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해미읍성을 다녀온 지 20여 일이 지났다. 답사를 하면 그때그때 바로 기사를 올려야하지만 현장 취재에 늘 뒷전으로 밀려버리고는 한다. 해미읍성은 벌써 수십 번은 더 다녀온 곳이다. 대전에 있을 때부터 이곳은 자주 찾았던 곳이라 어느 성보다도 눈에 익은 곳이다. 그런 해미읍성을 몇 년 만에 다시 찾아가보니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해미읍성은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번지에 소재하는 사적 제116호이다. 해미읍성은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평산성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그 중 북문은 암문으로 조성하였다. 읍성의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는 했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인 1417년부터 세종3년인 1421년 사이에 5년간의 세월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으로 옮기려고 쌓은 성이다. 효종3년인 1652년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이었다. 이 성은 적이 침입을 하지 못하도록 성 주위에 탱자나무를 심어 탱자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한 시간 반 만에 성을 두 바퀴 돌아

 

해미읍성을 답사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였다. 그 시간 안에 꼼꼼히 돌아보기 위해서는 뛰어다녀야 할 판이다. 1.8km의 성을 돌아보는 데야 길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성의 이모저모를 일일이 촬영하고 기록하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남문인 진남문으로 들어가 위 문루로 오른다. 북쪽으로 곧게 난 길 끝에 아문과 동헌, 내아, 객사 등이 보인다.

 

 

아문으로 행하던 중 만난 회화나무와 옥사 등을 둘러보고 난 뒤, 발걸음을 재촉해 동헌과 내아, 그리고 객사 등을 일일이 촬영을 하였다. 그리고 서문 밖으로 나와 순교지를 돌아본 후 바로 성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여장은 복원되지 않았지만 잘 정리가 된 성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꼼꼼히 살핀다.

 

북암문 쪽으로 난 성벽은 낮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이다. 복원을 한 해자 위에 나무다리가 걸려있다. 북암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으로 성문 주위를 견고하게 쌓았다. 복원을 한 해자 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른들도 빠져 나오기가 힘들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해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성을 돌아 동문으로 향한다.

 

 

이순신 장군도 이곳에서 군관으로 있었다.

 

북암문에서 동문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져있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동문을 통해 성내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동문 역시 굳게 닫혀있다. 남문과 서문만 개방을 한 것이다. 성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대개 성안만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처럼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성 밖을 돌아보는데 이렇게 문이 닫혀 있으면 이럴 때는 조금 난감하다.

 

답사를 하는 날은 기온이 꽤 높았다. 날씨가 쾌청해 성을 촬영하기에도 제격이다. 동문 문루 양편에 꽂아 놓은 깃발들이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룬다. 동문을 보고 난 뒤 다시 성을 거슬러 돌아본다. 혹시 지나친 곳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서문을 지나니 두 곳의 치성이 있다. 왜 이곳에만 이렇게 치성을 쌓은 것일까?

 

 

선조 11년인 1578년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 간 이 해미읍성이 있었다고 한다.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현감이 이 성으로 옮겨와 겸영장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고 한다. 호서좌영인 해미읍성은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 동안 내포지방 12개 군현을 군권을 지휘하던 곳이다.

 

천주교 박해의 순교지로 더 알려진 해미읍성. 잘 복원된 성을 돌아보면서도 왠지 가슴 한편이 싸하다. 아마도 수많은 생명이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인가 보다. 교황이 이곳을 순방한 후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진남문 앞에 거리도 말끔하게 단장을 하였다.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 가을 풍광에 젖어보아야겠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에 소재한 사적 제145호 고창읍성.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인 1453년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성곽연구에 좋은 자료인 고창읍성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답성놀이란 일명 성밟기, 성돌기라고도 하며 부녀자들이 한다.

