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입구나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나무나 돌을 조형 해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에 처음으로 기록에 보인 장승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나 ‘수살목’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기능을 갖는 장승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장승의 기능은 경계표시장승, 로표장승과 비보장승 등으로 구분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장승의 기능은 대개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경계표시 장승은 사찰 등의 입구에 세워, 잡귀들의 출입을 막고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로표장승은 길목에 세워, 길의 안내를 하는 기능을 갖는 장승을 말한다. 비보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마을로 드는 재액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장승나라 청양, '장승무덤'도 있네.

 

청양군 대치면 장곡사 입구에는 장승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 장승공원은 칠갑산 주변 마을에서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 10여 개 마을에서 지내오는 장승제로 인해, 1999년 칠갑산 장승문화축제를 개최하면서 조성한 전국 최대의 장승공원이다. 칠갑산 주변에는 대치리 한터마을을 비롯하여, 이화리, 대치리, 농소리, 정산면 용두리, 송학리, 천장리, 해남리, 대박리, 운곡면 위라리, 신대리 등에서 장승제가 전해지고 있다.

 

 

장승공원 안에는 장승체험관을 비롯하여 전국 최대의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 청양 마을의 장승과 각 지역별 장승, 시대별 장승, 창작 장승, 외국의 장승까지 두루 갖추고 있다. 약 300기가 넘는 장승공원에 서 잇는 장승들은, 그 수명을 다해 쓰러지면 ‘장승무덤’에 갖다가 놓는다.

 

이 많은 장승들, 비오는 날 더 괴이하네.

 

7월 14일 비가 쏟아지는 장마에 장곡사를 둘러보고 난 후, 장승공원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들고 작은 카메라를 지참하고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비가 심하게 내리니 장승공원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편안하게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서 있는 장승들을 만나본다.

 

 

왕방울 눈에 매부리 코, 듬성듬성한 이빨을 보이며 희죽이 웃고 있는 장승. 그런가하면 새치름한 표정으로 비가 싫다는 듯 눈썹이 치켜 올라간 장승도 보인다. 허리가 휘어져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장승이 있는가 하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웃음보를 터트릴 것만 같은 장승도 보인다.

 

장승공원을 한 바퀴 돌아본다. 참으로 별별 장승이 다 있다. 그 많은 장승들이 하나같이 모습들이 다 다르다. 장승은 깎는 사람의 모습과 마음을 닮는다고 했던가? 아마도 이 장승을 조성한 작가들의 심성이란 생각이다. 우중에 돌아 본 청양의 장승공원. 속으로 되놰 본다.

“이 많은 장승들이 서 있는데 청양에 무슨 일이 있겠어?”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목신리에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55호로 지정이 된 고려 후기의 석조입상인 ‘목신리 보살상’이 자리한다. 이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지방도 392호선 옆 나지막한 구릉 위의 보호각 속에 안치되어 있다. 보호각은 2007년에 찾았을 때는 좌우 각 한 칸인 목조 가구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이 보호각의 지붕이 초가였다고 하는데, 2009년에 이곳을 찾았을 때는 맞배지붕을 얹은 기와로 깨끗하게 보호각이 꾸며져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 슬레이트 지붕일 때의 가림나무가 그대로 있어, 안을 들여다보는데 상당히 불편하다.

 

 

1888년에 중수를 한 보호각

 

목신리 보살상을 보호하고 있는 보호각의 종도리에는 묵서로 “광서십사년무자십일월 갑시(光緖十四年戊子十一月初一日 甲時)”라고 쓰여 있어, 1888년에 이 보호각의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보호각에 사용된 초석 중의 일부에는 주좌가 뚜렷한 초석이 남아 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주변이 사지였음도 간과할 수 없다.

 

목신리 보살입상은 목신리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조성되어 있어, 마을의 수호, 기자, 기복, 치병, 기우 등을 바라는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을 미륵으로 신앙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보호각

 

현재 보살상이 서 있는 구봉마을을 조선시대에는 양디현 목악면 장승동이라고 불렀다. 이 불상이 서 있는 입구에 장승이 서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에서는 보호각 안에 안치되어 있는 이 석조불상을 ‘미륵불’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속칭 ‘언청이미륵’이라고 한다. 이는 이 석조불상의 코가 마모가 되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목신리 보살상은 머리에 갓 모양의 둥근 보개가 씌어져 있는데, 이 보개는 목신리 보살상과 석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후대에 조성해 올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보개를 덧씌운 이유는 사람들이 이 석조입상을 미륵으로 여기고 싶은 심리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인근의 가창리 미륵입상에서도 볼 수 있는데,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불이 현재까지 미륵으로 통칭되는 예는 전국적으로 약 300여 구에 달한다.

