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가 보면 가끔 황당한 일을 당하고는 한다. 그렇다고 나쁜 일은 아니다. 어제 저녁 잠을 설치는 바람에 아침에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모르는 번호지만 전화를 받았다.

 

나다. 나 지금 공항인데 바로 수원으로 간다.”

언제 나왔냐?”

지금 도착했다니까

. 그럼 형네로 가든지 누나네 집으로 가라

수원 가는 공항버스 벌써 탔다

 

 

참 매년 이맘때가 되면 한국으로 나오는 친구 녀석이다. 걸음을 걷기 전부터 이웃에서 살던 친구와 나는, 네 집 내 집이 없었다. 그저 아무 집이나 가서 쓰러져 자면, 그 집이 바로 자기네 집이었으니까. 거기다가 부모님들도 친구고 심지어는 누나들까지도 서로 친구였으니, 남이라고 할 수도 없이 형제처럼 함께 자랐다. 심지어는 동네 분들이 쌍둥이라고 했으니.

 

그래도 친구밖에 없어

 

이 친구가 찾아오는 것은 한 가지 이유이다. 어릴 때부터 형제와 같이 자랐으니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먼 길을 달려오는 것이다. 하지만 꼭 , 밥해 놔라라고 말을 그친다. 친구가 해 준 밥이 맛있다고 하지만, 정말 맛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친구와 함께 한 상에 앉아 밥이라도 먹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서둘러 집을 치우면서 혼자 투덜댄다. ‘이 녀석은 맨 날 내가 무슨 제 마누라인줄 아나 서방인 줄 아나라면서. 하지만 그 투덜거림이 기분이 나빠서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눈물이 나도록 고맙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도 혼자 나와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도, 무던히도 한국만 나오면 날 찾아와 귀찮게 한 녀석이다.

 

그 속마음을 알기 때문에 고맙기만 하다. 속초에 있을 때도 쉽지 않은 길을 달려와 밥 한 그릇 먹고는 바로 사라져버리고는 했다. 몇 시간을 달려와 고작 밥 한 그릇 먹겠다고 찾아 온 것은 아니다. 어릴 적 형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했으니, 그리고 서로가 눈만 보아도 마음을 읽어낼 수 있으니 찾아오는 것이다.

 

 

친구를 위해 마련한 밥상

 

혼자 생활을 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늘 찬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주변에 있는 아우들이 항상 챙겨주기 때문에, 오히려 남들보다 찬이 더 많다. 이렇게 갑자기 누가 들이닥쳐도 비로 상을 차릴 수 있으니, 먹을 복은 타고났는가 보다. 이 친구 녀석 어릴 때부터 함께 잠을 자고 밥을 먹고는 했으니, 자연적으로 식성이 같아졌는지. 녀석은 음식도 같은 것을 좋아한다.

 

야 역시 한국에 나와 밥은 너한테 와서 먹어야 제 맛이 나더라.”

이젠 제발 그만 좀 와라, 아니면 나가서 사 먹든지

미쳤냐. 맛있는 밥을 두고 왜 나가서 먹어

 

이렇게 만나서 함께 얼굴을 보는 시간이 불과 한 시간 남짓이다. 그 시간을 얼굴이라도 보고 가야겠다고, 그 먼 길을 달려온 친구다.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고 하면 내 생활이 엉망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멀리서도 무슨 일만 있으면 전화로라도 걱정을 해주고는 했다.

 

 

요즈음 좋은 사람 안 생겼냐?”

주변에 다 좋은 사람들이지

그런 좋은 사람 말고. 형님이 사람 하나 소개시켜줄까?”

됐네, 이 사람아

오늘 밤에 제사 모시고 내일 새벽 비행기로 출국한다. 형님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내년에 보자

 

60 중반에 든 남자끼리의 우정이란, 아마도 다시 아이가 되어가는 것만 같다. “내년에는 오지 말고 누나네 집으로 바로 가라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 친구가 내년 이맘 때 연락이 없으면, 아마 불안해서 못 살 것 같다. 그렇게 얼굴 보여주고 밥 한 그릇 먹고 훌쩍 떠나버린 친구 녀석.

