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태풍이 와도 끄떡없는 능행차도가 어제(19) 밤에 불어온 강풍으로 인해 많이 떨어져 수원천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을 오늘(20) 아침에 수습했어요. 태풍이 불어도 그동안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는데 말이죠

 

수원천 지동교와 영지교 사이에 조성된 수원천 배다리 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된 정조대왕의 능행차도는 정조대왕이 수원 능행차 당시 한강을 건너던 부교를 상징한 것이다, 이 배다리 사업은 수원천 위 지동교와 영지교 사이를 굵은 와이어로 묶고 그 줄에 능행차도의 일부분을 조성한 것으로, 2018년 수원남문시장 글로벌사업단이 주관하여 몇 차례의 심의를 거쳐 최종확정하고 공사를 마무리해 관광자원으로 이용해왔다.

 

이 능행차도는 그동안 야간에 수원남문시장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아간에 조명이 불을 밝히면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하는 등 수원남문시장을 홍보하는데 일조를 해왔다. 그런 수원천 위에 걸린 능행차도가 19일 불어온 강풍을 견디지 못하고 많은 내용물이 수원천으로 떨어진 것이다.

 

 

조형물의 유효기간은 3, 아직 기간 절반도 안지나

 

국비지원사업은 기간이 3년입니다. 국비를 지원받아 설치한 구조물은 3년을 상인회에서 관리하고 보존해야죠. 그동안 강풍에도 끄떡없던 능행차도가 어제 불어 닥친 강풍으로 많은 구조물들이 수원천에 떨어졌어요, 오늘 남문시장 상인회장단이 모임을 갖고 오늘 중으로 보수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최극렬 상인연합회장은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불었기에 굵은 와이어로 단단하게 묶은 구조물이 떨어졌느냐면서 “3년 동안 전시기간을 다 채운 후에는 능행차도를 남문로데오 상인회가 가져다가 로데오거리에 설치할 수 있도록 로데오상인회 천영숙 회장과 약속했다고 한다. 최극렬 회장과 대담을 마친 후 능행차도가 걸린 지동교로 나가보았다.

 

수원천 위에 걸린 능행차도 중 상당수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아직은 수원천 찬물에 사다리를 세우고 와이어에 구조물을 매달고 있는 작업자들도 물속에 들어가 작업한다. 쉽지 않은 보수작업을 하느라 열심이다. “오늘 중으로 와이어에 다 달아야 힌디는 공사 담당자는 작업자들을 격려하면서 재촉한다.

 

 

여름 햇볕에 줄이 녹아내린 탓

 

바람에 세차게도 불었지만 여름 더위에 와이어와 연결한 선이 녹아내려 약해졌기 때문이죠. 세찬 바람을 견디지 못한 능행차 구조물이 심하게 흔들리다가 끊어진 것입니다. 물에 빠졌기 때문에 우선 연결을 해놓고 밤에 전기를 넣어서 불이 들어오나 하나씩 확인을 해봐야합니다

 

능행차도 보수공사를 하는 담당자는 수원천에 떨어져 물속에서 건져낸 것들이 많기 때문에 하나하나 불을 넣어보아야 한단다. 최극렬 회장은 오늘 중으로 공사를 마치라고 했지만, 물에 빠졌던 능행차 구조물이기 때문에 점검을 제대로 해야한다는 것이다. 밤새 심하게 불어온 초봄의 강풍 앞에 떨어져버린 능행차도.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시민들도 마음이 편치 않은 듯하다.

