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답사를 하면서 가장 기분 좋은 것은 역시 한 곳에 많은 고택이 몰려있는 곳을 방문했을 때다. 경주 양동마을이 그렇고 순천 낙안마을이 그랬다. 온양 민속마을도, 강원도 고성에 있는 마을도 그랬다. 그런 곳을 방문하면 내 눈빛이 달라진다는 것이 동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내가 그렇게까지 고택답사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그 안에 우리의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 때 묻은 우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사는 요즈음, 그 하나의 작은 것들이 새삼스럽게 소중하게 가슴에 와 닿기 때문이다. 벌써 전국에 있는 고택을 돌아본 것이 그동안 200여 채는 됨직하다.

 


특별환 날에 나선 답사, 수지맞았다


남들이 특별한 날이라고 하는 날도, 난 탑사를 떠났다. 그들이 말하는 생일이나 회갑이나 하는 날이, 나에게는 특별한 날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연장일 뿐이다. 그런 날 오히려 문화재 답사 한 곳이라도 더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런 나를 두고 '이상한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이상함이 사실은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것을 찾아나서는 길이 '이상하다'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내가 보기에는 이상할 뿐이다. 제천시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 이곳을 몇 번이나 들렸지만, 그렇게 고가들이 있었는데도, 지금까지는 사진 몇 장으로 지나쳐버렸다.

 

뒷간

이번 답사에는 마음을 먹고 떠난 길이라, 세세한 것까지 보고 오리란 생각으로 들렸다. 오후 시간이라, 특별한 날 점심도 못 먹고 사진만 찍고 있는 나에게 '정신 차리라'는 일행. 그러나 난 정신을 놓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배가 고픈 것을 잊을 만큼, 그 작은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


시골의 양반집인 청풍 황석리 고가


청풍문화재 단지 안에는 모두 4채의 고가가 있다. 이 고가들은 충주 다목적댐의 건설로 인해 수몰이 된 문화재 중에서, 청풍면 일대에 있던 중요문화재를 1983년부터 옮겨 문화재단지를 조성한 곳이다. 황석리 고가는 청풍면 황석리에 있던 조선말기의 목조가옥이다. 수몰지역에 있던 것을 1985년 문화재단지로 이전하였다.

 

 

대문채

청풍문화재단지를 들어서면 우측으로 4채의 고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데,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집이 황석리 고가이다. 대문을 초가로 꾸민 황석리 고가는, 입구부터 옛 이야기가 물씬 풍길 것만 같다. 


황석리 고가는 조선시대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집이다. 초가로 지어진 대문채는 크고 작은 강돌을 이용해 아름다운 문양을 만들었다. 벽도 이중으로 된 심벽으로 되어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대문채의 방문이 있다. 적기는 해도 양반집이니 당연히 머슴이 있었을 터. 아마 이 방에서 밤새 새끼라도 꼬다가, 주인영감이 들어오면 문을 얼어주고는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방문이 대문 쪽으로도 나 있다. 비교적 원형을 잃지 않고, 방위까지 수몰되기 전 모습 그대로 옮겨왔다는 황석리 고가다.

 

 

안채

 

4칸의 일자형 양반집, 편의를 생각해 짓다


황석리 고가의 특징은 좁은 마당을 적절하게 잘 이용했다는데 있다. 4칸 규모의 일자형 안채는 부엌, 안방, 윗방, 사랑방으로 꾸몄다. 그런데 부엌을 들어가는 입구에 뒤주 간을 만들었다. 또한 안채의 앞에 놓은 마루에서 밖으로 신을 신고 나가지 않고, 바로 부엌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마루와 부엌이 연결되는 곳에 문을 내었다. 부녀자들이 어려운 살림살이에서 움직여야 하는 동선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한 흔적이 집안 곳곳에 배어있다.


황석리 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있다는 점이다. 일자형으로 길게 구성이 되어있는 황석리 고가는 안방과 윗방, 사랑방의 앞에 모두 마루를 깔았다. 사랑채와 안채의 구별이 되지 않는 일자형 집에서 흔히 보이는 형태이다.

 

 


오밀조밀한 부엌, 그래도 명색이 양반집인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황석리 고가에는 흔한 헛간채나 광채가 없다. 그러다보니 여기저기 헛간을 대신할 공간을 꾸며 놓았다. 명색이 양반집인지라 함부로 밖에 늘어놓을 수는 없었는지, 부엌의 한편을 헛간으로 사용을 했다.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면 좌측 초입에 헛간에 둠직한 소쿠리며 농기구 등을 정리해 놓았다.


이런 것도 알고 보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부엌은 불을 떼는 곳이므로, 늘 불기운이 있어서 건조가 잘된다. 농기구나 소쿠리 등을 부엌에 두면, 녹이 슬지도 않을 뿐더러 습기가 차지 않아서 좋다. 작은 집이라고 하지만 나름대로 이점도 있다. 황석리 고가는 이러한 점을 최대한 활용을 한 기능성 맞춤집이다.  

