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인 8월 27일. 남원시 주생면에 소재한 주생초등학교 교정에서는 '주생면민 체육대회 및 경노잔치'가 열렸다. 개회식에 이어 여러가지 마을 단위별 시합이 있었는데, 요즘 들어 이런 축제 구경을 못한 탓인지 신기하기만 하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역시 농촌답게 새끼꼬기 시합이었다.

남여 2인 1조로 새끼를 누가 더 길게 꼬느냐에 따라 순위가 정해진다고. 그런데 무조건 짚을 두 가닥 이상씩 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마을은 남자가 꼬고, 어느 마을은 여자가 꼬기도 한다. 그 중 한 분, 새끼를 꼬는 표정이나 자세가 일품이다. 밑에서 부터 꼬아나가기 시작한 새끼줄이 길어지면, 점점 위로 올라간다. 이 표정과 자세, 진정한 달인이 아닐까?

이것이 진정한 달인의 자세...



한편에선 짚을 집어주고, 한편에선 짚을 꼬아나가고...


말없이 경기에 임하는 달인의 표정...


그 외에도 여러가지 경기가 있었다. 그 중 재미있는 것은 한 마을에 5명씩 나와서 축구공을 차는 것. 마음 같아서는 공을 잘찰 수 있겠지만, 이런 세상에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버린다. 골키퍼는 가만히 있어도 절반은 막았다는 것.


사진 1 : 차긴 찼는데
사진 2 : 이 정도면 자세 괘안아?
사진 3 : 얼라, 그런데 저 공 어디로 가냐?
사진 4 : 봐라 봐라, 공은 이렇게 차는것이제

남산 밑에 사는 사람이 남산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아무 때나 오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오를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남원으로 와서 생활을 한지 벌써 3개월이 훌쩍 지났다. 그러나 정작 남원 밖에 있을 때는 그렇게 자주 하던 남원 답사를, 정작 남원으로 내려와서는 등한시 한 듯하다.

8월 2일. 일과를 마치고 6시가 넘어 답사에 나섰다. 두어 곳 돌아보려니 하고 나선 길이다. 남원에서 곡성으로 나가다 보면,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번지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4호인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곡성으로 나가는 길에서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좁은 하천 곁에 석불입상이 서 있다.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

마을 진입로를 들어서니 석불입상의 위부분이 보인다. 주변은 비닐하우스와 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고려 때는 거대석불을 많이 조성하였다. 아마도 고려의 숙원인 북진정책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불상이나 석탑, 그리고 절 등이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은, 고구려의 옛 고토(古土)를 찾겠다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지당리 석불입상을 처음 보는 순간에 느낀 점은, 장중하다는 생각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많이 마모가 되었지만, 그 당당한 모습은 사람을 압도한다. 지당리 석불입상은 하나의 돌에 광배와 불신, 대좌를 새긴 불상이다. 현재 높이는 3.63m 정도이지만, 땅 속에 뭍인 대좌를 감안하면 4m가 넘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광만 조각을 한 특이한 형태

지당리 석불입상은 민머리 위에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높이 솟아 있다. 상투가 너무 커서 투박해 보이는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법의는 좌우대칭으로 곡선을 그리면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법의는 가슴부분을 깊게 파 뚜렷한 U자형의 표현을 굵게 하였다.

이 석불입상의 어깨는 1.15m로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다. 양 팔에 걸쳐진 소맷자락은 발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는, 머리 부분만 광배로 표현을 하였다. 두광의 지름이 1.82m 정도로 상당히 크다. 머리광배의 안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둘레에는 원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석불입상의 두 팔은 어디로 갔을까?

머리광배에 있는 연꽃무늬 등 세부표현은 상당히 간략화 되어 있어, 섬세함을 잃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형태로 볼 때 인근에 있는 보물 제43호인 만복사지 석불입상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고려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이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당당한 고려의 기개를 상징하듯 조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입구 밭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석불입상. 그 보호철책 밭으로는 석물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예전 절터가 아니었나 생각을 해본다.




한 가지 이 석불입상을 보면서 아쉬운 것은, 두 팔이 모두 사라졌다는 점이다. 팔을 끼웠던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팔이 있었다고 하면 좀 더 자세하게 이 석불입상의 존재를 알만한데, 팔이 사라졌음이 아쉽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바로 이렇게 부분이 사라져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아쉬움이 사라지는 날은 아마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문화재 답사를 계속하는 한은.


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산15-6번지. 좁은 마을 길 도로변 밑에 석불 입상 한 기가 서 있다. 이정표 하나 서 있지를 않아, 처음 찾는 사람들은 찾을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 마침 선원사 최인술 봉사단장이 이곳을 선원사 운천 주지스님과 함께 찾아와 보았다면서 안내를 하는 바람에 만날 수 있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7호인 이 석불입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던 것을,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상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입상과 광배가 조ㅘ를 이루고 있다. 언필 보면 떨어진 듯도 하지만, 광배를 다듬고 그 앞에 석불입상을 부조한 것만 같다.


낙동리 석조여래입상의 앞과 뒤

심하게 훼손이 된 안면

숲 속 길도 없는 곳을 찾아 들어갔다. 길 가에는 이곳에 문화재가 서 있다는 안내판도 보이지를 않는다. 보호 철책을 친 안으로 서 있는 석조여래입상은 뒤편에 세운 광배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깨어진 곳도 없다. 그러나 정작 석불의 안면은 심하게 훼손이 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다만 볼이 두툼하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듯해, 상당히 세심한 조각수법을 보였던 것만 같다. 어깨선이 유려한 것이나 발 밑까지 흘러내린 법의의 옷 주름이 부드러운 U자형으로 퍼진 것 등을 볼 때 상당히 수준 높은 석조여래입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이런 곳에 외롭게 서 있엇을까?




석조여래입상의 뒤편에 세운 광배는 온전하다.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꽃과 불꽃 무늬가 보인다. 자세히 살펴보면 광배의 뒷면을 잘 다듬은 것이나, 광배의 조각들로 보아 이 석조여래입상이 수준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옛 모습을 알아 볼 수 없음이 안타까워

석조여래입상을 찬찬히 훑어본다. 얼굴의 윤곽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균형이 알맞게 표현되었다. 두상의 크기와 알맞게 조형된 귀, 그리고 둥글게 형태를 지닌 얼굴.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가까이 갖다 대고 있다. 그러나 손은 다 마멸이 되어 보이지가 않는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보이고, 법의를 걸친 어깨선은 부드럽게 표현이 되었다. 법의의 주름은 넓게 퍼져 있으며 몸 전체를 감싸고 있다. 발목 부분부터는 주름을 잡아 표현하였다. 이런 표현이라면 만복사지 석불입상과 같은 수준의 조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심하게 마멸이 되어 알아볼 수 없는 안면, 잘려나간 손 등은 마음을 아프게 만든다.

숲 속에 혼자 외롭게 서 있는 남원 덕동리 석조여래입상. 아마 이 곳에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는 모르나, 고려 초기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벌써 천년 세월을 이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곳 인근에 절터라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알 수 없는 지난날과, 분간이 안되는 모습을 보면서 괜한 한숨만 토해낸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생긴 버릇 중 하나가 바로 한숨을 토해내는 것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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