 

이 놀이의 목적은 대개 마을의 평안과 개인의 액막이를 겸하는 것이나, 외적을 방비하는 성을 1년에 1번씩 점검하고 발로 성을 밟아 견고하게 다지는 목적도 있다. 유명한 곳은 개성, 고창, 영광이다. 고창의 답성놀이는 주로 부녀자들이 머리에 작은 돌을 이고 모양산성을 돌아오는데 3번 도는 것이 특색이다. 이렇게 하면 소원성취를 하며 다리에 병이 없고 극락왕생하게 된다고 믿는다. 머리에 이고 가는 돌을 떨어뜨리면 불길하고, 성을 2번만 돌고 와도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헌 등 22개 전각이 있던 고창읍성

 

성 안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병화 등으로 소실이 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읍성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바로 정문이자 북문인 공북루를 만나게 된다. 공북루 앞에는 옹성을 쌓아 적의 침략에 대비를 하였는데, 이러한 축성방법은 고구려 때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옹성위에는 여장을 쌓아 성안에서 성밖을 관찰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옹성 안으로 적이 성문을 부수기 위하여 들어온다고 해도, 옹성에서 쏟아 붓는 화살과 기름, 돌 등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더욱 옹성 안이 좁아 그 안에서 성문을 부술 수 있는 공성무기를 사용하기도 힘들다. 옹성에는 밖으로 기름 등을 부을 수 있는 현안과, 총안을 내어 놓았다.

 

 

공북루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옥사가 있다.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관옥 또는 원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옥사는 대개 관아의 입구에다가 짓고, , 여를 구분하여 가둘 수 있도록 하였다. 옥사의 주변에는 높은 담을 둥그렇게 둘러치기 때문에 원옥이란 이름을 붙였다.

 

관리사무소 뒤에는 향청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가 있었다. 향청은 지방의 방백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 지방의 향리를 구찰하고, 향풍을 바로잡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향청에서 성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약수터가 있다. 성안에서는 식수가 가장 중요하다. 오랜 시간을 적과 대치를 할 때는 식수가 없으면, 그만큼 버티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약수터를 빗겨서 풍화루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 옆에는 연못이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풍화루는 이층 누각으로 지어졌으며 기록에는 고창읍성 안에는 빈풍루와 풍화루가 있다고 했다. 풍화루란 글 그래도 고을의 풍년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지어진 정자다.

 

 

백성을 생각하는 수령이 있던 고창읍성

 

풍화루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고창 동헌과 내아가 있다. 동헌이란 조선시대의 목과 도호부, , 현 등 각종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는 청사를 세웠는데, 이를 동헌이라 하였다. 동헌의 정면에는 평근당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백성과 가깝게 있으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다.

 

동헌의 옆에는 내아가 있다. 내아는 고을 수령의 살림집을 말한다. 흔히 동헌을 내동헌과 외동헌으로 구별을 하는데, 외동헌은 집무를 보는 곳으로 이를 동헌이라고 하고, 살림을 하던 내동헌을 내아라고 부른다. 동헌의 앞쪽에도 숨겨 놓은 듯한 우물이 있다.

 

 

동헌에서 남서쪽으로 높은 곳에는 고창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을마다 있던 객사는 중앙에는 몸채라는 정당(正堂)이 있다. 정당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는 궁궐을 에를 올렸다. 양편에 있는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고창객사의 현판에는 모양지관이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고창을 모양이라고 했고, 성을 모양성이라고 한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객사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면 연못 조금 위편에 작청이라고 현판이 걸린 건물이 있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는데 이방과 아전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다. 작청에서 북문 쪽으로 내려가다가 우측을 보면 관청이 있다. 관청은 관주라고도 부르며, 이곳은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일을 맡아하는 곳이다.

 

관청에서는 수령과 그 권속들, 그리고 빈객에 대한 예우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모든 물품의 조달과 관리를 맡아하던 곳이다. 현재까지 성안에 자리한 복원된 건축물 돌아보았다. 관청에서 옆으로 난 소로길을 이용하면 성곽길을 오르게 된다. 올라가다가 보면 소나무 숲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고는 한다.

