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산재한 수 많은 고택 답사를 하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참으로 많다. 어디는 사랑채가 너무 멋이있어 그곳을 떠나기가 싫을 정도였는가 하면, 집 안에 자리한 정자의 아름다움에 매료가 되어 몇 시간을 늘어지게 자고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많은 고택들을 둘러보면서 늘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많은 글들이 올라오지만 정작 집을 들어서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대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대문은 집안의 귄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의 대문을 보면 그 집안의 내력을 대개는 이해할 수가 있다. 하기에 대문은 그 집을 돌아보는데 있어, 가장 먼저 만나게 되지만 그만큼 눈여겨 보아야 할 곳이기도 하다. 어딜가나 만나게 되는 많은 고택들. 과연 그 대문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대문을 만나보기로 하자.

중요민속자료 제196호 충남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솟을대문은 위엄있는 사대부가의 상징


솟을대문이란 중앙에 높게 지붕을 올리고 그 양편을 낮게 만든 대문을 말한다. 이 솟을대문은 대문 양편을 얼마나 크게 조성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집안의 내력을 가늠할 수도 있다. 대개는 지방의 세도가와 양반가의 대문에 즐겨 사용을 했으며, 솟을문 옆으로는 하인들이 묵는 문간채와 헛간, 마굿간, 광채 등이 함께 자리를 잡는다. 솟을대문의 모습은 어떤 형태인지 살펴보자.





맨 위는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소재한 충남 민속자료 제7호인 이삼장군 고택 대문이다. 이삼(1677~1735) 장군이 이인좌의 난(1728)을 평정한 공으로, 영조로부터 하사 받아 지은 집이다. 이 대문은 기단을 높게 쌓고 그 위에 솟을대문을 두었다. 대문 옆으로는 하인이 사용하는 문간방을 들이고, 그 굴뚝을 대문 밖으로 빼냈다. 헛간과 마구간이 있는 비교적 단아한 형태의 대문이다.

두 번째는 충북 음성에 있는 중요민속자료 제141호인 김주태 가옥의 솟을대문이다. 이 대문은 사랑채에서 내려다 본 안쪽의 모습이다. 김주태 가옥은 약 300년 전에 이익이 세운 집이라고 전하지만, 안채는 19세기 중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이 솟을대문은 마을의 길과 같은 높이로 놓이고, 대신 사랑채가 3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자리하고 있다. 대문의 양편은 모두 광채로 사용을 하고 있으며, 밖에서 대문의 우측을 보면 쪽문이 있다. 즉 아랫사람들은 대문을 열지 않고 출입을 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세 번째는 전북 정읍시 산외면에 소재한 중요민속자료 제26호인 김동수 가옥이다. 99칸의 대저택인 김동수 가옥의 솟을대문은 전국의 고택 중에서도 그 규모가 큰 대문이다. 이 대문채에는 방과 광, 마구간 등이 나열되어 있으며, 끝 부분은 꺾어서 ㄱ 자 형태로 꾸몄다. 김동수 가옥은 집 밖에 호지집이라고 하는 별채를 둘 정도로 지역에서 대부호로 꼽히는 집이기도 하다.

맨 아래는 경주의 독락당 솟을대문이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계곡가에 자리하고 있는 독락당은 보물 제4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독락당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를 말한다. 이 집은 회재 이언적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독락당의 솟을대문은 화려하지가 않다. 그저 중앙을 높이고 양편을 낮게 해 담을 판벽으로 하였다. 선생의 심성을 그대로 닮았다는 생각이다.

