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는 아름답다. 정자라는 것은 대개가 세도하는 사람들이나, 동계(洞契)모임 등에서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다가 짓기 때문에, 주변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나라의 절경에는 많은 정자가 있고, 그 정자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몇 년간 정자 기행을 하면서 참으로 아픈 역사를 가진 정자를 만났다. 갑오농민혁명의 현장을 취재하면서 보니 두 곳의 정자가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정자가 있으나, 이곳은 오래전에 세운 것이 아니라고 해도 뜻이 깊은 곳이기에 더욱 마음에 닿는다.

 

 

그저 그곳에 있어야 할 만석정

 

그 중 하나는 이평면 예평마을에 있는 만석정이다. 만석정은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키는 불씨가 되었던 곳이다. 만석보터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안길수의 만석보혁파비가 서 있다. 만석보혁파비는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을 한 조병갑이 만석보를 만들고, 농민들에게 무리한 조세를 수취한 장소이다.

 

배들평야의 농민들은 이것에 불만을 품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는데, 이것이 갑오농민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그 후 광무 2년인 1898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안길수가 만석보를 완전히 혁파시켰다. 농민들은 그 뜻을 감사히 여겨 9월에 만석보혁파비를 세웠다.

 

만석정은 그 혁파비 바로 곁에 서 있다. 그저 단청도 하지 않은 정자. 그리고 지은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수수히 서 있는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농민들의 정감어린 마음이 있다. 그리고, 그 정감어린 마음속에는, 1894년 갑오농민혁명을 일으킨 끓는 피가 있어 더욱 애틋한 마음이 드는가 보다.

 

 

갑오농민혁명의 장서에 선 말목정

 

또 하나의 정자는 바로 정읍시 이평면 면사무소 곁에 있는 말목정이다. 말목정은 만석정과는 달리 단청이 되어 있고, 잘 가꾸어진 모습이다. 말목정은 원래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110호인 말목장터와 감나무 곁에 서 있었던 것을, 70m 정도를 옮겨 현재의 자리에 지어 놓았다. 말목정은 삼강오륜의 정신 계승과 실천으로, 살기 좋은 고장을 만들기 위한 뜻을 갖고 세워졌다고 한다. 현재의 말목정은 원형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으로, 2002년 7월에 이전하였다.

 

말목정은 옮겨지기 전에 감나무 곁에 서 있었다. 이곳은 1894년 1월 전봉준 선생이 농민군수 천명을 모아 놓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비리와 포악한 실상에 관해 일장 연설을 한 곳이다. 전봉준 선생은 이곳에서 농민봉기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말목정은 그러한 곳에 1994년 지어진 정자이다.

 

전봉준 생가

 

고부농민혁명의 자리에 선 두 곳의 정자. 아름다운 곳에 서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말목정과 만석정은 깊은 뜻을 갖고 있다. 비록 그 서 있는 곳이 장터 앞과 만석보터 앞이긴 하지만, 어느 정자보다도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갑오농민혁명을 찾아 떠난 길에 만나 두 곳의 정자. 정자 위에 오르니 감회가 새롭다.

 

지난날의 피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어린 아이 두서넛이 모여 맴을 돌며 뛰어다닌다. 그래, 그곳에서 너희 선조들은 피를 흘리며 이 땅과 삶을 지켜내었으니, 너희들이야 말로 그렇게 뛰놀 자격이 충분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또 너희 중에 누가 이곳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이곳을 근거지로 농민운동을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한 해의 끝자락이 가까워 오는 날에 만난 정자, 높다란 하늘에 뭉게구름 한 덩이가 한가로운 날이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인 전봉준. 전봉준은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그러나 정읍에서 태어났다는 일설과는 달리 또 한 곳의 전봉준 유적지가 고창에 남아있다. 바로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이다. 이곳에는 전봉준이 태어나 13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는 생가터가 있다. ‘생가터’란 그 곳에서 태어났으나, 당시의 집이 남아있지 않고 그 터만 남아있는 곳을 말한다.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고창의 생가터

정리되지 않은 전봉준의 출생지

고창군을 답사하는 중에 생각지도 않은 이정표를 하나 보았다. ‘전봉준 생가터’라는. 의아하다. 전봉준의 고택은 정읍에 사적으로 지정이 되어있고, 그곳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럴 때 무지한 본인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왜 좀 더 여러 곳의 기록을 살펴보지 않았을까 하는 점에서다.