 

 

치성을 쌓아 적을 공격

 

성 위로 오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치다. 고창읍성에는 6개소의 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치란 꿩을 말하는 것으로 성곽의 일부분이 밖으로 돌출이 되어있는 것을 일컫는다. 이 치의 용도는 상당하다. 적이 성벽을 기어오를 때 치에 있던 병사들이 공격을 하면, 적은 뒤에서 협공을 당하게 된다. 고창읍성의 경우에도 지형지세를 이용해 성을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치와 옹성에서 바라다 보이지 않는 곳은 성의 한 부분을 굴곡지게 쌓아 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였다.

 

천천히 걸어 성의 남쪽으로 향하니 읍성의 동문인 등양루가 나타난다. 동문 역시 옹성을 쌓아 적의 침입에 대비를 하였다. 수원 화성이 국가적으로 온 나라가 나서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했다면, 고창읍성은 전라우도인 고창, 고부, 김제, 무장, 영광, 옥구, 용안, 장성, 정읍, 제주, 진원, 태인, 함평, 흥덕과 전라좌도인 능성, 담양, 순창, 용담, 임실 등 19개의 군과 현 등에서 모인 사람들이 3년 동안을 쌓은 성이다.

 

성 밖에는 각 고을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자신들이 맡아 쌓은 구간과 고을 이름을 성벽에 새겨두고 갔는데, 일부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자 재현을 시켜 성 밖에 구간별로 세워 놓았다. 이렇게 민초들의 힘을 쌓은 고창읍성은 크지는 않지만 나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으로 쌓은 성으로 매우 견고한 성곽이다.

 

등양루는 동편 오르막에 세워져 있다. 등양루를 지나 동치 쪽으로 오르다가 보면 얼마나 잘 축성된 성곽인지 그 모습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동문인 등양루를 지나 성을 타고 한 바퀴 돌다가 보면 동남치와 남치를 거친다. 그런데 고창읍성에는 남문이 없다. 일반적인 성들은 문이 동서남북에 있는데 비해, 남문이 없다는 점이다.

  

남치의 안쪽을 보면 상황사가 있다. 요즈음은 성황당이 마을을 지켜주는 서낭신이 있는 곳으로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성황사가 고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황사에서는 성황신을 내려 모시고 고을의 방백이 직접 제를 올렸다.

 

성황사를 거쳐 성곽을 타고 내려오면 서남치를 거쳐 서문인 진서루가 나타난다. 진서루의 형태는 북문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옹성을 쌓아 놓았다. 진서루를 둘러보고 내려오면 공북루로 돌아오게 된다. 20여리가 미치지 못하는 고창읍성. 그러나 성을 돌아보면 그 성을 쌓은 민초들이 얼마나 정성을 다해 축성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민초들이라고 달라질 수가 없다. 고창읍성을 돌아보면 호국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지만 아름다운 성곽. 오늘 고창읍성은 오랜 역사를 그렇게 지켜보면서 말없이 서 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1에 소재한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일명 일장성日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에 일어난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제 때의 성으로도 알려진 남한산성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 , 남문루와 수어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은 각종 시설이 잘 정비되어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힌다.

 

한강과 더불어 남한산성은 삼국의 패권을 결정짓는 주요 거점이였다.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이후 백제인들에게 있어서 남한산성은 성스러운 대상이자 진산으로 여겼다. 남한산성 안에 백제의 시조인 온조대왕을 모신 사당인 숭열전이 자리 잡고 있는 연유도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아픔을 당한 남한산성

 

남한산성의 축성은 인조 2년인 1624년부터 오늘의 남한산성 축성 공사가 시작되어 인조4년인 1626년에 완공하였다. 산성 내에는 행궁을 비롯한 인화관, 연무관 등이 차례로 들어서 수백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문화유산은 1894년에 산성 승번제도가 폐지되고, 일본군에 의하여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8월 초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작금에 들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남한산성. 연차적인 복원공사를 통해 지금은 많은 구조물과 성벽 등이 옛 모습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남한산성은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으로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쌓았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남한산성의 총 길이는 11.76km에 달한다. 본성은 9.05km이며 옹성이 2.71km이다.