솟을대문의 극치 함양 정여창 가옥



솟을대문의 극치는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중요민속자료 제186호인 일두 정여창 고택(정병호 가옥)에서 만날 수가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조선조 5현의 한 분으로, 이 집은 선생이 타계한지 1세기 후에 후손들에 의하여 중건되었다. 3,00여평의 대지가 잘 구획된 12동(최초에는 17동이라고 전한다)의 건물이 배치된 남도 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으로, 솟을 대문에는 충. 효 정려 편액 5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초가가 정겨운 작은 대문

기와에 주로 나타나는 대문은 솟을대문이 주를 이룬다. 이것은 그 집의 위세를 떨치고자 하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분의 차이가 뚜렷한 조선조에서는 이러한 대문의 형태가 곧 그 집안의 가세와도 관계가 지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안과 관계없이 초가에 묻혀 세상을 살아간 반가의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집들은 대개 작은 일각문을 사용하는데, 기와집에서도 이런 형태는 보이고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48호인 정원태 가옥이 있다. 이 집은 초가로 지어졌으며, 초가집에서는 가장 큰 사랑을 갖고 있다. 그 사랑 옆으로 작은 초가로 이은 일각문이 있는데, 이 문이 안채로 들어가는 대문의 구실을 한다. 옛날에는 바깥 담장이 있고 그 곳에 대문이 있었는지는 정확지 않으나, 현재 이 집에서 살림을 하는 분들의 이야기로는 이 초가 일각문이 대문이라고 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원태 가옥은 남도지방과 중부지방의 가옥의 형태가 습합되어 있다.


별다른 문이 없는 너와집

집은 여러 형태로 지어진다. 그 지역의 지리적 특성과 살고 있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달라진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가면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이 된 너와집이 있다. 굴피나무를 잘라 지붕을 인 이 너와집은 '느에집' 혹은 '능에집'이라고도 부른다. 이 집들은 따로 대문이 나 있지가 않다. 집 자체가 간단한 구조로 꾸며지기도 하지만, 대개는 화전민들의 집이기 때문에 집 안에서 모든 일을 다 보아야 한다. 그래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 자체가 대문의 역할을 한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가장 아름다운 대문은 어던 것일까? 솟을대문도 아니고, 기와나 와가의 대문도 아니다. 대문은 그 집을 드나드는 곳이다. 그 문으로 사람도 드나들고, 수 많은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가고 나간다. 하기에 그 문으로는 그 집의 모든 복락이 드나드는 곳이라고도 한다. 전국의 많은 집을 찾아다니면서 만난 가옥 중, 가장 인상에 남는 집은 증평에 있는 연병호 생가이다.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자손들에게 남겨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단지 다 쓰러져 가는 집 한채 뿐이다.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이 싸리문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문이란 생각이다. 이 문은 평생을 나라만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난 연병호 선생이 드나들던 문이기 때문이다. 답사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문들. 그 문에는 제각각 그 뜻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내 나이가 지금 86세인데, 어린 시절에 그러니까 17~18살 때 편수 노릇을 했어요.”

 

행궁동 생태교통 시범지역, 화성옥 옆에 있는 쌈지공원에서 짚공예 체험을 지도하고 있는 이원근옹은 고향이 화성이라고 하신다. 현재의 오산인데 수원으로 옮겨 자리를 잡은 지가 30년이 되었다고 하신다.

 

편수란 초가지붕을 이을 때 우두머리를 말하는 것이지. 어린 시절에 이미 편수노릇을 햇지. 예전에는 집들이 모두 초가를 이었으니까, 일도 상당히 많았고

 

그렇게 많던 초가집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지붕개량을 하는 바람에 일감이 줄었다는 것이다. 오늘(92)부터 쌈지공원에서 생태교통을 찾아오는 관람객 중에서, 짚공예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짚공예에 대해서는 전문가

 

이원근 옹은 곁에 서 있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경기도당굿에서 화랭이가 놀리는 의딩이)를 며칠이 걸려서 만들었다고 하신다. 짚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예전에는 한양을 올라갈 때 짚신을 신고 다니잖아. 그럼 밤새 짚을 꼬아서 새끼를 꼬고, 그 다음에 짚신을 만들어야지. 짚신이란 것이 그렇게 오래 신을 수가 없는 것이거든. 한 이틀 신으면 다 헤어져 버리는 것이야

 

그래서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려고 하면 하루 종일 걷고, 잠을 자러 들어간 집에서 불을 켜놓고 짚신을 삼는다고 한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걸어서 한양에 도착하려면 많은 짚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짚신을 오래 신을 수 있는 것으로 아나본데 그렇지 않아. 짚신을 아무리 잘 삼아도 이틀이 안가. 많이 걸으면 하루에도 떨어지거든. 그래서 괴나리봇짐에 짚신을 달고 다니는 거야. 그것이 떨어지기 전에 다시 짚신을 또 삼아야하거든.”

