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시장은 수원의 22곳의 재래시장 중 그 역사가 가장 오랜 전통시장 중 한곳이다. 예전 거북시장 인근에는 영화역과 객사가 있었다. 이곳은 장용외영 군사들이 묵는 곳이었고, 더구나 정조의 능행차 때도 이곳 영화역에서 가장 먼저 정조를 맞아들인 곳이다. 또한 한양으로 올라가는 많은 사람들이 장안문을 벗어나 이곳을 거쳐야만 했던 곳이다.

 

이 시장 일대는 영화역에 있는 말들을 키우는 마방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우리나라의 상권의 형성은 개성과 수원, 안성을 잇는 의주로(義州路)’가 바로 삼남대로 중 한곳이었다. 개성상인인 송상’, 수원의 깍정이’, 그리고 안성의 유기상인 마춤이등이 그것이다. 수원의 상거래 중심지 중 한 곳은 당연히 거대한 마방이 있는 영화역(현재의 영화동사무소 인근)이었을 것으로 본다.

 

 

정조대왕은 당시 화성인근에 6개소의 장시를 개설하도록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 중 한곳이 바로 거북시장이다. 거북시장 또한 팔달문 앞의 성밖시장과 같이 수원상권의 발원지였으며, 정조의 강한 국권을 만들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역이 500여 평 규모에 말을 키웠다는 것을 보면, 이곳이 상당히 번화한 장시였음을 알 수 있다.

 

변화한 거북시장의 모습

 

지금 거북시장은 많은 변화를 했다. 전선은 모두 지중화사업으로 인해 사라졌고, 간판과 외벽 등은 모두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그저 외형상으로만 본다면 이곳이 전통시장이 아닌 어느 서구의 한 거리를 거닐고 있는 듯하다.

 

우리 장안문 거북시장은 정조대왕의 화성 축성 시, 처음으로 시장을 개장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벌써 200년이 지난 유서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장이죠. 그런 시장이 수원시에서 경관 등 사업비를 지원해 7개월의 공사시간을 거쳐 이렇게 말끔하게 변화를 했습니다.”

 

 

거북시장 상인회 차한규(, 61) 회장의 설명이다. 18일 오후에 찾아간 거북시장. ‘ 차 없는 거리가 진행 중인 시장 한편에는 경인방송에서 전통시장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중계차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박수를 치며 즐거워하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사람들이 발길이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다.

 

새 수막거리의 옛 정경 그리워

 

장안문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은 새 수막거리였다. 예전에는 여정에 지친 행인들이 국밥 한 그릇에 텁텁한 막걸리 한 잔으로 피로를 풀 수 있는 곳이다. 장안문을 벗어나 이 거리에 들어서면, 손님을 맞이하는 분내 나는 주모의 얼굴이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당연히 수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쳤을 것이고, 그런 행인을 상대로 한 장시도 상당했을 것이다.

 

OBS 방송차량의 첫 손님은 요즈음 오빠야라는 노래로 한창 인기가 치솟고 있는 가수 박주희의 무대였다. 제일먼저 부른 노래는 자기야였다. 이어서 오빠야와 트로트 메들리로 차 없는 거북시장 거리에 모인 관객들을 흥겹게 만들어 주었다. 이날 초대가수에는 소명과 그 아들 소유찬, 진시몬 등이 출연하였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지나서 한양으로 올라가곤 했을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옛 수막거리의 정취는 사라졌다고 해도, 이렇게 달라진 거북시장에서 차 없는 거리까지 운영을 하고 있어, 우리 거북시장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죠.”

 

차 없는 거리에서 만난 한 주민은 사람들이 차 없는 거리 운영을 좋아한다고 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가 나왔다고 하면서 연신 휴대폰에 영상을 담고 있는 한 주민은, ‘차라리 시장거리를 상점들이 물건을 받는 시간은 빼고는 차 없는 거리로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기도.


조선시대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조선조 말기의 우리의 모습을 사진 등으로 보면서 늘 궁금하던 차다. 그런데 전라북도 정읍의 한 마을에 조선시대의 마을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은 곳이 있다. '송참봉 조선동네'라는 곳이다. 이 마을은 조선 말기의 마을 형태를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조선동내'라고 부르고 있다. 2월 17일 눈이 하얗게 쌓인 송참봉 마을 을 찾아가 보았다.