 

태풍도 견딘 능행차도가 바람에 이렇게 떨어진 줄 몰랐다고하는 최극렬 회장은 수원남문시장을 상장하는 능행차도이기 때문에 제 기한을 채울 때까지는 상인회에서 책임을 져야한다고 한다. 공사를 마칠 때 다시 한 번 지동교를 나가보아야겠다.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돌아보며 쐐기흔적 찾아보기

 

가끔 지방에 거주하고 있는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받을 때가 있다. 한 인터넷 언론에 몇 년 동안 1,500건이 넘는 문화재에 관한 기사를 송고하다보니 나름 그 방면에서 이름을 알고 있는 듯하다, 가끔은 사진 자료를 요청하기도 하고, 계절에 맞는 문화재 여행에 대해 좋은 곳을 안내해 달라고 부탁도 받는다.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화성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수원화성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지정 사적 제3호이다. 그만큼 문화재로서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난 수원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에게 꼭 한 가지 제안하는 것이 있다.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화성을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화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들을 했는지, 또 성을 쌓은 돌은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흔히 성돌을 뜬 곳을 부석소라고 한다. 큰 바위를 나르기 좋게 잘라 화성축성의 현장까지 옮겨왔다. 수원 팔달산, 숙지산, 여기산 등을 찾아가보면 돌을 떴던 큰 바위에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바위를 잘라내기 위해서 홈을 파 그곳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어, 나무가 부풀어 올라 바위를 쪼개낸 현장이다. 그런 현장을 돌아보면 수원화성이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축성이 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팔달산 곳곳에 남아있는 돌 뜬 흔적

 

9일 오전, 수원을 찾아 온 지인들을 인내하여 지동순대타운에 들려 순대국밥을 한 그릇씩 먹은 후에 우선 화성을 돌아보는 것으로 돌을 뜬 곳을 찾아나섰다. 먼저 이들에게 알려줄 것은 바로 화성을 쌓은 돌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을 알려주기 위함이다. 억새가 피어 아름다운 동남각루를 지나 화성을 돌면서 성벽에 남아있는 쐐기자국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팔달산에 있는 성돌을 뜬 흔적이다. 수원시 팔달구 팔달산로 318(교동) 팔달산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수원중앙도서관 옆으로 팔달산으로 오르는 소로가 있다. 이곳을 걸어 팔달산 위 수원화성 성벽을 보고 오르면 4기의 고인돌이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성돌을 떠내느라 파 놓은 쐐기자국이 남아있다.

 

성을 쌓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석재이다. 화성 축성 시 사용한 석재는 모두 201403덩어리로, 이를 가격으로 환산하면 1369609전이었다고 한다. 이는 수년 전 진단학회와 경기문화재단이 공동으로 개최한 화성성역의궤의 종합적 검토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에서 경기대 조병로 교수가 밝힌바 있다.

 

팔달산 위로 올라 화성 성벽을 따라 성 밖으로 걷다보면 여기저기 바위가 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깨진 돌을 찬찬히 살펴보면 쐐기자국을 찾을 수 있다. 나는 문화재 안내를 할 때 꼭 지키는 것이 하나 있다. 현장 입구까지만 안내하고 정작 현장은 스스로 찾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이 필요한 문화유적을 찾았다는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오래도록 문화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가을이 짙어진 숙지산 부석소

 

수원시 팔달구 화서동에 소재하고 있는 숙지산은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었다. 그야말로 돌이 비었다는 뜻이다.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17961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단다.

 

산에서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으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의 양을 보면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양이 숙지산 81100덩어리, 여기산 62400덩어리, 권동 32천덩어리, 팔달산 13900덩어리 등 189400덩어리였다.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들을 거의 모두 이 네 군데에서 떠냈다.

 

가을이 깊은 숙지산의 돌뜬 흔적은 여러 곳에 보인다. 그중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 화서다산도서관 뒤편에 있는 흔적이다. 여러 곳에서 돌을 뜬 후 수레를 이용해 돌을 화성 축성역장으로 날랐다. 돌은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인 대거, 4~8마리가 끄는 수레인 평거, 소 한 마리가 끄는 수레인 발거와, 장정 4 사람이 끄는 수레인 동거 등이 있었다. 이렇게 수레를 이용해 축성현장까지 돌을 옮겼다.