 

짚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끝이 없이 이야기를 하신다. 터주가리와 업가리 이야기가 나오자 소리까지 곁들여가면서 설명을 하신다.

 

 

예전에는 장독대 곁에 터주가리나 업가리를 만들어 놓았어. 터주가리는 집을 지키는 터주신이 있는 곳이고, 업가리는 가운데를 비워 놓으면 그 안에 족제비나 구렁이 등이 기어들어가 업이 되는 것이지. 그래서 소리도 전하는 거야. 족제비업은 뛰어들고 구렁이 업은 기어들고 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있지

 

이원근 옹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니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르겠다. 예전에는 짚이 상당히 많이 이용이 되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체험으로 밖에는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끼를 꼬는 체험을 해야 하는데, 구해 놓은 짚이 없어 걱정이라고 하신다.

 

초가지붕도 용어부터 알아야 헤

 

초가지붕 위에 올리는 이엉을 엮을 때도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하시는 이원근 옹.

 

사람들이 내가 이엉을 엮는 것으로 보고 어떻게 배웠느냐고 물어보는 거야. 배우긴 무엇을 배워. 그저 어르신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한 것이지. 그래서 이런 것을 만드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야 해. 머리가 나쁘면 아무리 알려줘도 소용이 없어

 

초가지붕 한 칸을 잇자면 엮어서 만든 짚더미 7마름이 필요하단다. 열 칸이면 70마름의 발이 필요하다고. 10칸의 지붕을 잇는다고 하면, 트럭으로 한 차 분량의 짚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가지붕의 제일 위인 용마루 위를 덮는 것을 용두재라고 하지. 그것은 4겹으로 덮어야 해. 그리고 짚을 덮은 다음에 고사새끼라는 것으로 잘 동여야 하거든. 그래야 바람에 날아가질 않지. 고사에는 속고사와 겉고사가 있는데 겉고사는 지붕을 덮은 후 밖으로 새끼줄로 엮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그래야 바람에 날아가지 않고 단단히 고정이 되니까

 

끊임없이 이야기를 풀어내시는 이원근옹. 아직은 정정하시다고 하시면서 체험을 하러 온 사람에게 새끼를 잘 꼬는 법을 가르치신다. 생태교통 지역을 돌아보는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그런 이원근 옹을 유심히 바라본다. 이원근 옹의 손놀림은 점점 더 빨라지고.

 

도심 속에 초가 한 채. 겉으로 보기에도 운치가 있다. 흡사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하다. 이런 곳에서 한 끼 식사를 하거나, 전통 차 한 잔을 마신다면, 도심의 답답함을 조금은 잊을 만할 듯하다. 23일(일) 오후에 찾아간 ‘연꽃잎 행복’이란 연꽃잎 밥과 전통차를 파는 곳이다.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30-50에 소재한 이 연꽃잎 행복은 법원 사거리에서 아주대 삼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 2차선 도로가 있는 도심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초가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에 도로에서 바로 찾을 수가 있다. 주변은 연립주택들이 들어서 있지만, 그 안에 혼자 조용히 숨죽이고 있는 집이다.

 

 

연잎 밥 한 그릇에 1만 냥, 연잎 수제비 7천원

 

안으로 들어서면 지난 과거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하고 있다. 아주 어릴 적 주변에서 쉽게 보아오던 물건들이다. 그런 것들이 있어 지난 세월 속으로 사람을 끌어갈 듯하다. 연잎 밥을 주문해 놓고 분위기를 한 번 살핀다. 가격도 그리 비싼 편은 아니다. 아마 주변에 대학에 있어,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가격인 듯하다.

