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826에 소재한 신헌 고택. 현재 충북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신헌(1810∼1884)은 조선조 후기의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다. 이 집은 신헌이 살던 집으로 과거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등이 있었으나, 그 집을 허물어 길상사를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신헌의 자는 국빈, 호는 위당이며 평산인이다. 순조 28년인 1828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에 임명 된 후,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중요 무반직을 두루 거쳤다. 고종 3년인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충융사로 강화의 염창을 수비하고, 난이 끝나자 좌참찬 겸 훈련대장이 되어 수뢰포를 만들기도 했다.

천사의 나팔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는 진천 신헌고택

병자수호조약과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한 신헌

고종 12년인 1875년 운양호 사건이 일어나자 이듬해 전권대관이 되어 병자수호조약을, 고종 19년인 1882년에는 한미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같은 해에 판삼군부사가 되었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 중문채 만이 남아 있다. 신헌고택을 찾아갔다.

마침 문이 걸려있지 않아 집을 둘러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현재 대문으로 사용을 하고 있는 문은 안채로 통하는 중문이다. 문은 중앙에 문을 두고 양 옆으로는 방과 헛간이 있다. 방 밖으로는 굴뚝이 서 있어, 이 방에서 안채의 일을 돌보는 여인들이 기거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대문은 중문이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없어지고, 중문이 대문이 되었다. 중문은 바람벽을 두어 안채를 보호하였다.

안채만 남아도 단아한 집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집이다.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한 집에 이렇게 지붕을 들인 것은 흔치가 않다. 안채는 꺾이는 부분에 마루를 놓고 양편으로 방과 부엌을 달아냈다.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신헌고택을 들어가니, ‘천사의 나팔’이라고 하는 꽃들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집안 정원 가득 꽃이 심겨져 있어, 현재 이 집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꽃을 좋아하는가를 알 수 있다.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 꽃은 해가 지기시작하면 짙은 향을 풍긴다. 이 정도 꽃이면 집안 전체가 꽃향기로 가득할 것만 같다.


사랑과 안채를 통하던 일각문과(위) 안채의 한편. 천사의 나팔이 꽃을 피우고 있다.

안채에서 예전 밖으로 나가는 문은 중문 말고도, 중문채 끝에 일각문이 있어 그곳으로 통행을 했다. 현재 일각문 밖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다. 남아있는 집의 전체적인 구조로 보아, 처음 이 집을 지었을 당시의 모습이 그려진다. 길상사를 짓기 위해 사랑채와 행랑채 등을 부수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안채의 앞에 길게 마련한 광채는 부속 건물이다. 이곳은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으로, 곳간, 헛간, 광 등을 마련했다. 담 밖에서 보는 광채는 10여 칸이나 되는 -자형으로 꾸며졌다. 이러한 광채의 크기로 보아도, 이집을 지었을 때는 정말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채는 열칸 정도로 지어 곡식 등을 보관하였다.

밖으로 나와 안채의 뒤편을 바라다본다. 뒤편에는 낮은 굴뚝들이 연이어 나 있다. 뒤편의 길가로 난 담장이 높게 되어있고, 그 밑으로 차이를 두어 안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이 뒤편이 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안채만 남았어도 단아한 형태로 지어진 신헌고택. 이 집의 밤은 온통 꽃향기로 뒤덮일 것이다.

언젠가 늦은 시간 막걸리 한통 사들고 다시 이 집을 찾아, 휘영청 밝은 달밤에 천사의 나팔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에 취해보고 싶다.

안채의 뒤편으로는 낮은 굴뚝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문경에서 59번 도로를 타고 월악산국립공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에 커다란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 - 6에 소재한 이 고택은 청백리로 유명한 방촌 황희(1363~1452) 정승의 옛 집이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가옥은 안채 및 사랑채, 중문채, 고방채가 있고 우측에는 사당이 마련되어 있다. 도로변에 있어 찾기도 수월한 이 고택은, 문경지방 양반의 주거지로 사랑채와 안채의 연결부분이 서로 독립된 공간구성으로 마련되어 있다. 여느 고택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구성을 하고 있는 장수황씨 종택은,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현감을 지낸, 칠봉 황시간(1588~1642)이 35세 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가옥이다.

 

종택의 중후함이 느껴져

현재의 건물은 당시의 모습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집이라는 것이 살다가보면 손을 보게 되고, 필요에 따라 증축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400년 전의 집이 그대로 형태를 보존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4칸으로 구성 된 솟을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사랑채가 자리하고 그 오른편에 안채가 있다. 그리고 안채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양반집의 어디나 그렇듯 사랑채 오른쪽으로 중문채가 있었으나, 화재로 중문과 마구부분이 소실되고 현재 일부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툇간을 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좌측 2칸에 난간을 돌린 마루를 두고 2칸 온돌방과 연결시켰다. 우측 칸은 전면에 다락방을 설치하고 하부는 수장공간으로 활용한 점도 이 집의 특징이다. 뒤쪽으로는 반칸 정도의 감실을 두고 다시 온돌방을 설치한 3겹의 칸살로 구성되었다. 팔작집으로 마련한 사랑채는 평범한 듯 보이면서도, 나름 들어나지 않는 멋을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우측 한칸을 개방하여 누정식으로 사용을 하고
좌측의 다락방 아래는(맨 아랫사진) 수장고로 사용을 하고 있다.

안주인의 생활을 보호한 안채의 구성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ㄱ자형으로 구성된 평면공간이다. 안채는 사랑보다 조금 뒤쪽으로 물려서 구성을 했다. 안채의 꺾어진 부분에는 사랑과 유사한 안사랑공간을 만들었다. 사랑채 쪽으로 툇간을 두면서 뒤편으로 방을 배치하여 사랑과 연결을 하였으며, 전면으로 2칸 온돌방을 마련하여 앞쪽에서의 시선을 차단시켰다. 중앙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볼 때, 좌측부분은 안사랑 공간으로 마련하고 우측이 일반적인 안채의 기능을 하고 있다.

안채는 지금은 앞쪽이 훤히 트여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중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안채를 둘러 싼 안담이 있었을 것이다. 여지저기 보수를 한 것으로 보이는 안채는 창호지가 다 찢겨져 너덜거린다. 도로변에 자리한 종택은 지나는 사람들이 들렸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 훼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디를 가나 전각의 건물 대부분이 이렇게 창호지가 찢겨져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문화수준은 기대치 이하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안채는 ㄱ 자형으로 꾸며 꺾인부분에 안사랑과 안방 , 윗방을 배치해
안채 여인들의 생활을 보호한 점이 특이하다. 

사랑과 안채를 연결하는 중문채는 중문 등이 사라져 버려 뭉텅 잘린 느낌이 든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있으며, 문쪽으로 1칸의 마루를 놓고 방이 둘러쌓고 있는 형태이다. 제대로 복원을 하면 양반가의 위엄을 보일 수 있는 장수황씨 종택. 집안을 돌아보면서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든다.

여기저기 부족한 부분이 집의 전체적인 구성을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려는지. 못내 아쉬운 종택을 뒤로하면서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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