 

 

보개 아래에는 삼엽의 높은 보관을 쓰고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보관 중앙에 화불이 표현되어 있다. 이는 목신리 보살입상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방형의 얼굴은 마모가 심해 눈, 코, 입의 표현은 잘 알아볼 수 없지만, 양 볼과 턱에는 살이 많다. 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귀를 감싸고 흘러내린 보발은 양 어깨까지 내려와 있다.

 

지방에서 조성한 보살상으로 보여

 

목은 상당히 짧고 어깨는 위축되어 있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보살상이 흔히 걸치는 천의가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보편화된 불의형 대의를 걸치고 있다. 옷 주름은 선각으로 간략하게 중요한 부분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외장한 채 중지와 약지를 구부렸으며, 왼손은 가슴까지 바짝 들어 올려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이 보살상의 높이는 155㎝, 보관 높이 25.5㎝, 상호 길이 60㎝, 어깨 폭 78㎝이다.

 

2007년 답사 때의 슬레이트 지붕 보호각

 

목신리 보살입상은 현재 마모가 너무 심하여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머리 부분이 신체에 비해 상당히 크고, 법의가 형식적인 선각으로 표현된 점이나, 양팔의 처리가 부자연스럽고 조각 기법이 서툰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고려 후기에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된 보살상으로 보인다.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이곳이 어디라고 하면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원주 거돈사지라고 한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아! 그곳'하고 알 수도 있다. 부론면 소재지에서 정산리로 가는 고갯길은 넓지가 않다. 가다가 큰 차라도 만나면 비탈 옆으로 바짝 차를 붙여야만 할 때도 있다. 어제부터 내린 눈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다행히 명절 때라 고향으로 찾아올 사람들 때문에 도로에 눈은 말끔히 치워졌다.

 

석장승 2기가 길 가에 서 있어

 

삼거리에서 정산1리를 지나 2리로 들어가면 마을회관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 우측에 석장승 2기가 마주하고 서 있다. 장승은 길을 가운데 두고 마주서게 자리를 잡지만, 정산 2리의 석장승은 길가 우측에 마주하고 있다. 길에서 보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 지하여장군이고, 길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 천하대장군이다.

 

 

이 석장승의 옆에는 각각 솟대를 세워놓았다. 천하대장군은 사모를 쓰고 눈과 코는 돋을새김을 하였다. 그리고 이빨을 큼지막하게 선각으로 처리를 하였다. 복판에는 네모나게 자리를 내고 천하대장군이라 한문으로 썼으며, 허리 부분을 금줄로 묶어 지하여장군과 연결해 놓았다. 지난해 친 금줄은 낡고 색이 변했지만, 이 마을이 장승제를 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꽂은 형상이다. 그리고 눈과 코 이빨은 천하대장군과 다름이 없다. 복판에는 지하여장군이라 한문으로 음각을 하고, 허리에 금줄을 묶어 천하대장군과 연결을 했다. 그리고 또 한 줄은 각 장승과 함께 있는 솟대에 연결을 했다. 금줄은 왼새끼를 꼬아 두르는데, 한번 두른 금줄은 다음 해에 새로운 제를 지낼 때까지 그대로 놓아둔다.

 

천하대장군인 숫장승은 귀가 크고 눈과 코를 돋을새김을 하였다

지하여장군은 비녀를 지른 형태로 조형을 하였다.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솟대는 위에 기러기를 올린다. 기러기는 멀리 날 수가 있다고 하여. 멀리서 오는 액을 막는다는 뜻이다.

 

거돈사지 앞에도 장승이

 

정산2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정산 3리가 된다. 이곳에는 사적 제168호인 거돈사지가 있다. 신라 때에 창건된 거돈사는 임진왜란 때에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거돈사를 들어가기 전 우측에 폐교가 된 학교가 있다. 그 담장 밑에 나무로 만든 목장승이 여러 기가 서 있었다. 눈길을 달려 온 것도 기축년을 보내고 경신년을 새롭게 맞는 날에, 묵은 것을 장승에 빌어 다 털어버릴 생각에서다. 그리고 눈이 쌓인 목장승의 모습을 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한 5 ~ 6년 전인가 이곳 거돈사지를 찾았을 때 만났던 목장승군. 아마 7 ~ 8기나 되어 보이는 목장승들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돌무지 위에 서 있었다. 그 목장승군이 그렇게 정겨워보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가니 목장승이 보이지가 않는다. 그 대신 정산 2리의 석장승과 같은 장승이 이곳에도 마주하고 서 있다.

