 마을에서 준비한 24개 부스가 설치되었다.

 

마을만들기 부스를 설치한 한편으로는 알뜰시장을 차려놓아 어린이들부터 청소년들이 자신이 들고 나온 물건들을 진열해 놓았다. 각 부스에서는 자신들의 마을이 자랑하는 각종 먹거리들과 차, 세류2동 치매미술치료협회, 금호동 칠보산 도토리교실, 화성1동의 굿 프랜드 동아리 등 각종 자랑거리를 들고 나왔다.

 

 

오늘 주말을 맞이하여 많은 분들이 아침부터 이곳을 찾아주셨는데, 날도 갑자기 쌀쌀해 진 듯하고 접근성이 행궁광장보다 떨어져서인가 관람객들이 예전보다 못한 것 같아요. 지난해는 생태교통 수원2013과 함께 해서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는데요. 그래도 오후가 되면 많은 분들이 찾아올 것으로 기대는 하고 있어요.”

 

8일 오전 마을축제장에서 이곳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열심히 물건을 포장해주고 있던 한 마을 관계자의 말이다.

 

칠보산 마을연구소 무공해상품 들고 나와

 

칠보산 아래 마을인 금호동 칠보산마을연구소에서는 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감국으로 만든 국화주와 감국차, 그리고 농산물과 무공해 쌀 등을 들고 나왔다. 칠보산 마을연구소는 마을만들기를 가장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는 곳 중 한곳이다.

 

 

저희 칠보산 마을연구소에서는 저희들이 직접 키운 국화를 이용한 술을 갖고 나왔어요. 이 술은 자연적으로 키운 국화를 이용해 정종으로 담군 술입니다. 한 마디로 약술이죠. 그리고 저희가 400평의 논을 임대해 농사를 지어서 올해 백미와 현미 440kg을 생산했어요. 그것을 1kg씩 담아서 판매를 하고 있고요.”

 

칠보산 마을연구소 이계순(, 41. 금호동 LG빌리지) 소장은 100% 무공해 농산물로 누구나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먹거리라고 자랑을 한다. 칠보산 마을연구소에서는 칠보산마을 옛이야기지도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 지도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구전으로 전해준 마을의 전설인 칠보산의 황금닭’, ‘자목마을 장사’, ‘장수발자국바위등 마을이 전설과 지명유래 등이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다.

 

 

칠보산마을 건강한 먹거리 공동체 칠보 꽃 밥상설립할 터

 

칠보산마을연구소에서는 칠보산마을 건강한 먹거리 공동체인 협동조합 칠보 꽃 밥상을 설립한다고 한다. 이는 건강한 농민과 건강한 흙, 건강한 아이들, 그리고 건강한 경제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저희가 설립추진을 하고 있는 칠보 꽃 밥상은 마을의 논과 밭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활동으로 건강한 흙과 건강한 이웃을 만나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이 친환경밥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건강한 먹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금호동에는 수원에서 유일하게 아직도 정미소가 있는 마을입니다. 농사를 지어도 저희가 직접 도정을 해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나 믿고 저희 식자재를 이용하셔도 괜찮습니다. 한 마디로 얼굴이 있는 로컬푸드죠.”

 

이계순 소장은 앞으로 칠보 꽃 밥상에서 생산하는 모든 식자재는 바로 칠보마을을 대표하는 것이고, 건강한 농민이 건강한 밥상을 만든다고 한다. 수원 마을만들기는 좋은 환경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먹거리를 이용해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칠보산마을연구소에서 하는 꽃 밥상에 거는 기대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소나무가 춤을 춘다고 하면 남들은 조금 정신이 빠진 사람이 아닌가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권선구 호매실동 629-2에 가면 춤추는 소나무를 만날 수 있다. 보호수호 지정되어 있는 이 소나무는 수령이 230년 정도가 된 우리 소나무인 육송이다. 19821015일 경기-수원-20으로 보호수 지정을 받았다.

 

소나무는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종으로 높이는 20~35m에 이른다. 겨울에도 항상 푸른빛을 유지하는 상록수로 그림, , 노래 등에 소재로 우리에게 친숙한 식물이다. 껍질은 거북등처럼 세로로 넓게 갈라지며 줄기 밑은 회갈색이고 윗부분이 적갈색을 띤다. 바늘잎은 8~9cm 길이로 두 개가 한 묶음이 되어 가지에 촘촘히 붙는다.