 

연잎 밥 1만 냥, 한방 삼계탕 1만 2천 냥, 연잎 밥과 전통차 1만 3천 냥, 연잎 닭죽 7천 냥, 연잎 수제비 7천 냥 정도의 가격이다. 이 집은 전통차와 연꽃차, 그리고 체질에 맞는 나만의 차도 주문할 수 있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찬이 나온다. 그저 평범한 찬이다. 하기야 연잎 밥을 먹는데 머 그리 대단한 차를 필요로 할까?

 

 

반찬은 두부 두 조각, 고기 두 점, 김치 등이다. 작은 전 두 장이 나중에 나왔다. 2인용 상이라고 보기에는 찬의 양이 적은 편이다. 그리고 도자기 그릇 안에 들은 연잎 밥이 나온다. 작은 그릇에 담긴 국물도 깔끔하다. 거창하게 많이 차려 가격을 올리기보다는, 간단한 상으로 거품을 뺀 듯한 가격이다.

 

분위기가 한 몫 하는 집

 

연잎에 쌓인 밥을 풀어본다. 어느 절집에서나 맛 볼 수 있는 그런 음식이다. 남원에 있을 때 작은 연못에 무수하게 달리는 연잎을 이용해, 매년 연잎 밥을 먹어보았고, 전주에는 연잎 밥을 만들어 파는 집이 한옥마을에 있어 자주 먹던 연잎 밥이다. 하지만 이런 도심 속에서 향이 짙은 음식을 앞에 놓고 앉으니 분위기가 영 색다르다.

 

 

주변을 둘러본다. 차보에 적힌 문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함께 자리를 한 아름다운 여인에게 문구를 보라고 권유를 한다.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없음을 노여워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 말고

애처롭기까지 한 사랑 할 수 없음을 원망 말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선생님 사람이 과연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 할 것 같아요”

 

그럴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을 한다고 하지만,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저녁 한 그릇에 쌓인 분위기가 오히려 맛이 더 있었던 집이다. 가끔은 도심 속에서 만난 이런 집들이 그리워질 것만 같다.

 

충북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2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연병호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으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연병호 선생은, 오직 나라의 앞날만을 생각하다가 일생을 마친 분이다.

 

제헌과 2대 국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이런저런 재산을 마련할 때도, 태어난 생가 한 채만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도대체 연병호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에 다시 돌아와 살았다는 생가는 어떠한 모습일까?

 

 

 

초라한 집을 만나는 순간 눈물이 흘러

 

석곡리 마을 길 한편에 자리 잡은 연병호 생가.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계단으로 오르면, 싸리문이 손을 맞이한다. 안에는 모두 네 칸으로 마련된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지금은 마당 앞에 연병호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석비가 서 있지만, 이렇게 생가지가 정비되기 전에는 정말로 초라한 민초의 집이었을 것이다.

 

정남향으로 서 있는 초가는 네 칸이다. 좌측 세 칸은 방으로 드리고, 우측의 한 칸은 부엌이다. 정면 네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꾸며진 집은, 그저 어느 깊은 산골 외딴집을 보는 듯하다. 꾸미지도 않은 초가는 사람이 겨우 살아 갈만하다. 말이 집이라고는 하나, 이 집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분의 집이라고 하기에는 어이가 없다. 눈물이 흐른다. 지금의 내 신세를 탓하기 전에, 선생의 그 살아오신 일생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함께 생활을 했을까? 초라한 집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부인과 자녀들의 마음 씀씀이가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본다. 아마 선생의 나라만을 생각하는 마음을, 그 가족들 역시 함께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집에서 한 가족이 함께 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평생을 나라 위한 마음으로 산 연병호 선생

 

연병호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자는 순서이며 호는 원명이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맏형인 병환을 뒤따라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상해임시 정부 수립 후 조국에 돌아 온 후에는, 임시정부의 후원과 국제외교를 위해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1921년 다시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라 북경에서 독립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이듬해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됐다.

