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탑의 우아하고 선이 아름다운 점과, 신라탑의 장중하고 무게가 있는 이점만을 골라 탑을 조성하였다.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에 자리하고 있는 고찰 무량사에 소재한 오층석탑이다. 무량사는 통일신라 문성왕(서기 839~856) 때, 범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무량사는 고려 초기에 대중창을 하여 30여동의 요사와 12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모두 전소가 된 것을, 조선 인조(서기 1623~1649) 때 진묵대사께서 중수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절이다. 무량사를 찾은 날은, 절 경내에 하얀 눈이 꽤 많이 쌓여있다. 경내에는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만 치워놓았을 정도이고, 탑 주변에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다.

 

오랜 기억에 남아있는 무량사

 

무량사는 인연이 깊은 절이다. 벌써 20여 년 전부터 이곳을 찾아왔었기 때문이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가 1993년이었으니, 올 해로 20년 째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이곳을 찾았을 때는, 명창이신 고 박동진 선생님과 동행을 했었다. 판소리 프로그램을 제작하기 위해서 들린 곳이었기에, 남다른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때도 무량사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난다. 다만 김창진 명창이 10년 세월을 득음을 위해 독공을 했다는 삼성각 앞에, 또 한 채의 요사가 자리를 하고 있는 것 외에는 달라진 것이 없는 듯하다. 무량사는 늘 정겨운 곳이다. 전국의 사찰을 문화재답사를 위해 찾아다니지만, 가끔은 너무나 많은 변화로 인해 당황스럽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려전기의 균형 잡힌 오층석탑

 

무량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면 보물인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보물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이 일렬로 서 있다. 맨 앞에는 보물 제233호인 석등이 서 있고, 그 뒤편에 보물 제185호인 오층석탑이 자리한다. 그 뒤편에는 외부를 중층으로 지어진 보물인 극락전의 웅장한 자태를 볼 수가 있다.

 

눈이 쌓인 한 겨울의 오층석탑. 이 무량사 오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한 탑이다. 이 탑은 백제탑의 아름다움과, 신라탑의 장중함을 이어받아 조성한 것이라는데 그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기단은 잘 다듬은 석재를 이용을 했다. 기단부에 조성한 석재의 면을 둥글게 깎아내어, 모나지 않고 부드러운 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한 마디로 균형이 잘 잡혀있다. 그런 점이 안정감이 보이기도 한다. 몸돌은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덮개석인 지붕돌과 몸돌의 줄어드는 비례가 알맞아, 어디 하나 군더더기가 보이지를 않는다. 다만 지붕돌의 넓이가 몸돌에 비해 넓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이 탑의 장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낮은 몸돌을 지붕돌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석탑, 어디한 곳 흠잡을 데가 없어

 

무량사 오층석탑을 보고 있노라면, 백제와 신라의 문물이 합쳐 낸 문화의 극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두 고대국가의 서로 다른 문화가 이곳에서 만나, 석조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다는 생각이다. 그만큼 무량사 오층석탑은 볼 때마다 그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다.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면, 영하 10도를 밑도는 날씨마저도 추운 줄을 모르니 말이다.

 

기단부 상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서로 다른 돌을 이용해 표현을 했다. 그리고 아래지석과 위 덮개석의 면을 둥글게 깎아, 석재가 주는 딱딱함을 없앴다. 그 위에 몸돌은 층이 올라 갈수록 줄어들면서, 적당한 안정감을 주고 있다.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은 아랫면을 홈을 내어, 몸돌이 겉돌지 않게 조성을 하였다. 몇 장의 돌을 이용해 지붕돌을 조성하였다는 것도 특이하다.

 

무량사 오층석탑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많이 닮아있다. 몸돌이 이층부터 차츰 줄어든다가나, 받침돌의 면을 둥글게 조성한 것들이 그러하다. 아마도 이 오층석탑을 조성한 장인이 백제와 신라의 많은 탑을 돌아본 후, 이 탑을 조성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름다운 선의 정점은, 바로 지붕돌의 처마 끝에서 보인다.