 

나무줄기가 붉다고 하여서 적송(赤松)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로 내륙 지방에서 자란다고 육송(陸松)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외에도 잎이 다른 나무에 비해 연하다고 하여서 여송이라고 하거나 여인의 지태를 닮았다고 해서 여송(女松)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소나무들

 

우리나라에는 많은 소나무들이 천연기념물이나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그만큼 전국적으로 소나무들은 다양하게 분포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소나무의 품종에는 나무줄기가 곧추 자라는 금강소나무, 가지가 밑으로 처지는 처진소나무, 줄기 밑에서 많은 가지가 갈라지는 반송 등이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 중에 그동안 답사를 하면서 만난 소나무는 보은 속리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 청도 운문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180), 속초 설악동 소나무(천연기념물 제351),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천연기념물 제354), 이천 도립리 반룡송(천연기념물 제381), 장수 장수리 의암송(천연기념물 제397), 울진 행곡리 처진소나무(천연기념물 제409) 등을 만나보았다.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소나무

 

17일 칠보산을 오르기 전에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았다. 그런데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소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수원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나무가 없기 때문에 그 나무의 생김새로 보아 보호수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소나무가 있는 곳으로 먼저 가보았다. 높이 15m 정도에 밑동둘레가 2.5m 정도이다.

 

껍질은 붉은색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색을 보이는 나무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거기다가 생육상태도 양호하다. 수령이 짧아 천연기념물이 지정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정도로 멋들어지게 잘 자란 소나무이다. 앞으로 다가가 보기만 해도 절로 감탄이 쏟아진다. 이런 정도의 소나무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20년 넘게 전국을 다니면서 문화재 답사를 하는 동안 많은 천연기념물과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나무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 2년 전인가 경북 문경 동로면에서 충북 단양군 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다가 동로면 적성리 965번지 도로변에, 수령 300년이 지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보호수로 지정이 되어있는 이 소나무가 서 있는 곳을 무송대(舞松臺)’라고 부른다. 춤을 추는 소나무가 서 있다는 곳이다. 그 나무와 비교해도 오히려 더 아름답게 가지들이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그저 앞에 서서 감탄만 할뿐 딱히 표현을 할 수가 없다.

 

옥에 티, 소나무 보호책 안에 무성한 잡풀더미

 

한참이나 소나무를 바라보고 감탄을 하고 있는데 눈에 띠는 것이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 주변을 둘러서 보호책을 설치했는데 그 안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옆에는 몇 기의 묘가 보이는데 주변을 말끔히 정리했기에, 보호수 철책 안에 잡풀들이 눈에 더 거슬려 보인다. 여름철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곳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멋들어지게 춤을 추고 있는 보호수 한 그루. 나무줄기에 외과수술을 한 자국만 보아도 마음이 짠한데, 거기다가 잡풀까지 무성하게 자라나있는 것을 보니 더 마음이 아프다. 저렇게 잡풀들이 자라나 있어 혹 소나무의 생육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까? 그저 한 시간 정도면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텐데. 앞으로는 답사를 다닐 때 낫이라고 한 자루 들고 다녀야 할까보다.

 

칠보산(七寶山), 수원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239m의 높지 않은 산이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으로 불렸다고 하며, 화성지에는 칠보산을 화산의 주맥으로 기술하고 있다. 칠보산은 원래 여덟 가지 보물이 있다고 하여 팔보산이었으며, 그 여덟 가지의 보물은 산삼, 맷돌, 잣나무, 황계수탉, 범절, 장사, , 황금 닭이 있었다고 한다.

 

그 여덟 가지 보물 중에 하나인 황금 닭을 가져가버려 칠보산으로 변한 것이라고. 이 칠보산에는 용화사라는 크지 않은 절이 자리하고 있다. 칠보산을 오르는 등산로 중 제2코스인 용화사 길은 산중의 정취를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원시 권선구 호매실동 905에 자리한 용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용주사의 말사이다.

 

 

용화사는 절이 언제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또 누가 중창을 한 것인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다만 구전에 의하면 용화사는 조선조 후기에 세워진 절이라는 것이다. 이 절의 대웅전에는 마애불을 주물로 모시고 있는데, 그 마애불의 형태나 가장 오래된 전각인 대웅전을 보면 200년 정도 지난 절로 추정된다.