 

1937년에는 일본 관헌에게 체포돼 조선총독부로 인계된 후, 8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과 공주 감옥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난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을 하면서, 1948년 제헌국회의원과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제헌의원 시절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말년에는 석곡리 집으로 돌아와, 1963년 생가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남긴 재산이라고는 현재의 생가 한 채가 전부였다.

 

 

이곳을 집으로 삼아 사셨다니...

 

네 칸 중 세 칸의 방을 드린 초가. 한 칸마다 좁디좁은 문이 앞으로 나 있다. 겨우 어른 한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문이다. 그 중 부엌과 붙은 우측의 방 앞에는 툇마루를 놓았는데, 그것도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로 꾸며졌다. 방 안으로 들어가니 우측의 두 칸은 하나로 만들어진 큰 방이다.

 

좌측 끝 방과 연결하는 문은 문짝이 없이, 그냥 토굴의 구멍처럼 만들어졌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을 하였다는 생가의 형태는 바라볼수록 마음이 아프다. 큰 방의 천정 아래에는 시렁대가 놓여있다. 집이라고 너무 좁아, 어디 한 군데도 마음 편하게 사용을 할 수가 없다.

 

 

 

방을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니 부엌문도 없다. 벽은 짚을 엮어 바람을 막았다. 부엌 안은 아궁이와 진흙으로 다져놓은 것이 다이다. 뒤편으로 나가도 문이 없다. 뒤편 부엌 반대편에는 벽을 일부 담을 둘러 광으로 사용을 한 듯하다. 세상에 이런 곳에서 살면서도 나라를 위한 생각만을 하셨다니.

 

대선을 위해 뛰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집을 돌아보고 나오면서 요즈음 사람들을 생각해 본다. 과연 선생과 같은 입장에 있다면, 그들도 이런 집에서 살 수가 있었을까? 당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란 것이 내 대답이다. 혹 모르겠다. 그 시절이라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선생의 마음은 닮지 못했을 것이다.

 

 

고택답사를 하면서 수 없이 많은 집들을 보아왔다. 말대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집을 본 적이 없다. 비록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 안에는 선생의 아름다운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난리를 치시는 분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그리고 이렇게 그들에게 묻고 싶다.

 

“이 집에서 살다 가신 연병호 선생님처럼, 세상 모든 것 다 버리고 오직 나라와 국민들만을 생각할 수 있는가?”

사람이 사는 안식처, 바로 집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집은 사실 우리들의 집은 아니다. 이웃과 소통이 막혀버린 꽁꽁 싸맨 그런 집들은 정이 가질 않는다. 그래서 찾아 나선 것이 바로 우리 선조 때부터 살아온 ‘고택’이다.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200여 채가 넘는 고택을 둘러보았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는 날 문화재를 답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은 카메라에 신경이 자꾸 쓰인다. 연신 뿌리는 빗방울을 닦아내도 금방 뿌옇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 것은 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문화재 답사다.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83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23호인 '수원광주이씨월곡댁'으로 향했다.

 

 

몇 년 전에는 이 집은 '파장동 이병원가옥'이었다. 이렇게 명칭이 바뀌면 가끔 애를 먹기도 한다. 옛 이름을 갖고 찾아다니다가 엉뚱한 곳으로 길 안내를 받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월곡댁은 지어진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데서 더 의미를 두는 집이다. 안채의 대청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조 고종 25년인 1888년(광서(光緖) 14년 견자(犬子) 3월 18일 유시(酉時))에 건축이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남은 초가 한 채

 

이 집은 수원에 있을 때 몇 번인가 들려보았던 집이다. 초가를 올린 집이라 지붕을 보수하고 있을 때도 다녀간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이 너무 많이 변해있다. 집은 안채를 둘러싼 담 밖으로 ― 자형의 헛간채가 있고,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와 바깥채가 ㅁ 자 형으로 꾸며져 있다.

