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 농다리. 많은 사람들이 농다리를 찾는다. 그리고 글을 쓴다. 농다리에 대한 글은 많다. 그런데도 농다리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함이다. 결론부터 이야기를 하자면 '농다리는 과학이요. 우리의 사상을 지난 다리'라는 점이다. 

중부고속도로 청주에서 안성쪽으로 오르는 상행선을 가다가 보면, 버스 안에서도 볼 수 있는 다리가 있다. 그 유명한 진천 농다리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세금천에 놓여진 이 농다리는 고려 때 축조되었다고 전해지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농다리를 축조했다는 임장군은 누구인가?

1932년도에 발행된 <상산지(常山誌)>에는 '고려초기에 임장군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장군은 고려 때의 무신으로 농다리를 그의 전성기에 고향마을에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바로 임연 장군이다. 고려 때의 임연 장군은 고려 말의 무신이다. 임연은 고려 원종 때의 무신으로(? ~ 1270(원종 11년)) 몽고군을 물리친 장수이다.

임장군이 전성기에 농다리를 고향마을에 축조했다고 한다. 임연 장군이 전성기라고 하면,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인 공로로 위사공신의 칭호를 받았을 때일 것이다. 당시는 고종 45년인 1258년이니 750년 전이다.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고려 초기의 임 장군과 고려 말의 무신인 임연이 동일인물 인가가 정확지가 않다. 상산지에는 고려 초기에 축조한 다리라고 하면 천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는 것이고, 고려 말의 무장 임연 장군이 쌓았다고 하면 750년이 지났다.



결국 그 차이가 300년 정도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알 수가 없지만, 진천 농다리를 축조한 '임장군'은, 고려 말의 무장인 임연 장군과는 별개의 인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농다리의 실제 길이는 108m였을까?

농다리는 원래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 중 세칸이 유실되고, 지금은 25칸만이 남아 있으며, 길이는 93.6m에 이르고 있다. 교각의 폭은 4m 내지 6m 정도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있다. 이 농다리의 처음 길이는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현재 남아있는 93.6m를 남은 25칸으로 나누면 3.75m 정도가 된다. 이것을 원래 28수로 곱하면 약 105m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 농다리의 교각의 폭이 일정치가 않고 4m에서 6m 정도였다면, 혹 이 농다리의 원래 길이는 108m 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고려 때는 불교가 성행하였다. 아마도 이런 종교적인 사고를 지닌 다리는 아니었을까 하는도 든다.  


농다리는 과학이다.

농다리는 똑 바로 축조가 되지 않았다. 마치 지네발처럼 구불구불하다. 이런 농다리는 사력암질의 붉은 색 돌을 물고기 비늘처럼 쌓아 올려 교각을 만들었다. 상판석은 특이하게  중앙에만 쌓아, 좌우로 날개를 단 듯 축조된 돌로 쌓은 기둥의 힘을 배분했다. 교각의 축조방법은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쌓았으며, 속을 흙 등으로 채우지 않고, 돌만으로 건쌓기 방식으로 쌓았다. 

이 농다리를 돌만으로 축조한 것도 알고보면 이유가 있다. 그 쌓아 올린 교각의 돌틈으로 물이 빠져나가게 한 것이다. 그만큼 흐르는 물로 인해 받는 저항을 약화시켰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에 의해 놓여진 다리라는 것이다. 장마철에 물에 잠기는 농다리. 물속에서도 어떻게 천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는지 궁금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해가 간다. 


물이 흐르는 방향의 농다리의 앞을 보면 교각보다 넓게 조성이 되었다. 석축의 끝은 좁고 상판을 올린 부분은 넓게 만들었다. 이는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교각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살은 갑자기 유속이 빨라진다. 마치 무엇이 잡아 끌기라도 하는 듯하다. 이렇게 물살이 빠르게 교각 사이를 빠져 나가면, 교각에 무리를 주지 않고 유속만 빨라지게 된다.


돌과 돌 사이로 흘러 들어온 물은 흐름이 늦어진다. 교각 사이를 좁게 한 대신 깊이를 조절해 물이 흐름의 속도를 늦추기 위함인 것 같다. 