 

 

남한산성 제1암문을 돌아보다

 

남한산성의 축성 때 승병들이 묵었던 9개소의 사찰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는 장경사. 그 주차장 한편에 성 밑으로 내려가는 암문이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암문은 본성에 11, 봉암성에 4, 그리고 한봉성에 1개가 설치되어 있다. 암문이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비밀통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적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하게 적의 배후를 교란하거나, 식량을 은밀히 운반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장경사 암문이라고도 부르는 제1암문은 형태가 특이하다. 딴 암문들은 성곽을 돌출시키고 그 안에 암문을 숨겼지만 이 암문은 좌우의 성벽이 돌출되어 있지 않다. 성벽에 아취모양을 구성하고 그 안에 문을 달았다. 문의 기둥을 고정시키는 돌출부는 아래와 위 양편에 조성한 것으로 보아 이 암문은 작지만 두 짝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암문은 성벽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높아진다. 이곳은 경사가 급하고 성벽이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주변의 성벽에는 몇 개의 수로가 나 있다. 바닥에는 돌을 깔았으며 천정도 커다란 장대석을 이용해 덮었다. 암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경사로 통하게 되어있어, 비상시에는 많은 승병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4일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오랜만에 답사를 하리라 마음을 먹었기에, 모든 일을 젖혀두고 길을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안산시 상록구 초지동에 위치한 조선 초기에 쌓은 평산성인 별망성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수원 화성을 늘 돌아보면서 전국에 있는 성곽을 다 돌아보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래도 4~5년 전에는 한 해에 5곳 이상의 성을 돌아보았으나, 이제는 고작 1년에 한 두 곳 밖에는 돌아보지 못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바빠진 것인지, 아니면 게으름을 떠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매일 바쁘게 사는 것을 보면 게으름을 떠는 것은 아닌 듯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74호인 별망성지는 새로 복원을 한 곳이다.

 

 

바다에 근접해 있는 평산성

 

예전 별망성이 있던 곳을 여곶또는 초지영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별망성은 바다에 근접해 있는 야산의 능선을 연결하고, 남쪽으로는 해안에 닿아 평지를 감싸 안으며 축성이 되었다. 별망성은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도록 축성한 해안 평산성이다. 별망성은 15세기 이전에 이미 축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별망성은 조선 초기 남양만을 거쳐 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그렇기에 높지 않은 산에서 바닷가까지 성을 잇대어 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초기의 기록에 이곳에 수군만호영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적고 있다. 초자양영은 효종 7년인 1656년에 강화도로 옮겨 가면서 폐지되었다.

 

 

1988225m를 복원 해

 

별망성지라는 안내판에 보인다. 별망성을 오르는 입구 주차장에는 차 한 대 댈 공간이 없다. 근처에 공사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의 차인 듯하다. 차를 피하여 계단을 오른다. 그저 얼마 오르지 않아 성벽의 안에 쌓은 토축이 시야에 들어온다. 둘레가 1,040m에 성벽의 높이는 1.2~2.1m이었다고 기록에 보인다.

 

이렇게 남아있던 성벽도 6,25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던 것을, 1988년에 일부 복원을 하였다. 현재의 성벽은 복원한 것으로 길이가 225m에 높이 1.45m 정도이며, 지형에 따라 높낮이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 성벽은 바깥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았으며 안쪽은 완만하게 흙을 다듬어 토축으로 쌓았다.

 

 

계단을 오르니 이곳에 별망성이 있었음을 알리는 비가 한 기 보인다. 앞으로 나아가니 치성이 돌출되어 있다. 성 위를 걸어 한편 끝으로 나가 성 밖으로 걸어보았다. 높지 않은 성벽은 그저 편안히 걸을만한 그러한 길이다. 복원한 성벽에는 두 곳의 치성이 보인다. 한편은 성이 해안으로 내려가는 곳에 있어 시야를 확보하기에 편하게 조성하였다.