 

매년 해를 거르지 않고 제를 지내는 정산리. 그런데 왜 목장승을 없애고 석장승으로 대체를 한 것일까? 물론 목장승은 매년 새로 깎아서 세워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서 바꾼 것일까?

 

정산3리 거돈사지 앞에는 이런 목장승이 서 있었다.

 목장승을 대체한 정산 3리의 석장승

천하대장군. 밑에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얹었다.

 

기단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정산 3리의 장승은 색다르다. 먼저 기단인 네모난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장승을 세웠다. 천하대장군은 폐교 담장 쪽에 서 있고, 지하여정군은 길 쪽으로 서 있다. 이곳도 두 장승이 마주하게 놓았는데, 지하여장군은 길을 등지고 서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정산 2리의 장승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 장승들을 보니 특이한 점이 있다.

 

솟대가 나무를 깎아 대를 세우고 그 위에 기러기를 올린 것이 아니고, 장승의 머리 위에 크게 기러기를 깎아 올려놓았다.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색 기러기를, 지하여장군의 머리 위에는 붉은색 기러기를 올려놓았다. 허리춤 밑으로 묶은 금줄도 서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몇 년만에 찾아온 정산리. 바쁘게 달려와 목장승 머리에 쌓인 눈을 보고 싶었는데, 그 대신 이렇게 돌로 깎아 색다르게 변한 장승을 보게 되다니.

 

천하대장군의 머리 위에는 검은 기러기를 올렸다

지하여장군의 위에는 빨강 기러기를 올려 놓았다.

 

그러나 그런 형태를 중시하는 것은 아니다. 장승을 세우고 정성을 드리는 것은, 모두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함이다. 이곳 정산리의 주민들과,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이 모두 평안한 경인년이 되기를 바란다. 눈이 쌓인 곳에 발을 묻고 있는 장승들. 그 차디찬 석장승의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듯하다. 계사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

계룡산 구룡사지 탐방기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389번지 외 4필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39호 공주구룡사지(公州九龍寺址)로 지정이 되어 있다. 구룡사지가 있는 상신리는 계룡산의 북으로 뻗은 중턱에 절터가 있으며 이 지역을 법당골, 부도골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을에는 많은 석조물 조각들이 흩어져 있는데, 주변에서 〈구룡사〉 라고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구룡사터라고 부르고 있다.

 

마을의 안쪽 절의 입구로 추정되는 곳에는 당간지주가 서 있으며, 주춧돌과 장대석, 부도의 받침돌이 남아 있었는데,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에는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들로 보아 백제 후기나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한다.

 

계룡산 북쪽의 절 구룡사

 

구룡사지는 계룡산의 사방에 있는 사찰의 북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에는 동학사, 서에는 갑사, 남에는 신원사, 그리고 북에는 구룡사가 있다. 구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절집들은 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아직 건재하고 구룡사만 사라진 셈이다.

 

구룡사가 있던 공주시 상신리는 계룡산 자락 골 안에 자리 잡고 있다. 대전 유성에서 공주 공암 쪽으로 가다가 보면 좌측으로 동학사로 가는 길이 있다. 이곳을 박정자 고개라고 부르는데 조금 더 가면 온천리에서 좌측으로 계룡산 쪽으로 난 길이 있다. 먼저 나오는 곳이 하신리 마을이고 그 곳을 지나면 상신리 마을이 나온다. 대전, 공주를 가는 길에서 상신리 까지는 6km 정도가 된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났다. 대전에서 방송일을 할 때 취재를 하려고 몇 번 들렸던 상신리마을은 참 운치있는 마을이었다. 마을 안길은 흙길에 돌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마을의 담장은 돌로 쌓아 놓아서 그 위로 담장이가 타고 오르는 것이 퍽이나 시골스럽고 인상적이었던 곳으로 기억이 난다.

 

바위 위 덩그마니 앉은 소나무 한 그루

 

상신리는 찾아 들었을 때 처음 만나는 것은 바로 개울 곁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에 솟아있는 한 그루 소나무 때문이었다. 그 소나무가 어찌나 그리도 생명력이 있고 멋있어 보였는지 모른다. 이번 길에도 그 소나무는 그렇게 한 결 같이 바위 위에 뿌리를 박고 서있었다. 그러나 어딘지 그 싱싱하던 푸름을 잃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바위에는 깊게 무엇인가를 적어 놓은 듯한 흔적들도 희미하다. 아마 장수를 위해 이름이라도 적어 놓은 것은 아닐까?