좁은 통로를 지나는 물은 갑자기 빠르게 빠져나간다. 교각의 후미를 경사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급의 조절을 한 것은 물이 교각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 농다리가 과학적이라는 것은 바로 지네발 모양의 축조방식이다. 교각을 일렬로 쌓지 않고 구불거리게 놓아, 물의 흐름을 적당히 배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과학적인 방법으로 축조된 농다리.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이 결토 우연이 아니라는 점이다. 선조들의 지혜에 새삼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 선생. 자는 순오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고종 7년인 1870년에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산직말에서 학자 이행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 이용우의 아들로 입양된 이상설은 서울로 올라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법률 등을 공부하여 고종 31년인 1894년 문과에 급제를 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친 이상설은 의정부 참찬에까지 올랐으며,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의 폐기를 상소한 후 간도 용정으로 망명을 하여 서전서숙을 세웠다. 이곳에서 교포 자제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1907년에는 이준, 이위종과 함께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을사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1917년 47세의 나이로 병사를 하였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이상설 생가. 유허비와 뒤편에 동상, 그리고 생가의 모습이다

숭열사와 생가가 한 자리에

숭열사는 이상설 선생의 존영을 모신 사당이다. 1972년 진천읍 교성리에 세워진 목조와가 9평의 맞배집으로 된 사당과 숭모비 등을, 1997년 현재의 자리인 산척리 생가 곁으로 옮겨 놓았다. 숭열사에는 사당과 솟을문, 추모비와 동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그 한편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77호인 이상설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이상설 생가는 초가 세 칸이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초가집은 황토벽으로 발라놓았다. 이 집은 선생이 태어난 집으로 광복을 전후 해 무너진 것을, 근년에 옛 분들의 고증을 받아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집 옆으로는 1957년에 세운 유허비가 서 있으며, 그 뒤편으로는 이상설 선생의 동상이 서 있다.


세 칸 초가인 안채와 맞은 편에 있는 헛간채

초라한 세 칸 초가가 품은 인물

지금은 정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마 선생에 태어날 당시에 생가는 더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세 칸 초가는 앞에서 바라보면 좌측에 부엌이 있고, 안방과 윗방이 있다. 앞으로는 툇마루도 놓지 않았으며, 방은 겨우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윗방 역시 마찬가지이다.

안방은 뒤편으로 난 문이 조금 크다는 것뿐, 일반 민초들이 사는 집보다도 초라하다. 윗방 앞에는 조금 돌출이 되게 내달아 곡식을 넣어두는 곳간을 만들었다. 부엌은 조금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아궁이를 두었다. 벽 한편에 돌출이 된 곳은, 예전 등잔을 올려놓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윗방 앞으로 달아낸 곳간채와 안방. 안방은 성인 한 사람이 발을 뻗고 누울만한 공간이다.

이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난 이상설 선생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세계에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한다. 물론 선생이 이 집에서 자란 것은 7세 때까지였을 것이다. 그 뒤로는 이용우의 양자로 입양되어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생가에서 부끄러움에 낯을 붉히다

눈발이 날린다. 마음을 먹고 나선 답사 길이 폭설로 인해 중단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변동이 오히려 이상설 선생의 생가를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고마울 뿐이다. 집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왜 요즈음 사람들은 자라나는 환경만을 그렇게 핑계를 대는 것인지.



거적으로 된 부엌문과 아궁이, 그리고 벽에 불거진 것은 등잔을 올려놓는 등잔대이다.

선생을 위시한 여러 선인들은 자라난 환경이 열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던가.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라는 환경이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과 그 시대가 인물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초라한 세 칸 초가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을 이상설 선생. 오늘 그 생가 앞에서 머리를 숙인다. 그 동안 참으로 세상을 잘못 살아왔음을 깊이 반성하면서. 눈발이 점점 거세지는 듯하다. 그저 부끄러움에 그 눈발이 고맙다. 부끄러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릴 수가 있으니.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에 소재한 신헌 고택.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신헌(1810∼1884)은 조선조 후기의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다. 이 집은 신헌이 살던 집으로 과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있었으나, 그 집을 허물어 길상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헌의 자는 국빈, 호는 위당이며 평산인이다. 순조 28년인 182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 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 무반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충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들기도 했다.

천사의 나팔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진천 신헌고택

병자수호조약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신헌

고종 12년인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 중문채 만이 남아 있다. 신헌고택을 찾아갔다.

마침 문이 걸려있지 않아 집을 둘러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문은 중앙에 문을 두고 양 옆으로는 방과 헛간이 있다. 방 밖으로는 굴뚝이 서 있어, 이 방에서 안채의 일을 돌보는 여인들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문은 중문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없어지고, 중문이 대문이 되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보호하였다.