 

250년 정도 존속했던 별망성

 

이 성 안에는 군대가 머물렀던 60정도의 편평한 터가 있었으며, 그 언저리에서 자기와 조각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문헌 자료나 기록으로 볼 때 조선조 초기에 축성된 것으로 보이는 별망성. 17세기 중엽에 폐기되기까지 약 250년 정도 서해안의 방어를 담당하던 중요한 성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모르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원의 화성은 세계문화유산이요 사적이기도 하다. 수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그 화성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비해, 수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그러할까? 그 점은 늘 의문으로 남는다. 성벽을 돌아보면 주변에 산재한 쓰레기들과 반려견의 분비물들이 널려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아직 시민의식이 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쓰레기는 외지에서 찾아 온 사람들이 버리고 갔다고 쳐도, 반려견의 분비물은 어떻게 설명을 할 것인가? 심지어는 사적 안에 버젓이 반려견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저 정도면 시민의식이 아예 실종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침 일찍 찾아간 별망성지. 수원 화성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는 시간이었다.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 1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사적 제57호 남한산성. 이 남한산성은 조선 왕조의 치욕과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슬픔이 함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온조왕 때에 처음으로 축성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것은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3년인 673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성이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조선조『세종실록지리지』에는 남한산성을 ‘일장산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치욕의 아픔을 지닌 산성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인 1624년이다. 인조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였다. 이런 일로 인해 남한산성은 조선조 역사에 치욕의 성이 된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남한산성 내의 시설로는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등이 있다. 이 중 광주시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동문을 찾아보았다. 동문은 성의 남쪽에 위치하며 광주 중부면에서 오르다가 만나게 되는 문이다. 현재 동문 앞의 오르막길은 일방통행으로 갈라져 있고, 그 만나게 되는 지점에 동문이 서 있다.

 

 

수문, 제11암문과 함께 있는 동문

 

동문은 그 옆으로 수문이 나 있고, 수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 있다. 동문은 낮은 지대에 서 있기 때문에, 계단식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조성을 하였다. 하기에 이 문을 통해 우마차가 다닐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문의 편액에는 ‘좌익문’이라고 적혀있다. 이는 행궁을 중심으로 남쪽을 바라보면 좌측에 해당하므로, 좌익문이라고 한 것이다.

 

이 동문은 조선조 선조 때 보수를 하였고, 인조 2년인 1624년에 다시 건립을 하였으며, 정조 3년인 1779년 성곽 개축시 함께 보수를 하였다. 동문 밑으로 현재 길을 내느라 성곽이 터진 아래편으로는 수문이 숨어 있다. 남한산성은 해발 370~400m의 능선을 따라 축성을 하였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남한산성의 지형상, 산성 내의 모든 물은 대부분 이 수문을 통해 외부로 흘러나갔을 것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을 정도로 수원이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한의 문이 되어버린 동암문

 

수문의 바로 위편으로는 경사가 급한 성곽이 보인다. 이곳에는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원래 군사들이나 물자를 적에게 발견이 되지 않게 운송하기 위하여 축조한 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을 섬멸하기 위한 성의 귀중한 요소이다.

 

남한산성 내에는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 높이 3.07m, 길이 5.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아마 이 동암문이 이렇게 큰 이유는 동문이 계단식 축대위에 축조를 했으므로,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 동암문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재 동암문은 문짝은 없고, 문짝을 달았던 돌틀이 남아있다. 이 동암문을 일명 ‘시구문’이라고 부른다. 시구문이란 시신을 내어보내던 문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기해박해를 통해 한덕운(토마스), 김덕심(아우구스티노), 정은(바오르) 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을 버린 곳이기 때문이다.

 

많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남한산성. 그 요소요소마다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남한산성의 곳곳을 뒤돌아보게 한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한산성 전역을 돌아보며,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내는 것도,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일이 아닐는지.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