눈이 쌓인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20여 채의 초가집들이 자리를 하고 있다. 서당도 있고 주막집도 있다. 엣날식으로 외부를 꾸민 변소가 있는가 하면, 외양간에는 어미소와 송아지가 한가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마당에는 토종닭들이 돌아다니고, 한편에는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아궁이에는 잘작불이 타고 있는데, 겨울의 경치를 그대로 만끽할 수가 있다. 그야말로 조선시대의 풍취를 느낄 수가 있는 곳이다.


50여년 전에 마을이 있었던 곳

송참봉 조선동네는 50여년 전에는 큰 마을인 '월송동'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그런 마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곳이 논밭으로 변했다. 1995년 부터 이곳에 전통마을을 재현하기로 생각을 한 '송참봉'는 2005년 8월 부터 사업에 착수를 하여, 2008년에 들어서야 부분으로 완성을 하였다고 한다. 아직도 계속 조선 동네를 키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이렇게 100년 전의 우리의 민초들이 살아가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송참봉 마을은 옛 생활을 체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주말이 되면 집집마다 옛 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로 빈 집이 없다고 한다. 2월 17일은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눈이 쌓인 겨을날 뜨끈한 온돌방의 정취가 마냥 즐겁기만 하다.



눈이 내려 질퍽한 황토길은 흙에 신발에 달라부터 보행을 하기가 어렵다. 예전에는 호롱불을 켜고, 방안에는 요강을 들여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화재의 위험도 있고, 요강을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 그런 것은 조금 개선을 했다는 것이다. 100년 전 우리네 조상들의 생활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가를 알아볼 수 있는 체험의 장소로 소문이 나면서, 주말이 되면 제주도에서까지 학생들이 온다는 것이다.

새로운 명소로 자리를 잡아가

송참봉 조선동에는 정읍시 이평면 청량리 375-5에 해당한다. 1만 5천평의 대지에 20여 채의 초가가 모여있다. 그저 잊고 살아갈 모습들이 이곳의 모습이다. 송참봉 마을에 들어가려는데 마침 송기중(63세) 촌장이 사람들을 배웅하러 마을 어귀로 나온다. 잠시 목례를 하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방을 열어보니 옛 시골집에서나 맡을 냄새가 난다. 정겨운 냄새이다.




여기저기 집집마다 문패가 달려있다. 이 송참봉마을을 조성하는데는, 마을 주민들의 힘이 컸다고 한다. 잠시 둘러보아도 모든 것이 불편할 듯하다. 그러나 이런 환경 속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하루 저녁쯤 이곳에서 지내 볼만도 하다는 생각이다. 아이들과 함께 조심은 불편한 체험이 되기는 하겠지만, 살아있는 공부가 아닐는지 생각을 한다.
    
옛 모습을 잃어버리기 보다는 남겨 놓아야

송참봉 조선동네를 돌아보다가 잠시 송기중 촌장과 이야기를 한다. 알고보니 '갑장'이라는 말에 조금은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다. 이런 마을을 조성하게 된 것도 우리 것을 너무 급작히 잃어버리는 것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우리의 옛 선조들의 사람의 모습을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시작을 하였다는 것이다. 조선동네에서는 먹거리의 전체가 우리 농산물이다. 마을 전체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방을 덮힌다.




잠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마을을 찾아 온 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저 오래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것도 이곳에서는 호사라는 생각이다. 후일을 기약하고 돌아나오다가 벽에 붙은 안내문을 본다. 대인은 하루 저녁에 만원, 초등학생은 5천원이다. 그 아래 어린아이들은 무료라는 것이다. 음식 값도 백숙만 3만원이고 참봉밥, 두부, 전, 막거리 등은 5천원 씩이란다.   

옛 담벽을 그대로 닮은 집들이며 아궁이, 그리고 방문을 열어보면 금새 초가의 처마에서 떨어진 노래기들이 기어 다닐 것만 같은 집들이다. 주막집에서는 우리 농산물로 지은 먹거리와 막걸리 등이 사람들의 입맛을 다시게 한다. 그저 당장 그 자리에 앉아 한 잔 막걸리라고 마시고, 펄펄 끓는 아랫목에서 늘어지게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그럴 수 없음이 못내 안타까워 후일을 기약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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