안채만 남아도 단아한 집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집이다.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 집에 이렇게 지붕을 들인 것은 흔치가 않다. 안채는 꺾이는 부분에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신헌고택을 들어가니, ‘천사의 나팔’이라고 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집안 정원 가득 꽃이 심겨져 있어, 현재 이 집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 꽃은 해가 지기시작하면 짙은 향을 풍긴다. 이 정도 꽃이면 집안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사랑과 안채를 통하던 일각문과(위) 안채의 한편. 천사의 나팔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안채에서 예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중문 말고도, 중문채 끝에 일각문이 있어 그곳으로 통행을 했다. 현재 일각문 밖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남아있는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상사를 짓기 위해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부수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앞에 길게 마련한 광채는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으로, 곳간, 헛간, 광 등을 마련했다. 담 밖에서 보는 광채는 10여 칸이나 되는 -자형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광채의 크기로 보아도, 이집을 지었을 때는 정말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열칸 정도로 지어 곡식 등을 보관하였다.

밖으로 나와 안채의 뒤편을 바라다본다. 뒤편에는 낮은 굴뚝들이 연이어 나 있다. 뒤편의 길가로 난 담장이 높게 되어있고, 그 밑으로 차이를 두어 안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 뒤편이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안채만 남았어도 단아한 형태로 지어진 신헌고택. 이 집의 밤은 온통 꽃향기로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늦은 시간 막걸리 한통 사들고 다시 이 집을 찾아,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천사의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낮은 굴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종교행위 자체를 무엇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종교를 갖던지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종교행위로 인해 남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그것이 과연 올바른 종교관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적 제414호는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 소재한 김유신 장군의 탄생지 및 태실을 말한다. 태실이란 아이가 태어난 뒤 나오는 탯줄을 보관하는 곳을 말한다. 이 일대는 사적지로 조성을 한 후 한참 주변 정비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야사람 김유신은 왜 진천 땅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내막을 알면, 이해가 간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곳이라는 계양리에 세워진 유허비

김유신의 탄생지 상계리 계양마을

김유신이 태어난 곳은 만노군(현 진천군) 태수로 부임한, 김유신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집무를 보던 상계리 계양마을이다. 김유신은 진평왕 17년인 595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나이 15세가 되던 진평왕 31년인 609년에 화랑이 되고, 낭비성 싸움에 공을 세워 압량주의 군주가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유신은 선덕여왕 때는 상장군이 되고, 무열왕 7년인 660년에는 상대등이 되어 당군과 연합, 백제를 멸망시켰다. 8년 뒤인 668년에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태대각간이 되었다. 나이가 먹은 김유신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당나라군을 몰아내고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되찾은 후, 673년 음력 7월에 병이 악화되어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신이 죽은 후 한참 후인 835년에 김유신은 ‘흥무대왕’으로 추존이 되었다.



사적 안에서 종교집단의 부흥회가 웬 말.

지금의 계양마을 입구인 장군터라 불리는 태수 관저가 있던 곳에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 일대에는 장군의 역사가 많이 남아있다. 김유신과 관계가 있는 태실과 투구바위 등을 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 그런데 무슨 약장수를 방불케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한창이다. 시끄럽게 스피커 볼륨을 높여 놓고 사람들이 그 앞에 앉아있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듯하다.

유허비를 돌아본 후 전각이 있는 곳으로 가려는데, 스피커에서는 연신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연사의 뒤편에 걸린 현수막을 보니 <○○ ○○ 기도회>인가하는 글을 쓰여 있다. 순간 참 어이가 없다. 모처럼 맞는 휴일에 자녀들과 함께 사적지를 찾은 사람들도,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하고 돌아선다.


김유신 장군의 출생지인 옛 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비

그렇게 기도회를 할 만한 곳이 없었던 것일까? 줄지어 늘어선 차량들을 보니 ○○교회, △△교회 라는 글이 보인다. 여러 곳의 교회에서 장소가 넓은 이곳을 택해 합동기도회를 하는가보다. 그런데 어떻게 사적지 안에서 이런 종교행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다음 날 진천군청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혹 종교집회를 허락해 준 사실이 있는가를. 전혀 모르는 일이란다. 그렇게 사적지에서 시끄럽게 집회를 하는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몰지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이 찾아드는 사적지. 그것도 공휴일에 이런 대책 없는 행동을 한 종교인들을, 과연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사적지 안에서 종교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과 줄지어 선 차량들

충북 진천군 진천읍 연곡리 483, 보련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보탑사. 보탑사란 명칭은 이 곳에 3층 목탑으로 지어진 보탑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이 보탑사 주변에는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곡리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3기 밖에 전하지 않는 비문을 새겨 넣지 않은, 보물 제404호인 백비가 있기 때문이다.