 

 

선사유적지가 있는 여기산에서도 성돌을 떠내

 

서호를 내려다보는 구릉처럼 솟아있는 산, 바로 여기산이다. 여기산(麗岐山)은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 농촌 진흥청 내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 104.8m의 산이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산세가 크지 않고 산의 모습이 기생의 자태와 같이 아름다워서 '여기산(麗岐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토축산성이 조성되어 있는데, 해발 104.8m로부터 10m 아래에 쌓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전형적인 머리띠 모양의 테뫼식으로 성 길이는 약 453m이다.

 

길 우측 아래로 거대한 바위가 보인다. 이곳은 정조대왕이 화성을 축성할 때 돌을 뜬 곳으로 기록되어있다.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 본다. 바위의 크기가 엄청나다. 어른 키의 몇 배가 되는 거대한 바위에 돌을 떠내기 위한 쐐기자국이 보인다. 절개된 바위 면에 선명하게 쐐기를 박기 위해 파 놓았던 구멍이 있다.

 

가을,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이 계절에 수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에게 좀 더 스토리가 있는 야행을 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단지 지나치면서 수원화성을 관람하는 것에 그치지 말고 좀 더 알차고 내실있는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많은 사람들 갖가지 음식 먹으며 즐거움 누려

 

벌써 거북시장 음식문화 축제가 9회를 맞이했어요. 그동안 상인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찾아와 시장에서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없었을 겁니다.”

 

27일 오후, 장안구 영화동에 소재하고 있는 느림보 거북시장. 시장 통로 양편을 막아놓고 거리에 테이블과 의자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그 많은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27일부터 29일까지 9회 장안문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가 시작했기 때문이다. 차한규 상인회장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가 벌써 9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날 오후 630분부터 시작한 개막식에는 수원시 원용덕 경제정책국장을 비롯하여 심언형 지역경제과장, 장안구 영화동 이학보 동장, 경기도의회 이필근 의원, 수원시의회 홍종수 부의장, 강영우 의원, 황경희 의원과 수원시상인연합회 최극렬 회장을 비롯하여 22개 전통시장 상인회장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행사 참가 관계자들 비빔밥도 함께 비벼

 

현 영화동 장안문 거북시장은 과거 영화역 인근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시장이다. 영화역은 정조대왕이 화성 축성 이후 한양의 남쪽 역참의 중심권으로 삼았으며, 화성에 인구를 모으는 방법으로 양재역을 이곳으로 옮겼다. 당시 양재역의 관사와 관원만이 아니라, 역참에 속한 주민들 모두를 이주시켰다. 장안문 밖에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인 1796829일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보면,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하여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역에 속한 말과 역호를 이사 시켰다.’고 적고 있다.

 

이날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에는 특별한 행사가 하나 이루어졌다. 과거 영화역에 도착한 정조대왕이 함께 화성행궁으로 행행하는 어가를 호위한 장용영무사들을 위해 술과 음식을 내주었는데 정조대왕의 그런 기록에 의해 행사에 참여한 많은 인사들이 함께 커다란 그릇에 담긴 밥을 비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함께 즐기는 장안문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

 

오늘 거북시장을 찾아와 각종 공연도 즐기고 맛있는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즐겁습니다, 그동안 거북시장 음식문화축제 때 볼 수 없었던 대형 그릇에 비빔밥도 비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즐겁습니까? 이런 퍼포먼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즐겁네요.”

 

가족들과 함께 음식문화축제에 참가했다는 영화동 주민 조아무개(, 43)씨는 비빔밥을 가득 담은 그릇을 보여주면서 환하게 웃는다. 음식문화축제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즐거운데 참가한 인사들이 함께 비빈 비빔밥을 먹을 수 있으니 올해는 좋은 일이 많은 것 같다는 것이다.