 

그래 매년 괴롭혀도 좋으니, 그저 건강하게 오래도록 보자 친구야

옛 임금들의 능원이나 제를 지내는 전각 옆에는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이 우물은 일반인들이 사용할 수가 없다. ‘어정(御井)’ 혹은 ‘제정(祭井)’이라고 부르는 이 우물은, 임금의 제를 올릴 때 사용하는 물을 긷는 곳이다.

사적 제115호인 정조 임금의 어진을 모신 화령전에는, 운한각을 바라보고 좌측 담 너머로 우물이 자리한다. 이 우물은 일반적인 어정이 둥근 형태로 조성을 한데 비해,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려 우물을 조성하였다. 아마도 이 우물은 화령전을 축조할 당시인 1801년에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

2011년 12월 10일 찾아간 화성 행궁. 날이 쌀쌀하긴 해도, 빠른 시간 안에 많은 곳을 돌아보자니 등줄기에 땀이 밴다. 언제나 그렇듯 답사는 늘 발길이 바쁘다. 그저 남들은 사진 하나 찍으려고 있는 대로 폼을 잡고는 하지만, 나 하고는 거리가 멀다.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으려면, 남들보다 더 많이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제정의 옆에는 전사청을 비롯하여 제기고와 향대청 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005년도에 복원이 된 제정과 전사청만이 있다. 전사청이란 제사를 관리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는 젯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고는 했다. 제기고는 제사에 사용하는 그릇 등을 보관하는 전각으로, 외삼문과 내삼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향대청은 전사청 부근에 있었으며, 제사에 사용하는 향과 초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조 순조 1년인 1801년에 축조된 화령전은, 순조가 아버지인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사지내던 건물이다. 23대 임금인 순조는 이곳에서 노인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베풀기도 하였으며, 직접 정조가 태어난 탄신일과 돌아가신 납향일에 제향을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납일(臘日)’이란 동지로부터 세 번째 미일(未日)을 말한다, 신라와 고려 시대에는 그 날이 달랐으나, 조선시대에 와서 동지 이후 세 번째 미일(=양의 날)로 정한 것이다. 이 날은 궁에서는 종묘사직에 제사를 올렸고, 민간에서도 여러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납향(臘享)'이라고 했다.



납향일은 그 해의 끝에 해당하므로, 일 년을 정리하면서 조상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제를 올렸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도 이 납향일에 이곳 화령전에 와서 아버지인 정조에게 제를 지냈으며, 제정의 물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제사는 정조의 어진이 화령전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우물 하나에도 정성이 깃들어

화령전에서 제를 지낼 때 물을 떠 사용을 하던 제정은, 정방향의 형태로 각 방향에 14개씩 도합 56개의 장대석을 치밀하게 쌓아올렸다. 높이는 5.5m이고 바닥에서 물이고인 높이는 약 4m 정도이다. 우물의 밖으로 뻗어 나온 돌은 서로 반을 갈라내어 엇물려 놓았다. 장대석을 쌓아올려 우물을 만들었다는 것도 색다르다.



현재 복원이 된 화령전 안의 제정은 밑에 복원된 전사청 앞으로 물이 흐르도록 되어있다. 전사청은 ㄱ 자형으로 지었는데, 동편 끝이 한 칸 돌출이 되도록 하여 마루를 깔았다. 모두 8칸으로 지어진 전사청은 동편에 방과 툇마루를 놓고, 4칸 째에 문을 두었다. 이 문을 통하여 운한각으로 음식 등을 날랐을 것이다.

좌측 4칸은 한 칸의 광과 세 칸의 방으로 되어있다. 전사청 앞에 굴뚝을 보아 이곳은 온돌방을 꾸몄을 것이다. 납향일이면 추운 동지 때를 지나서이기 때문에, 온돌방이 아니라면 전각 안이라고 해도 추위 때문에 제를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향대청과 제기고가 복원이 되는 날, 사라져버린 역사의 한 조각이 맞춰질 것만 같다. 2011년 12월 10일에 찾아간 행궁 곁 화령전은, 그렇게 하나하나 역사를 되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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