 

 

한 장의 돌이 아닌 데도 불구하고, 양편의 처마 끝이 날아오르듯 위로 적당히 솟아있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선을 표현할 수가 있었을까? 많이 치솟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지지도 않게 솟아오른 처마 끝. 그저 석탑 하나에도 이렇게 아름다움을 표현 할 수 있었던 선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언제나 이런 감탄이 끝나게 될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발길이 닿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으려는지.


범어사 사천왕문이 방화로 추정되는 가운데 전소가 되어버렸다. 뉴스를 통해 불이 타 무너져내리는 천왕문을 보면서 참으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외국의 열강 등에 의해 수도 없이 찬탈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같은 민족에게까지 그렇게 훼파가 되어가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리다.

도대체 이 나라사람들은 종교가 다르다고, 혹은 세상이 마음에 안든다고 문화재에 화풀이를 하는 것일까? 이참에 문화재보호법을 더 강력하게 제정을 해, 다시는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이런 날 꼭 소개하고 싶은 문화재 한 점이 있다. 바로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마을 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석탑의 형태를 계승한 고려탑

승안사지 삼층석탑은 우선 보기에는 매우 둔탁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저 첫눈에 보이는 느낌은 조금은 시골스런 남정네를 연상케 한다.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탑을 계승하고 있다. 아무래도 이 지역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석탑이기 때문인가 보다.

기단부에는 비천인과 불, 보살 등의 조각이 되어있다. 이 모든 조각들은 무릎을 꿇은 형태로 되어있는 점도 특이하다. 탑의 전체적인 높이는 4.3,m 정도로 길쭉한 편이다. 그러한 점이 조금은 불안한 듯하지만, 투박한 탑의 형상이 그런 불안감을 조금은 해소시키고 있기도 하다. 자칫 탑의 조형의 비례가 맞지를 않아 중심이 흐트러질 뻔한 것을, 투박한 무게로 이겨내고 있다고 보겠다.




자리를 옮긴 석탑의 놀라운 조각예술

이 석탑은 1962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올 때, 홍치 7년인 1494년에 중수를 한 기록이 한지에 먹으로 쓴 문서가 발견되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승안사는 당시에 존재해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도 탑이 옮겨졌음을 알 수 있는데, 결국은 두 번이나 자리를 옮긴 셈이다. 당시 1층 몸돌 위에 만들어진 사리구멍에서는 원통형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기단부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우주와 탱주를 새긴 위층 기단부를 놓았다. 위층 기단에는 불, 보살, 천인상을 조각을 하였으며 덮개돌에는 연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기단부의 덮개돌은 층이 없이 평평한 돌을 위로 불룩하게 돋아 조각을 하였다.



일층 몸돌에는 사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런데 이 사천왕상의 조각이 일반적인 탑에서 보이는 사천왕상과는 다르다. 사천왕상의 발밑에 보면 목제 사천왕상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무엇인가를 밟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수한 조각기법과 장엄한 모습 등이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탑 하나에도 장인의 숨결이

탑을 돌아보고 석불을 돌아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오랜 세월 그렇게 보존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은 바로 장인의 숨결이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장인의 집중한 정신이 그 안에 함께 내재되어 있기에, 천년 세월을 버틴 것은 아닐까? 오랜 풍상에 시달리면서도 그렇게 한 자리에 버틸 수 있었음은, 보이지 않는 장인의 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몸돌에 새긴 사천왕상은 장중하다.

이번 화재를 거울삼아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일제 점검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매번 입으로만 앵무새가 따라하 듯, 문화재의 소중함을 떠들어 댈 것이 아니라, 실제로 완벽하게 보존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지켜 낸 문화재들은 한번 잃으면 그만이다. 그런 자산을 이렇게 바보스럽게 잃는 우를 다시는 범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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