 

지방 장인의 솜씨로 보이는 투박한 마애불

 

17, 칠보산으로 길을 잡았다. 칠보산 등산로를 몇 곳 돌아보고 난 뒤 당수동 시민주말농장도 함께 돌아볼 생각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용화사는 칠보맷돌화장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도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다. 절 입구는 공사를 하느라 부산한데 그곳을 피해 대웅전으로 향했다.

 

 

대웅전은 처마가 약간 뒤틀린 듯하다. 주초를 보니 잘 다듬어진 원형 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주초의 형태로 보아 이 대웅전이 지어진 것은 100년이 조금 지났을 듯하다. 이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정면에 마애불 한 기가 놓여있다. 선주형으로 다듬은 돌에 마애불을 선각했는데 조금은 투박한 형태이다.

 

이런 형태로 보아 이 마애불도 조선조 후기에 지방 장인에 의해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선각이 된 마애불은 육계가 크고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눈은 좁고 길게 표현했으며 입이 작은 편이다. 전제적으로 보면 잘 조형되지는 않았지만 깊게 판 선각으로 인해 무게가 있어 보인다.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제작연대 알아보았으면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는 우측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법의는 양 어깨에서 흘러내렸는데 가슴이 깊게 파여 있다. 하반신은 가려져 있어 정확한 형태를 알아볼 수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마애불을 조성한 바위의 크기로 보아 좌상으로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 주변에 두광은 후에 누군가에 의해 다시 조성된 듯 둥그렇게 파 놓았다.

 

목에는 삼도를 표현했는데 삼도치고는 그 간격이 너무 넓어 이상하게 보인다. 오른 손은 가슴께로 들어 올렸으며 왼손은 정확하게 알아볼 수가 없다. 용화사 종무소에 들려 혹 연대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해서 물어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는 대답이다.

 

 

비지정문화재이긴 하지만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마애불이고 보면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조성연대라도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투박하게 조성은 되었지만 나름 힘이 있어 보이고 아직은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으로 답사를 다니다가 보면 가끔은 이런 비지정 문화재를 만나는 일이 생긴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답답하기 일쑤이다.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를 하고 싶지만, 알고 있는 식견이 짧은 것을 어찌하랴. 그저 답답한 마음을 털어버리려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려 무능함을 다시 탓할 수밖에.

 

칠보산 무학사 태고종 대종사 혜성 큰스님을 뵙다

“저희 큰스님께서는 출가를 하신 후에 평생 남을 위해서 살아오신 분이십니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이시죠. 지금까지도 40년이 넘는 세월을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살아 오셨습니다.”

칠보산 아래 금곡동 무학사 주지이신 혜성 큰스님. 스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뜸 ‘아! 그분’하고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1969년 태고종에 입문을 하신 후, 1969년 12월 칠보산 중턱에 무학사라는 절을 지으셨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남을 위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혜성 큰 스님의 이러한 남을 위한 삶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큰스님 어째 그렇게 남을 위해서 사시나요?”

참으로 큰스님께 드려서는 안 될 우문(愚問)을 드린 셈이다.

 

어려서부터 고통 받는 사람들을 두고 볼 수가 없어

 

“아마도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것이 이유인 듯합니다. 조국의 분단의 비극과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주변을 돌아보니, 저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이 보였어요. 그래서 집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하게 되었죠.”

 

사실 알고 보면 이렇게 남을 위해 봉사를 하고,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는 것은 집안의 내력이다. 혜성 큰스님의 조부는 8,15 광복 후에 현 화성시 매송면(당시 수원군)의 초대 면장을 지내셨다. 1958년 당시 자비를 들여 어천수리조합이라는 것을 조성해, 수리조합장을 역임하면서 농민들에게 물을 대어주었다고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당신이 갖고 있는 수만 평에 달하는 농토를 농민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매송면, 남양면, 비봉면 일대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분들은, 조부의 공을 기억하고 있다고. 조부의 뒤를 이어 부친도 3대 면장이었다고 한다. 부친 역시 남을 돕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사셨다는 것. 어려서부터 그런 선조들의 삶을 보고 자라난 혜성 큰스님께서도, 자연이 남을 돕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손에 무엇을 쥐고 나오나요? 아니죠. 빈손으로 나옵니다. 본디 세상에 내 것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마치 내 것 인양 알고 있기 때문에 분란이 오고 화가 미치는 법이죠.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100억대에 달하는 땅도 쾌척하신 혜성 큰스님

 

“큰스님, 그 많은 재산을 어떻게 그렇게 기부를 하셨습니까?”

