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사지는 백제가 부여로 왕도를 천도한 후(538~660) 백제의 중심사찰이었다. 정림사지의 발굴에서 찾아낸 기와의 명문 중에는 ‘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唐草’라는 글귀가 발견이 되어,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에는 이 절을 정림사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발굴조사에서 나타난 정림사의 건물배치는 일탑식 가람배치로, 이러한 일탑식 가람배치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세련된 솜씨를 보이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번지 정림사지 안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오층석탑. 국보 제9호인 이 오층석탑은 백제가 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세기 말에 세워진 석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탑의 모서리에 세운 배흘림기둥이나, 넓은 지붕돌 등을 따로 짠 것들이다. 이런 형태의 석탑은 목조건축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다.

 

이 탑에는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그 몸돌에 자신의 공적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아마도 전국에 이렇게 많은 탑들이 전란을 통해 얼마나 많은 훼손을 가져온 것일까? 나라를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갖는 슬픔이기도 하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 이후 충청남도 지역에는, 흡사한 형태의 탑이 많이 조성되었다. 그만큼 이 탑의 예술성이 뛰어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탑을 돌아보다가 절로 탄성을 지르다.

 

장중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마당에 가득 쌓인 눈이 땅을 질퍽이게 만들어 신에 가득 흙이 묻어 떨어지지를 않는다. 무겁다는 것도 잊은 채 탑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아본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좁고 낮게 만든 1단의 기단위에 오층의 탑신을 세운 정림사지 석탑. 소정방의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글귀 때문에, 한 때는 ‘평제탑’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무지를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다. 이 탑의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 돌을 끼워 놓는 방법을 택했다.

 

 

탑신부의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와 아래는 좁고 가운데는 불룩한 것이 목조건물에서 보이는 배흘림기둥과 같은 형태이다. 몸돌의 덮개석인 지붕돌은 네 면의 귀가 날아오르듯 솟아올라, 그 귀퉁이 하나만으로도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현재 남아있는 단 두기의 백제시대의 석탑으로 알려져 귀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는다.

 

 

절제된 조형미, 그리고 배흘림기둥을 모방한 석조 조형의 편안함. 지붕돌 밑을 받치고 있는 돌들의 한쪽 면을 비스듬히 경사지게 조성해, 석질의 딱딱함을 없앤 조형미.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얼마나 뛰어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비록 돌로 쌓은 석탑이지만, 석탑에서 느끼는 차가움이 없다. 그리고 정리마지 오층석탑에는, 딴 시대의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절제된 아름다움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54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인 정림사지 5층 석탑과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석불좌상 한 기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전각을 세우고 그 안에 모셔져 있다. 현재 이 전각을 세운 자리는 백제시대 정림사지의 강당 자리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명문기와를 통해, 이곳이 백제시대 절터의 강당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정림사는 6세기 중엽에 처음 창건되어 백제 멸망 때까지 번창하였던 사찰이다. 정림사는 고려시대에 다시 번창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림사라는 명칭도 고려시대의 절 이름이다. 1028년에 만들어진 기와명문을 통해 고려시대에 백제 때의 강당자리를 금당으로 삼아, 이 석불을 주존불로 모셨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때의 번성을 보여주는 석불좌상.

 

날씨가 차갑다. 지난 날 온 눈이 녹아 정림사지 안은 온통 질퍽하다. 신발에 흙이 달라붙어 걷기조차 힘들다. 전각의 계단 위에는 온통 진흙투성이다. 달라붙은 흙을 이곳으로 털어냈기 때문이다. 많은 돈을 들여 정림사지를 정비를 한다고 하면, 이렇게 신발이 무겁게 느껴질 정도로 흙이 달라붙지 않도록 마당정비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전각은 7칸으로 짓고, 중앙을 위시해 좌우로 문을 내었다. 대개 절의 대웅전 등은 가운데 문은 ‘어간문’이라고 하여 일반인들은 출입을 삼간다. 좌우 문을 통해 출입을 하는 것이 예의지만, 정림사지 전각은 가운데 문으로 드나들어 안도 온통 흙투성이이다. 날씨가 이러하니 괸람객들도 별 도리가 없겠지만.

 

전각 안에 모셔진 보물 제108호인 정림사지 석불좌상. 올려다보는 순간 그 크기에 압도당한다. 고려 때 조성이 된 이 석불좌상은 고려시대 거대석불의 한 맥락으로 보인다. 그만큼 고려시대의 마애불이나 석불 등은 크기에서 어느 시대의 것보다는 거대불들이 많이 남아있다. 지금의 머리와 보관은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시 만들어 얹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가 보관은 머리가 조금은 어울리지 않게 제작이 되어 얹혀 있다.

 

 

심하게 파괴가 된 석불좌상

 

이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신체는 극심한 파괴와 마멸로 형체만 겨우 남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에 타고, 심하게 마모가 된 것이다. 지금의 형태로는 세부적인 양식과 수법을 알아보기 어렵지만, 대좌 등의 솜씨로 보아 당시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는 석불좌상으로 보인다.

 

머리와 갓은 후대에 다시 만들었다고 하지만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두 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형태는 왼팔을 가슴께로 끌어올렸으나, 오른팔은 어깨서부터 떨어져나가 정확한 모습을 알아보기는 힘들다.다만 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를 통해 당시 이 석불좌상의 위엄을 엿볼 수가 있을 뿐이다. 이 대좌는 남원 만복사지 경내에 남아있는 대좌와 함께 11세기 고려불상 양식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를 받고 있다. 상대, 중대, 하대로 이루어진 8각으로 된 대좌는 불상보다 공들여 만든 흔적이 역력하다.

 

 

대좌의 아름다움으로 마모된 불상을 기억하다

 

대좌는 삼단으로 나누어 조각을 하였으며, 가운데 중대는 좁고, 상대와 하대가 넓은 ‘공(工)’자 형태로 구성을 하였다. 대좌도 많이 깨어져 나가기는 했지만, 석불좌상에 비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상대는 연꽃이 활짝 핀 모양이며 중대의 팔각 받침돌로 구성을 하고, 각 면에 큼직한 눈 모양을 새겨 넣었다. 하대에는 연꽃이 엎어진 모양과 안상을 3중으로 중첩되게 표현을 했다.

 

여러 단의 돌을 놓고, 그 안에 갖가지 조각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한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대좌. 그 대좌 하나만으로도 정림사지 석불좌상의 위상을 기억해 내기란 어렵지가 않다. 아마도 백제 때의 중심사찰이었던 이곳에 정림사를 세운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강성한 나라를 꿈꿔왔을 것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을 몇 번이고 돌아보았지만, 볼 때마다 조금씩 달라 보이는 것은 그만큼 내 눈이 열리고 있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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