 

 


또 하나 황석리 고가에서 볼 수 있는 부엌의 특징이 깊은 부엌이다. 그래서인가 까치구멍을 나뭇조각으로 막지를 않고, 그냥 통으로 구멍을 냈다. 깊은 부엌이 위에서 부는 바람을 아래까지 들어오지 않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도 이 가옥의 특이한 건축법의 하나이다. 그저 평범한 고택인 듯하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재미난 것이 많은 것도 황석리 고가가 주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집은 잘 살던 집이 아닌가봐'라는 관광객의 말에 뒤를 돌아본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집 주인이 청렴한 양반이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일까? 그저 크기와 호화로움 만으로 가치를 따지려는, 요즈음의 사람들이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자연과 더불어 살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이 있는 특별한 집이 있다. 충북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소재한 중요민속문화재 제137호인 박도수 가옥은, 안채의 대청과 건넌방 사이에 광을 두고 있다. 날이 추워서이지 겨울철 난방을 하느라 비닐로 안채의 전면을 모두 막아 놓았으나, 전면에 보이는 살창이나 대청과 붙은 쪽의 판장문 등이 광임을 알 수 있다.

왜 이곳에 광을 들여놓았을까? 박도수 가옥은 현재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안으로 들어가는 실례를 범할 수가 없었다. 비닐로 막은 안쪽을 자세하게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집이다.


판자벽으로 막은 문간채의 조형미

대문채의 앞에는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좌측으로부터 대문, 두 칸의 방과 광으로 구성된 대문채는 초가로 지어졌다. 20세기 초에 지어졌다는 대문채는, 한편을 판자벽으로 막아 헛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단순한 판자벽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농기구 등을 쌓아두는 헛간으로 사용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부정형의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았다. 두 칸의 방 앞에는 툇마루가 없이 바로 툇돌로 내려가게 돌을 놓았다. 대문채의 바깥쪽 문틀을 꾸민 목재의 문양으로 보아, 이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듯 하면서도 고졸한 멋을 풍기고 있는 박도수 가옥의 대문채다.



특히 대문채의 안으로 들어가면 판자로 만든 굴뚝이 더욱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마치 푸근한 고향집을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그러한 정겨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런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살기에는 불편할 줄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정말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집이다.

모채의 쓰임새는?


박도수 가옥은 - 자형의 대문채와 ㄱ 자형의 안채가 있고, 건넌채인 모채가 트여진 쪽을 막고 있어 전체적으로는 튼 ㅁ 자형으로 꾸며졌다. 20세기 초에 대문채와 함께 지어진 모채는 대문채 옆에 난 일각문을 통해 드나들 수가 있도록 하였다. 양편에 부엌을 두고, 가운데 두 칸의 방을 드린 모채는 어떤 용도로 쓰였을까?

아마도 대문채를 사랑으로 사용했을 경우 이 모채는 행랑채의 용도로 사용이 되었을 것 같다. 기존의 문간채나 안채보다 단순하게 지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운데 방을 두고 양편에 부엌을 둔 것이 이 모채의 용도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또한 모채를 드나드는 별도의 문인 일각문을 두었다는 점도 그러하다.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의 구성에서 보면, 이 모채 외에는 행랑채로 사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안채에 낸 광은 종자를 보관하는 곳?

비닐 밖에서 확인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아쉬움이 남는 박도수 가옥. 전체적으로는 서쪽에 부엌과 안방, 윗방을 차례로 두고, 꺾어진 부분에서 두 칸 대청과 광, 건넌방을 두고 있다. 특이한 것은 바로 이 광이다, 광을 이곳에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농이었다는 박도수 가옥에서 마땅히 광을 둘만한 공간 확보가 어렵다고 해서 안채에 광을 둘 이유는 없다. 아마도 이 광의 용도는 농작물의 종자를 보관하는 곳이었던 곳 같다.



대청에 다락을 만들어 사당을 드린 것도 이 가옥의 남다른 면이다. 광을 지나면 건넌방의 마루를 높이고 투박한 난간을 둘러놓았다. 아마 이 건넌방을 안사랑방으로 사용을 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일반 가옥보다는 특이하게 꾸며진 박도수 가옥. 집안의 구성이라든가, 꾸밈이 전례가 없다는 집이다. 동치(同治) 3년인 1864년에 지어졌다는 상량문이 있는 박도수 가옥. 그 특이함이 눈길을 끈다.




안채의 서쪽 끝에 있는 부엌은 대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해 판자 바람벽을 설치했다. 그리고 위편에 까치구멍을 내고, 아래편에도 까치구멍을 내었다. 대농의 집이라기엔 조금은 좁다는 느낌이 들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좁은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안채 뒤편의 툇마루가 그러하다, 일반 가옥의 툇마루보다는 넓게 꾸며졌다.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물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이 가옥의 특징이다.

최신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