질문마다 참 우문을 한다는 생각이다. 이미 혜성 큰스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을 뛰어넘어 피안에 살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그럼에도 속된 질문을 하고 말았다. 혜성 큰스님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우시면서

“본디 내 것이 없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리고 그런 재산을 갖고 있으면, 이다음에 우리 문도들이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팔요 하신 분께 드려야 그 분들이 또 좋은 일을 하시는 것이죠.”

혜성 큰스님은 2012년에 1차로 시가 약 15억 원에 달하는 땅 3천 평을 사회에 헌납하셨다. 그리고 이어 남들이 금싸라기 땅이라고 하는, 시가 100억 원에 달하는 땅마저 노인복지발전을 위해 기부를 하셨다는 것이다.

“그 때는 그렇게 큰 돈 인줄 몰랐어요. 기부를 하고보니 시세로 따져 그렇게 큰 금액이라는 겁니다.”

얼굴 가득 웃음을 띠신 혜성큰스님은, 세상에 태어나 꼭 해야 할 일이 바로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를 하신다.

 

 

세 번이나 총무원장의 소임을 맡아

 

“우리 큰스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남들은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총무원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셨고, 입적하신 큰 스님들도 받지 못하는 대종사 칭호를 살아생전에 받으신 분이십니다. 이런 일은 모두 그동안 큰스님께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해 오셨는가를 알 수 있는 일이죠.”

한 자리에 앉아 대화를 하시던 처사님 한 분이 말씀을 하신다. 그런 말씀을 듣는 혜성 큰스님은 손 사례를 치신다.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그저 제가 할 몫을 다했을 뿐이죠. 제가 너무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기가 송구해, 몇 번을 고사를 하기도 했죠. 지금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혜성 큰스님은 1989년 대한불교 법상종 총무원장. 1989년 한일불교 문화교류 한국대표. 1991년 남북불교도 한국대표. 1995년 한국불교 미륵선종 총무원장. 1997년 한국불교 법왕종 총무원장. 2011년 대만국제불교 재승대회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셨다, 2013년에는 한국불교 태고종에서 큰스님들이 타계 후에야 받는다는 ‘대종사’ 칭호를 생존에 받으셨다.

 

 

30년 넘는 세월을 이어온 장학사업과 노인복지사업

 

혜성 큰스님께서는 남을 위하는 것이 몸에 배셨다. 1980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장학 사업을 하고 계시다. 언제나 소문 없이 하시기 때문에 아직도 큰스님의 소문이 나지 않고 있단다. 큰 스님의 장학 사업은 칠보초등학교를 비롯해 서호, 매송, 송라, 호매실, 탑동, 금호, 능실초등학교 등 졸업식 때만 되면 어김없이 이어지셨다. 미래에 이 나라를 짊어질 동량이 될 어린이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아 부으신 것.

 

그런가하면 노인복지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고 계시다. 1980년부터 어르신들을 위한 경노사업도 이어오고 계신 것. 매년 칠보초등학교 강당에 500~600명의 어르신들을 초청해 식사를 대접하시고 계시기도. 또한 (사)대한노인회 금호동 협의회 23개 회장단에게 월례회마다 점심식사대접을 하셨다. 그 외에도 45개 통장님들에게도 많은 위로와 함께 지원을 하기도.

 

현재 혜성 큰스님께서는 사단법인 사회복지발전협의회 이사장님으로, 하루 24사간을 쪼개, 봉사 일에 전념을 하고 계시단다.

 

“큰스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법문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없는 시간을 쪼개어 만나주신 스님께 법문을 부탁드렸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남에게 의지해서 살면 안 됩니다. 자신이 노력을 해서 얻은 수익 중, 단돈 1,000원이라도 남을 위해 쓸 수만 있다면, 굳이 복지라는 것을 정부에서 할 필요가 없죠. 그저 사람은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하기에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니 내려놓아야죠. 그 마음만 갖고 있다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도래할 것입니다”

 

대담을 마치고 포행을 나가시는 혜성 큰스님의 뒤로 바람 한 점이 따라간다. 아마 저 바람도 큰스님 마음이 닮고 싶었나보다.