 

 

오늘 장안문 거북시장 제9회 음식문화축제가 열린 것을 축하합니다. 요즘 전통시장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음식을 나누면서 즐거움도 나눌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축제가 아닌가 합니다. 앞으로 저희 시에서도 전통시장이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줄 수 있게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수원시 원용덕 경제정책국장은 개막식 행사에서 인사를 통해 전통시장이 활성화 되어야 한다면서 수원시에서도 전통시장 활성화에 더욱 노력을 하겠다고 했다. 이날 축사 및 격려사를 한 많은 참석인사들도 전통시장이 활성화 되어야 지역경제가 산다면서 수원시민들이 전통시장을 더욱 이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장안문 기단석과 유수 서유린 선정비 등에 성혈 보여

 

성혈(性穴)’이란 선사시대부터 전해진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의 덮개돌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 놓았는데, 그 파인 형태적 차이에 따라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 부른다. 성혈은 단단한 바위의 표면을 오목하게 갈아서 만든 홈을 말한다.

 

성혈을 학자 중에는 일반적으로 선사 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의 관련성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성혈에 대한 정설은 내지 못하고 있다. 일부학자는 성혈을 그림이나 형상을 표현한 바위그림(=岩刻畵)으로 보기도 한다. 성혈은 그 새겨진 장소나 위치에 따라 근세에도 자손의 번창과 부귀공명 등을 기원하고자 성혈을 새기는 주술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지석묘나 선돌 등에 새겨진 성혈을 수도 없이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성혈은 죽은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나 망자의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새겨졌을 것이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큰 바위나 남성의 성기(안양시 만안구 석수동 산10-1, 삼막사 경내에 소재한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3삼막사남녀근석(三幕寺男女根石)’)를 닮은 바위에도 성혈이 보인다. 이는 자손을 바라는 염원에서 새겨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기에 성혈을 선사시대의 신앙이나 별자리와 연관 짓는다는 것은 어찌보면 타당성이 결여되었다고 생각한다. 깊은 산속 바위에도 성혈이 새겨진 것을 보면 성혈은 그 새겨진 위치에 따라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란 생각이다. 즉 성혈은 선사시대에만 새겨진 것이 아니라 근세에도 새겨졌기 때문에, 성혈은 자신의 간구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형성한 염원의 산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수원에서 만날 수 있는 성혈은 무슨 용도였을까?

 

그동안 수원에서 문화재 등을 답사하면서 찾아본 성혈은 수원화성의 장안문 기단석과 수원화성박물관 앞에 늘어서 있는 선정비 군 중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석, 그리고 수원화성 축성 시 성돌을 떠낸 여기산에서 발견된 바위 위에 새겨진 성혈 등이다. 이중 가장 많은 성혈은 장안문 기단석에 새겨진 성혈이다.

 

20일 오후, 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장안문. 장안문 성안 화단에 잔디를 정리하느라 막을 치고 한창 잔디 정리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 중에 방해가 될까봐 얼른 안으로 들어가 사진 몇 장을 촬영한다. 장안문 기단석의 성혈은 그동안 몇 번이고 촬영을 한 자료가 있지만 답사를 할 때 촬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나로서는 당일 사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조는 왜 화성의 북문을 장안문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1794228, 화성유수부의 북쪽, 장안문을 축조하기 위한 자리에서 이유경은 북문 성곽 터에 제단을 쌓고 고유제를 올렸다. 장안문은 우리나라 성곽의 문중에서는 가장 큰 성문이다. 정조가 장안문을 이렇게 크게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장안이라는 말은 나라의 도읍을 의미한다. 아마도 화성에서 여생을 보내려고 했던 정조로서는 이곳 화성을 도읍으로 정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장안문의 성문 안쪽을 보면 성문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받침돌인 기단이 있다. 성 안에서 장안문을 바라보고 좌측 기단에 보면 키고 작은 성혈이 있다. 화성이 축성 된 후 사람들은 장안문에 와서 기단석에 성혈을 판 것이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도 가장 큰 장안문, 그리고 그 성문을 받치고 있는 기단석. 그곳에 성혈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장안문이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서 있고, 그 이름이 장안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장안문에 성혈을 갈아내면서 자손들이 한양으로 입성해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자손들이 정조의 효를 본받기 위해서 성혈을 조성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효심 가득한 자손을 낳게 해 달라는 기자속(祈子俗)으로 조성했을 수도 있다.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도 성혈 파놓아