보탑사를 짓기 전에 실시한 지표조사에서는 와당 등이 출토되었으며, 보련산이나 연곡리 등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지어지는 명칭이 보이는 것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진천읍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는 보탑사를 가는 길에는 김유신장군의 생가터가 있는데, 이곳에 있던 옛 절이 김유신의 사적지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엄함이 느껴지는 보탑사의 3층 목조보탑

현대에 들어 가장 아름다운 목조 3층보탑

보련사를 들어가는 길은 차 한 대가 겨우 드나들만한 길이다. 보탑사를 향하던 중 몇 번이나 차를 물려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휴일에다가 버섯채취가 한창인 시기인지라, 여느 때보다 몇 배가 더 복잡하다고 한다. 겨우 보탑사 입구에 들어설 수가 있다. 주차장을 들어서면 우측으로는 보탑사의 일주문이 보이고, 좌측으로는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주 듯 수령 300년이 지난 느티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보탑사 입구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수령 300년의 느티나무(위)와 보탑사 일주문(가운데) 보탑으로 오르는 계단

보탑사 일주문을 지나 돌계단 위로는 3층 목탑의 상륜부가 삐죽이 얼굴을 보인다. 계단 위 좌우에는 범종각과 법고각이 서 있다. 밑에서 보기에는 팔각으로 보였으나, 막상 오르고 보니 법고각은 9각으로 지었고 범종각은 7각으로 지어졌다.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3층 목조보탑. 그 웅장함에 압도를 당한다.


사방불을 모신 장엄한 3층보탑

보련산 보탑사의 3층 보탑. 3층 보탑의 높이는 42.71m나 된다고 한다. 탑신인 1층부터 3층까지의 높이가 108자인 32.72m 이고, 상륜부가 33자인 9.99m이다. 이 보탑은 사방에 문을 내고 그 안에 주불을 모셨는데, 3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보탑이다.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다. 머리를 숙여 예를 갖춘 후, 한편에 서서 고개를 딴 곳으로 돌리지를 못한다,


보탑의 상륜부와(위)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신 보탑의 1층(아래)

예전 신라가 새로운 국가를 열기 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우듯, 고구려와 백제가 더 강한 국가를 염원한 많은 목탑을 세우 듯, 그런 마음으로 남북통일은 물론, 옛 고구려의 위용을 다시 한 번 떨쳐내기 위한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 모습만으로도 아름다운데, 그 안에 담긴 뜻이 깊어 더욱 장엄을 더하고 있다. 또한 황룡사 9층 탑 이후 최초로 3층까지 오를 수 있게 축조된 탑이기도 하다.

보탑을 한 바퀴 돌아본다. 행여 발자국 소리라도 들릴까보아 조심스럽다. 1층은 금당이다. 사방불을 모신 금당은 이 보탑의 심주를 중심으로 사방불을 모셔 놓았다. 동방에는 약사보전, 서방에는 극락보전, 남방에는 대웅보전, 북방에는 적광보전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그 현판의 명호대로 그 안에 모셔진 주불과 협시불이 각각 다르다.



범종각과 법고각(가운데) 그리고 와불을 모신 적조전(아래)

2층은 법보전으로 팔만대장경을 모신 윤장대가 있으며, 3층은 미륵전으로 미륵 삼존불을 모셔 놓았다. 보탑주변을 한 바퀴 도는데, 적조전 앞 바위에 모셔진 석불이 빙그레 웃는 듯하다. 마치 ‘무엇을 깨달았는가?’를 묻는 것만 같다. 이 3층 보탑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는 와불을 모신 적조전, 부처님의 제자와 나한을 모신 영산전, 지장전과 법고각, 범종각 등이 경내에 자리하고 있다.



산신각으로 오른다.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은 너와지붕을 얹어 특이하다. 산신각 앞에 앉아 바라다보는 3층보탑. 그 상륜부 위로 저만큼 가을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뜬구름 같은 인생을 어디서 머물 것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보련산 보탑사에서 영원한 발길을 머물고 싶다’고.

통나무 귀틀집으로 지어진 산신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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