 

칠보산 무학사. 초행길이라 낯이 설다. 무학사 큰스님이신 태고종 대종사이신 혜성스님을 찾아뵙기 위해 칠보산으로 향했다. 지도에는 칠봉산 전망대로 오르는 7번 등산로에 무학사가 있는 것으로 표시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 갈림길인 학교 앞길로 들어서니, 이런 세상에. 길이 막혀있다.

 

다시 돌아서 여기저기를 헤매기 30여 분. 겨우 묻고 또 물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비포장도로인 숲길은 등산로인 듯하다. 걸어 오르면 딱 좋은 길을 약속시간 때문에 차를 몰고 오르려니 숲에 미안한 생각이 든다. 저 자연 속에 그저 큰 호흡을 한 번 하고 걸어 오르면 좋았을 것을.

 

 

태고종 대종사 혜성스님이 출가하여 창건한 무학사

 

차로 비포장 숲길을 오르다가 보니 칠보산 무학사란 안내판이 보인다. 혜성스님이 1969년에 출가를 하여 태고종에 입문을 하신 후, 그 해 12월부터 이곳 칠보산 전망대가 있는 봉우리 중턱에 무학사를 창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산비탈을 정비해 전각을 마련하였기 때문에, 크지 않은 전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무학사는 아직도 불사중이다. 작은 중장비 한 대가 경내에 서 있고, 불사를 하고 있는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종무소를 찾아가보아도 기척이 없다. 전각 여기저기를 돌아보지만, 어느 곳에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경내에 차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어디 출타 중인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경내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산을 깎아 작은 전각들을 여기저기 마련한 까닭에 전각들이 크지 않다. 절이 중심인 대웅전이라야 정면 두 칸이다. 견성문을 들어서 산신각으로 오르는 길목 좌측에는 토굴법당 입구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대웅전이 서 있다. 대웅전 옆으로는 살창을 낸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또 관세음보살을 모신 듯하다.

 

일제 때 조성한 채광 굴에 마련한 토굴법당

 

대웅전 뒤편으로는 산신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올라 산신각을 돌아본다. 그리고 산신각 뒤편을 보니 커다란 바위 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자연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 얼마의 세월을 저렇게 바위 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것일까?

 

갑자기 사람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드는 소리가 난다. 칠보산 등산로 중 한 곳인 무학사 아래편에 마련된 쉼터에 4~5명의 여자들이 피곤한 다리를 쉬며 떠들고 있는 중이다. 참 교양머리 없다는 생각을 한다. 참선을 하는 도량에서 저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 대고 있으니 말이다.

 

 

산신각을 내려와 대웅전 곁에 있는 토굴법당 안으로 들어가 본다. 갑자기 한 여름의 더위를 가시게 할 만한 서늘한 바람이 굴에서 불어온다. 바닥은 습기가 있어 축축하다. 머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세 분의 부처님을 굴 안에 모셔놓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토굴법당은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철을 캐느라 뚫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자연 속에 머무는 절 무학사

 

혜성스님은 이 채광 굴을 토굴법당으로 마련하고자 몇 년간을 더 파냈다고 하신다. 그리다가 이곳에서 물길이 터져 관을 묻고 그 물을 식수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여기를 토굴법당으로 조성했는데 물이 흘러 질척거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수관을 묻었더니 기껏 파놓은 천정이 다시 낮아진 거예요. 그래서 다시 몸을 낮추고 드나들었죠. 아마도 부처님의 뜻인가 봐요. 겸손하게 살라는”

 

 

이곳 말고도 또 한 곳의 토굴법당이 있다. 한참을 그렇게 경내를 돌아보아도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함께 동행을 한 일행인 그 밑에 기척이 있다고 한다. 몇 번이나 ‘계세요?’를 외치고 나서야 겨우 대답소리가 난다. 무더운 여름날 낮잠이라고 즐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큰스님을 뵈러왔다고 하니, 여긴 윗절이고 아래편에 큰절로 가보란다. 큰스님은 그곳에 계시다고.

 

길을 물어 힘겹게 찾아온 칠보산 무학사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 마음이 바빠 미처 느끼지 못하고 오르던 숲길이 정말 좋다. ‘시간을 내어 이 비포장숲길을 다시 한 번 걸어보리라’. 속으로 생각을 한다. 아마 이 칠보산 무학사에서 또 다른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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