 

이렇게 수원화성 장안문이나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도 성혈을 조성한 것을 보면 성혈은 선사시대의 각종 기원속(祈願俗)신앙에서 유래된 습속으로 근세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서유린(1738(영조14)~1802(순조 2))은 조선조 문신으로 자는 원덕(元德), 호는 영호(潁湖)이다. 교리 효수의 아들로 영조 42년인 1766년에 정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768년 부교리를 거처 도승지, 충청도 관찰사에 이어 대사헌을 지냈다. 1781년에는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정조 12년인 1788년에는 공시당상으로 국경무역을 관장하고, 1790년에는 왕의 명령으로 <증수무언록>을 번역했다. 그 뒤 선혜청 당상과 판의금 부사, 한성판윤, 수원부 유수 등을 지냈다. 순조 1년인 1801년에 집권한 벽파에 의해 경흥에 유배되어 이듬해에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는 1831년에 건립되었다. 이 선정비는 1797년부터 1800년까지 화성 유수를 재임할 때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는 비이다. 그런데 이 선정비의 받침돌에는 무수한 성혈이 보인다. 왜 이 비에만 성혈을 이렇게 파 놓은 것일까? 서유린의 선정비 받침돌에는 사방으로 돌려 크고 작은 성혈이 20여 개나 보인다. 어떤 것은 깊게 파여져 있고, 또 어떤 것은 조금 파다가 만 것도 있다.

 

 

유수 서유린은 화성유수를 지내면서 정조에게 많은 건의를 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정조는 1794년에는 화성 성역을 착공하고, 1797924일 화성유수 서유린은 정조에게 시흥과 과천도 화성유수부에 속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또한 정조 22년인 1798년에는 당시 화성유수인 서유린이 조세를 면해 줄 것을 아뢰자 이를 승낙한다.

 

이와같이 화성 유수시절 많은 업적을 쌓은 서유린의 선정비에 성혈을 판 것은 선정에 대한 감사와 그와 같이 충신이 태어날 것을 간구하기 위해 조성한 성혈로 볼 수 있다. 20일 한창 무더울 시간 찾아간 장안문과 화성 유수 서유린의 선정비에 새겨진 성혈. 그 성혈의 의미는 지역학자들의 연구로 정확히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15년 전 촬영한 자료에서 만난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창룡문과 연무대인 동장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있다. 지금은 안전문제로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몇 년 전 개방을 했을 때 들어갔던 동북공심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나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으로 보인다.

 

화성의 전각에는 추위에도 병사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나선형의 통로 끝에는 계단으로 조성해 공심돈 위에 마련한 전각으로 오른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옛 자료 정리하다가 만난 동북공심돈의 모습

 

20, 일기예보에서는 수원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한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몇 곳을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창룡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동북공심돈 앞으로 날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몇 사람의 관광객이 지나치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장안문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돌아와, 2004824,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촬영한 수원화성 자료를 검색해본다.

 

15년이 지났다. 15년 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자료에는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전의 자료가 들어있어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자료CD 안에 동북공심돈과 봉돈의 내부 등을 꼼꼼히 촬영해 놓은 자료가 들어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동북공심돈의 내부, 당시 무더운 복중에 땀 흘리며 돌아본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의 내부모습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깨닫다

 

15년 전의 소중한 수원화성의 자료가 담긴 CD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부터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자료 CD3,000장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CD에 담을 수 없어 몇 년 전부터는 외장하드에 담아놓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보관하는 버릇을 들여놓은 것이 결국 지금은 소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 자료를 남겨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더 나이를 먹어 여행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조용히 앉아 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하나가 수많은 자료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보면 언제니 든든하다. “책을 써도 100권은 쓰겠네요.” 집을 찾아와 자료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새삼 자료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문화재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을 한다고 하지만 복원이란 자체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뿐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돌아본 동북공심돈. 지금은 안을 들어갈 수 없지만 옛 자료로 만나본 동북공심돈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기록해 놓은 지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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