 

 

 

파장동 월곡댁에 도착해 보니 도심 어디나 그러하듯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이리저리 몇 바퀴를 돌아다니다가 할 수 없이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선다. 비는 계속 쏟아지는데 손바닥만 한 우산 하나 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이럴 때는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무엇을 망설이야. 사람은 비를 맞아도 카메라만 맞지 않으면 되겠다는 생각으로, 비를 맞고 월곡댁으로 향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안채와 바깥마당을 조금 떨어진 헛간채의 사이에도 몇 대의 차가 서 있다.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 앞에도 차를 대어 놓아 사진을 찍기가 불편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차를 비켜서면서 사진을 찍어댄다.

 

사방이 트여있는 ― 자형의 헛간채

 

안채와 바깥마당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있는 헛간채는, 20세기 중엽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월곡댁은 살림채는 담장으로 막았지만, 바깥마당은 사방으로 트여 있다. 헛간채 남쪽으로 비켜서 마당 안으로 출입하는 입구를 내었다. 헛간채는 넓은 5칸 정도로 꾸며졌다. 그 맨 끝에는 방으로 놓아 안채와 별도로 이곳에서 헛간채를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헛간채 앞에 몇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어, 제대로 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렇게 비가 오는 날, 답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헛간채는 방과 광 등으로 꾸며졌는데, 광문의 크기와 모양이 다 다르다. 아마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그 크기를 달리한 듯하다. 초가지붕에서 떨어지는 낙수가 운치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담 안에 꾸며진 안채와 바깥채

 

원래 이 월곡댁의 집 뒤로는 낮은 산이 둘러져 있고, 앞으로는 조그마한 개울이 흘렀다고 한다. 주변에는 오랜 한옥이 많고 감나무가 있어 예스러운 멋을 풍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변에 집들이 답답할 정도로 들어차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초가 한 채가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바깥채에 달아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사진을 좀 찍겠다고 이야기를 한 후 안채를 둘러본다. 안채는 평범한 ㄱ 자형으로 부엌과 대청, 안방과 건넌방으로 꾸며져 있다. 이 집의 초가지붕은 두께가 대단히 두껍다. 안채의 구성은 동편의 끝이 부엌이고 이어 안방이 있다.

 

 

 

대청을 두고 있는 건넌방은 문밖으로 툇마루를 둘러놓았다. 집은 그저 평범한 듯하면서도 재미가 있다. 안채의 부엌은 안마당으로 쪽으로 반 칸을 더 내밀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앞에 툇마루를 놓아 안방과의 연결을 용이하도록 하였다. 건넌방도 위아래 칸으로 나누어졌으며, 앞쪽이 약간 돌출되어 있다. 아마 이렇게 부엌과 건넌방을 돌출시켜, 서해안에서 안채로 불어오는 바람을 최대한 막아낸 듯하다.

 

사랑채로 사용한 바깥채

 

월곡댁은 지정 당시 명칭이 '파장동이병원가옥'이었던 것이 바뀐 이유는, 소유자 이병원의 모친인 성주 도씨가 과거 안산군 월곡면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지은 가옥으로, '월곡댁'으로 불린 것을 반영하였다고 한다. 2007년 1월 29일자로 '수원 광주이씨 월곡댁'으로 지정명칭을 변경하였다.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바깥채는 사랑채의 용도로 쓰였다. ㄴ 자형의 바깥채는 꺾인 부분에 중문을 두고,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방이 있고, 우측으로는 광과 방이 있다. 이 바깥채는 조금은 옛 모습에서 달라진 듯하다. 사랑채는 위아래 방을 안채와 직각이 되게 배치를 하고, 중문이 부엌을 향하게 하였으며, 마당 앞에는 헛간과 외양간이 있었다고 한다.

 

집을 지은 년대가 남아 있는 수원광주이씨월곡댁. 비가 내리는 날 찾아간 월곡댁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를 하고 있다. 정작 집안에 사는 사람들이야 불편하겠지만, 이렇게 비가와도 찾아다니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고맙기 한이 없는 소중한 집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