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의 현등사는 운악산(해발 935m) 산등성이에 위치한 신라시대의 고찰이다. 신라 법흥왕 27년인 540년에 인도에서 불법을 전하기 위해 건너온 마라가미 스님을 위해 왕이 지어준 사찰로, 오랫동안 폐사 되었다가 신라 효공왕 2년에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였다.

 

현등사는 창건 이래 많은 중창을 하였다. 신라 말 효공왕 2년인 898년 도선국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동쪽의 지세가 약해 이를 보강하기 위해 운악산을 돌아보던 중 옛 절터가 있는 것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두 번째 중창은 고려 회종 6년인 1210년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쳐 이곳을 찾아오니 석등과 마륵바위에서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고 현등사라 이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태종 11년인 1411년 함허득통화상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현등사 경내에는 1619년 봉선사에서 조성한 보물 제1793호인 현등사 동종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인 삼층석탑, 183호인 목조아미타좌상, 184호 청동지장보살좌상 등 12점의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2km를 걷는 길 겨울경치도 아름다워

 

날이 차다. 입구에서 현등사까지의 거리는 2km 남짓. 하지만 주변 경관을 들러보고 가노라면 언제 다 왔는지 일주문이 보인다. 운악산 현등사라고 현판을 단 일주문을 지나면 계단을 오르는 초입에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 한 옆 커다란 바위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원을 담은 작은 돌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바쁜 일이라고는 없지 않은가? 그저 오늘은 세상 시름 이곳에 다 버리고 훌훌 털고 가야겠다는 생각이다. 조금은 안쓰럽게도 보이지만, 그래도 온갖 세월의 풍상을 다 이겨낸 지진탑이 보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앞에 머리를 숙인다. 그 탑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래 전 그 탑을 조성한 장인에게 죄스런 마음 때문이다.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음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이 탑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도굴을 당한 것을 2006년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되돌려 받아, 다시 제 자리에 모셨다고 하니 탑이 더 빛을 발하는 듯하다.

 

응진전 앞에서 걸음을 멈추다

 

절이라는 곳이 명소 아닌 곳이 어디 있겠는가? 곳곳의 전각마다 부처가 아니 계신 곳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가장 눈에 띤 것은 바로 커다란 소나무 밑에 한 칸으로 조성을 한 응진전이었다. 그 모습이 왜 그리 눈물겨웠을까? 아마도 그 안에 들어가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고 있는 저 보살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전국에 산재한 수많은 고찰들을 찾아다니다가 보니, 이제는 그 분위기만 보아도 대충은 그 절의 세를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웅장하고 사람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아니면 일 년의 수입이 많다고 해서 좋은 절일까? 물론 요즈음같은 물질만능시대에 그런 것으로 절의 가치를 정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절에서 고승들이 득도를 했을까? 왜 역사에 남을만한 고승들은 모두 사람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었을까? 인간의 오욕이 보이지 않는 곳을 찾아 부처의 참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현등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온갖 질문을 하고 그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써본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내 마음과 몸이 속세의 찌들어있는데. 그저 바람 한 점이 불어 내 몸에 묻은 속세의 먼지를 훌훌 털고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눈은 녹았지만 찬바람은 그대로인 한 겨울의 현등사. 그곳에서 난 잠시 동안이나마 속세를 떠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본다.

 

적멸보궁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법당에 부처님을 모시지 않고, 대신 전각 뒤편에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운다. 우리나라에는 5대보궁이 있는데, 그 중 한 곳이 바로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에 소재한 정암사이다. 정암사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때인 645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자장율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창건한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기를 서원했다. 한 범승이 나타나 대송정에서 만나자고 했다. 이튿날 한송정으로 달려간 자장율사에서 문수보살이 갈반지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사라졌다. 태백산을 헤매던 자장율사는 사람들에게 갈반지를 물었으나, 아무도 그 지명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칡넝쿨이 우거진 곳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갈반지를 찾게 되고, 그곳에 탑을 세우려고 했으나 번번이 무너져 버렸다. 그런 후 백일기도를 드린 후 밤에 칡넝쿨 세 가닥이 뻗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끝에 세운 것이 바로 수마노탑과 적멸보궁, 그리고 정암사의 법당 자리라고 한다. 당시에는 그 자리에 세웠다고 하여 갈래사라 칭했다.

 

서해용왕이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

 

보물 제410호인 정암사 수마노탑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보낸 마노석으로 세웠다고 전해진다. 정암사 적멸보궁 뒤의 산비탈에 세워진 7층의 모전석탑인 수마노탑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화강암으로 6단의 기단을 쌓고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 2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신은 회녹색을 띤 석회암으로 쌓았는데, 표면을 정교하게 잘 정돈하여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의 남쪽 면에는 감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했으며, 1장의 돌을 세워 문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추녀 너비가 짧고 추녀 끝에서 살짝 들려있으며, 풍경이 달려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 수는 1층이 7단이고,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1단이며, 지붕돌 윗면도 1층이 9, 1단씩 줄어들어 7층은 3단으로 되어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으로는 청동으로 만든 장식을 올렸다.