고창 생가터에 세워진 시비와 마굿간

전봉준(全琫準, 1854 ~ 1895년 3월 30일)은 조선의 교육자이자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이다. 초명은 명숙(明淑), 호는 해몽(海夢). 별명은 '녹두 장군'으로 키가 단구라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오늘날의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로 추정한다. 본관은 천안이다.(다음백과)
동학농민운동의 지도자인 전봉준(1855-1895)이 살던 집이다. 동학혁명의 지도자인 전봉준선생이 태어난 옛집으로, 그는 1855년에 당시의 행정구역으로는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에 해당한 이 집에서 아버지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태어난 이곳을 떠나 태인현 산외면 동곡리에서 살았을 때에는 세마지기의 전답을 가지고 있는 정도였고, 한때는 후일 동학의 지도자들이 된 김개남·송희옥과 함께 전주 봉상면 구미리에 살기도 하였다. 동학에는 30세 때에 입도하여 고부지방의 접주가 되고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폐정의 시정을 진정하기도 하였다. 이듬해에는 1,000여명의 군민(郡民)을 모아 고부군아를 습격했는데(일부에서는 4,000명이라고도 한다), 이로부터 동학혁명이 본격적인 시작을 보게 되었다.(문화재청 자료 일부 발췌)

일반적으로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현재 사적지로 지정이 된 고택이 있는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고창군의 당촌마을에 있는 이곳은 어떻게 전봉준 생가터가 되는 것일까? 마을에서는 고로들이 이곳이 전봉준 선생이 태어난 곳이 틀림이 없다고 하신다. 생가터를 들어가는 길의 명칭도 ‘전봉준로’ 명명하였다.


예전에는 서당과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때 다 타버리고 지금은 재현된 건물이 서 있다.

역사적인 인물의 기록조차 정리가 안 되다니.

정읍시 이평면인지 고창군 고창읍인지, 두 곳 중 한 곳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이 두 곳이 모두 전봉준의 출생지라고 한다면, 녹두장군 전봉준이 두 사람이라는 소리일까? 이런 역사의 인물조차 제대로 기록하고 있지 못한 것에 대해 울화가 치민다. 오래된 인물도 아니고 근대의 인물에 대한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해명이 되질 않는다.

전봉준에 대해 이렇게 출생지서부터 일치가 되지 않은 것은, 많은 이주로 인해서 일수도 있다. 어려서부터 정읍 감곡면 계룡리, 전주, 김제 금산면 삼봉리, 태인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교리 등 많은 곳에서 전봉준이 거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봉준이 태어난 곳은 고창현 덕정면 당촌(현 고창읍 덕정리)인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인 인물의 출생지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의 좀 더 책임있는 연구로 인해, 두 곳 중 어느 곳이 정확한 출생지인지 밝혀지고 올바른 기록을 남겨야 할 것이다.

전북 고창군 고창읍 죽림리에 가면 조각공원이 있다. ‘뚜라조각공원’, 아마 이 공원을 조성한 것은 동학혁명을 주도한 전봉준장군의 상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는 조각가가 조성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공원이 소재한 곳이 바로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 옆이기 때문이다. 전봉준 장군의 유적지는 장군이 출생한 고창과 이사를 하여 산 정읍 두 곳에 있다.

뚜라조각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알아서 입장료를 내면 된다. 저팔계가 버티고 있는 입구에 돈 통을 놓고 성의껏 내라고 되어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의를 보일지는 모르겠다. 입구부터 쓰러져 가는 판자로 막은 오두막에 기대있는 여인상으로 시작해, 넓은 마당에 여기저기 수백 점은 될 만한 크고 작은 조각들이 널려있다.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곳

안으로 들어가면 수많은 조각품들이 널려있는 곳. 조각공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조각박물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작가가 일일이 만든 것인지, 아니면 따로 수집을 해 놓은 것인지는 몰라도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눈에 띤다. 그 중에는 정말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마당은 잔디를 조성해 놓고, 여기저기 조각품들을 늘어놓았다.

그 중 눈에 띠는 것은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작품들이다, 처마에도 나뭇가지에도 그리고 철봉 틀에도 매달려 줄을 타고 오르는 작은 군상들. 그리고 테라코타로 조성된 흙기둥에 새겨진 수많은 사람들. 그 중 눈을 끄는 것은 커다랗게 조형에 된 아이들 모습이다. 앞에는 욕조가 있고 그 안에 오줌을 싸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는 자지러질 뻔 했다.



조각공원 입구에는 저팔계가 입장료는 성의껏 달라고 한다(위) 잔디로 조성한 광장에 늘어 놓은 작품들
 
오랜 시간 준비를 해온 것인지 벌써 칠이 벗겨지고, 여기저기 파손이 된 작품들도 보인다. 그리고 새로 칠을 한 것들도 보이고 있어, 이 조각공원의 작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 같다. 고창을 찾아간다면 아이들과 함께 역사공부를 겸해 찾아가볼만 한 뚜라조각공원. 오늘 그 안에서 또 다른 조각공원의 재미를 느낀다.