 

 

조선 후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한 수마노탑

 

정암사 수마노탑은 벽돌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그리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가 세련되고 수법 또한 정교한 탑이다. 탑 앞에 놓인 배례석은, 새겨진 연꽃무늬나 안상 등이 모두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탑신을 구성한 석재는 회록색의 수성암 질석회암으로 길이 30~40cm, 두께 5~7cm로 정교하게 쌓여져 있다.

 

이 석탑은 파손이 심해서 1972년 해체, 복원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운 이유를 담은 탑지석이 옥신부터 기단부까지 사이에서 5개가 발견이 되었다. 또한 금, , 동으로 만들어진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정암사에서 느낀 기운은 맑기만 한데

 

그만큼 시대가 흐르면서도 정암사 수마노탑은 진신사리탑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이 언제부터 전해진 것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서 확실하지 않지만, 정암사에 있는 여러 유물과 비교해 볼 때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깊은 가을에 찾아간 정암사. 수마노탑으로 오르는 계단을 걷는다. 마음이 경건해진다. 아마도 탑의 기운이 탑 주변에 넓게 자리를 하고 있는 듯하다. 머리를 조아려 서원을 한다. 무엇이나 이곳에 와서 간절히 서원을 하며 이루어질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일어나 건너편 산을 바라본다. 가을이 짙어가는 산에는 붉은 빛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 숱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마노탑.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는 정암사. 아마 자장율사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 것을 미리 예견하신 것은 아닐까? 자장율사가 평소에 짚고 다니던 주장자였다는 주목 한 그루가 저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회생을 했다고 하니, 정암사야 말로 세상을 다시 살아나갈 사람들에게는 좋은 곳이 아닐는지.

비바람이 거세다. 장마철에 답사를 떠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하지만 좋은 기회를 맞았다면 그보다 더한 날이라고 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7월 14일(토), 아침 일찍 출발을 하여 도착한 남해 보리암. 가는 내내 비가 뿌려댄다. 버스에서 내려 셔틀버스로 옮겨타고, 다시 걸어 올라가는 보리암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가 않다.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기위해 거기다만 신경을 쓰다가 보니, 옷은 이미 속까지 축축하게 젖어온다. 질척이는 길을 걸어 도착한 보리암은, 자욱한 해무 속에서 신비로운 모습으로 여행객들을 맞이한다. 어디라고 들릴 사이에 없이 전각 앞을 지나, 바닷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삼층석탑으로 향했다.

 

 

전설과는 거리가 먼 삼층석탑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보리암 경내에 서 있는 경남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이 탑은 보리암 종각 옆으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닷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다. 크지 않은 이 삼층석탑은 비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석탑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3년인 683년에 원효가 금산에 처음으로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비인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을 이용하여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허태후가 가져 온 부처님의 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도 전한다.

 

 장맛비 속에서 남해  보리암으로 오르는 사람들(위)과 비와 해무에 쌓인 보리암(아래)

 

하지만 이러한 전설은 실제와는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삼층석탑은 파사석이 아닌 화강암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석탑의 조형을 보면 고려 초기의 형태를 따르고 있기 때문에, 전설과는 차이가 난다.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크지 않은 석탑

 

장맛비가 쏟아지는 데도, 남해를 바라보고 있는 석불입상 앞에는 그 비를 맞으면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석탑 옆 바위에는 이름들을 새겨 놓았다. 저 바위와 같이 오랜 시간 잘 되기를 바라는 염원에서였을까? 어디를 가나 저렇게 돌에 새긴 이름들을 본다는 것이 이젠 씁쓸하기만 하다.

 

 

삼층석탑 주변의 바위(위)와 경남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보리암전 삼층석탑(아래)

 

보리암 전 삼층석탑은 일반적인 석탑에 비해, 그 크기가 크지 않은 편이다. 석탑에는 특별한 조각이나 그런 것들이 없이 그저 평범한 모습이다. 커다란 돌 하나로 기단을 놓고, 그 위에 면석을 놓았다. 면석에는 양편에 모서리기둥인 우주를 새겨놓고, 그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각 층의 몸돌에도 양 우주를 돋을새김 하였다. 지붕돌의 받침은 4단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처마는 약간 경사가 지게 하여 자연스럽게 처리를 하였다. 상륜부에는 보주가 남아있으며, 고려 초기의 석탑의 유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천년 세월 남해를 바라보고 금산 보리암의 비보석탑으로 지켜 온 고려초기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암 삼층석탑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자욱한 해무에 쌓인 보리암전 삼층석탑. 천년 세월을 그 자리에서 남해를 바라다보면서, 이곳을 들리는 수많은 참배객들의 기원을 얼마나 들어준 것일까? 그래도 그 오랜 세월, 그 자리에서 기다려주어 고맙다. 이 탑 하나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빗길에 달려온 나그네를 맞는 삼층석탑. 비보석탑인 이 삼층석탑에 고개를 조아리고, 내 주변의 모든 나쁜 기운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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