테라코타로 조성한 흙기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조각되어 있다. 이러한 작품이 공원 내 곳곳에 보인다.(위) 그리고 벽돌로 만든 벽을 부수고 나오는 남자. 이런 힘찬 남성상들도 여기저기 보인다(아래)



색을 입혀 눈에 띠는 조각품. 남자 아이 셋이서 욕조에 오줌을 싸고 있는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위) 복분자의 고장 고창다은 모각품도 보인다(아래) 이 두 가지의 조각품들은 최근에 새로 색을 입힌 것으로 보아 새롭게 보여진 작품인 듯 하다.




줄을 타고 오르는 군상들. 공원 안 여기저기에 보면 줄에 매달려 오르는 작은 조각상들이 널려있다. 처마 밑에도 나뭇가지에도, 철봉 틀에도 이렇게 많은 군상들이 줄을 타고 오르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안간힘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각양 각색의 조각들이 나열되어 있는 뚜라조각공원. 아마 아이들과 함꼐 찾아본다면 또 다른 재미를 줄만도 하다. 더욱 옆에는 전봉준 장군의 생가지가 자리하고 있어, 역사적인 공부를 함께 시킬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 길을 나서 찾아보면 많은 볼거리들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아보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느꼈는가가 중요하다. 꼭 유명한 곳을 가야만 좋은 구경이 아니다. 문화란 그것을 보고 느끼는 자만을 환영한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양반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군을 이끌고,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킨 교육자이자 지도자이다. 전봉준은 1854년에 전라북도 정읍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전창혁과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명숙이라 했으며 족보상의 이름은 영준이라고 한다. ‘녹두장군’은 그의 키가 작아서 붙여진 별칭이다. 전봉준은 어려서부터 가난한 생활을 했으며 끼니를 잇기 위해 약도 팔고 훈장 일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전봉준을 그리는 소리 ‘새야새야 파랑새야’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불러본 노래다. 음률이 처량하기도 한 이 노래는 전봉준이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고 난 뒤 순창으로 피해 다시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현상금을 노린 옛 부하 김경천 등의 밀고로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한성부로 끌려간 전봉준은 1895년 3월 30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새야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는 전봉준이 교수형을 당하고 난 뒤,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양반들의 세를 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음을 한탄하는 소리이다.


조촐한 초가에서 세상을 바로잡다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에는 사적 제293호로 지정이 된 전봉준의 고택지가 있다. 마을 한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조금 안쪽에 초가로 지은 집이 보인다. 고택지에는 살림채 한 동과 헛간 채 한 동이 있을 뿐이다. 지난 날 어려웠던 살림살이가 느껴지는 집이다.




살림채는 전봉준이 살던 집으로 조선조 고종 15년인 1878년에 지어졌다. 4칸의 - 자형으로 지어진 살림채는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 방인 골방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골방 앞으로는 바람막이 벽이 있고, 그 앞에는 한데 아궁이를 두었다. 큰방과 윗방 앞쪽에는 툇마루를 달아내고, 마루 끝에는 부엌과 연결이 되는 문을 달았다.

살림채 앞에 있는 헛간채는 측간과 헛간으로 사용이 되었으며, 두 칸으로 되어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의 훈장 일을 맡아하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나름대로 부끄럼 없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방안을 들여다보니 그저 어느 양반집 하인들의 방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허름한 가구 몇 가지가 놓여있고, 천정은 서까래와 흑이 그대로 노출이 되어있다.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부재도 모두 인근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그러한 나무들을 이용했다.

부엌은 두 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은 조개무덤이 가득하다. 예전 어머니들은 이 조개무덤이 부자가 될 징조라고도 했다. 집 뒤에는 장독대가 있고, 물길을 낸 골방 뒤로는 물길 위로 지나는 연도와 굴뚝이 서 있다. 연도와 굴뚝은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집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를 설치하고 과중한 물세를 징수하는 등, 각종 명목으로 수탈을 일삼자 고종 31년인 1894년 1월, 말목장터에서 조병갑을 응징할 것을 역설하고 천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기습 점령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집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오니 우물이 보인다. 지금은 장방형 돌을 이용해 우물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다. 전봉준의 고택 우물이라는 안내판이 붙어있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니, 아직도 맑은 물이 고여 있다. 조소마을 주민들이 사용하던 공동우물이다.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녹두장군. 지금은 이렇게 집과 우물만이 남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한 인물을 기억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민초들의 아픔은 채 가시지를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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