 

바위를 지나면 마을로 들어가는 우측 산자락에는 천하대장군이 좌측 개울가에는 지하대장군이 솟대와 함께 서 있다. 상신리는 산제(山祭)도 함께 지내는데 이 마을은 산제를 정성들여 지내지 않아서 염병이 돌았다고도 하고, 마을의 장승터에서 나무를 자른 사람이 화를 당했다는 이야기들도 전한다. 그래서 정월 열나흩날이 되기 전에 미리 장승이 있는 곳에 금줄을 치면 그날부터 외지인은 상신리로 들어갈 수가 없다.

 

마을 주민 중에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 제관을 선출하면 그날부터 금기를 지키게 된다. 우리 풍속에는 제를 지내는 제관들의 금기는 통례적으로 부부가 합방을 금지하고, 비린것과 날것을 먹지 않으며, 매일 냉수에 목욕을 하고, 출타를 금하는 등 까다롭게 지켜야 할 것들이 많다.

 

상신리의 장승은 양편에 2기씩 서 있는데 눈을 치켜뜨고 이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다. 복판에는 각각 <天下大將軍>과 <地下大將軍>이라고 묵서를 해 놓았다. 장승을 지나면 마을 첫 집이 식당이다. 그 모서리에는 금줄을 매어 놓은 선돌이 보인다.

 

 

옛 절터를 알리는 당간지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차를 돌릴 수 있는 공터가 보이는데 그 앞에 당간지주가 있다. 한편에는 돌담 위에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그래도 옛 정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돌담은 그대로인데 집들이 많이 변했다. 하기야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세월이었으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길 바랄쏘냐?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을 공동 우물은 덮개를 덮어 놓았고 그 맑은 물이 흐르던 물길은 메말라버렸다. 마을 안길이 예전에는 흙길에 돌을 박아 놓아 걷는 기분이 좋았는데 지금은 온통 시멘트로 발라버려 삭막한 기분마저 든다. 어즈버 세월이 이리도 변하게 만들었을까? 마을을 돌고 보니 무엇인가 섭섭한 기분이 든다. 그대로 있기를 바란 내가 잘못이긴 하지만.

 

 

과거에 구룡사가 어느 정도의 절집이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현존하는 동학사, 갑사, 신원사의 규모로 볼 때, 아마 그 정도의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할 뿐이다. 계룡산 북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구룡사지에 남아있는 당간지주. 윗부분은 떨어져 나가고 여러 쪽의 석재를 이용한 기단 위에 서 있다. 기단면에는 장방형으로 구획된 내구에 연화문이 장식되어 있고 지주 사이에는 원형의 철통을 세웠던 주좌가 남아 있다.

 

오랜 시간 이곳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과 무언의 대화를 했을 구룡사지 당간지주. 바람도 없는 날인데, 갑자기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날리는 흙먼지가 눈을 맵게 만든다. 세월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변해야하겠지만, 변화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오늘 또 마음의 아름다움을 하나 상신리에 버려두고 길을 떠난다.

마을 입구, 혹은 사찰 입구에 보면 부릅뜬 눈에 왕방을 코, 그리고 삐져나온 날카로운 이빨. 어째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이 있다. 흔히 장승이라 부르는 이 신표는 지역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다. 장승, 장성, 장신, 벅수, 벅시, 돌하루방. 수살이, 수살목, 수살 등 다양하게 부르고 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대개는 마을 입구에서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만, 사찰이나 지역 간의 경계표시나 이정표의 구실도 한다. 장승은 대개 길 양편에 나누어 세우고 있으며, 남녀 1쌍을 세우거나 4방위나  5방위, 또는 경계 표시마다 11곳이나 12곳에도 세우기도 한다. 마을 입구에 선 장승은 동제의 주신으로 섬기는 대상이 된다.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장승. 깎을때마다 세워놓아 집단의 장승군으로 변했다. 솟대와 함께 서있다. 2010, 3, 20 답사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장승의 모습

장승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 세운다. 나무를 깎아 세우면 ‘목장승’이라 하고, 돌을 다듬어 세우면 ‘석장승’이라 한다. 장승만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솟대, 돌무더기, 서낭당, 신목, 선돌등과 함께 동제의 복합적인 형태로 표현이 되기도 한다.

장승의 기원에 대한 정설은 아직 정확하지가 않다. 대개는 고대의 ‘남근숭배설(男根崇拜說)’과 사찰이나 토지의 ‘경계표지’ 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이 있기도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설에는 솟대나 선돌, 서낭당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좌측은 충남 공주시 상신리 마을 입구에 세워진 목장승(2007, 1, 25 답사) 우측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무갑리 목장승(2008, 12, 5 답사)

좌측은 전북 남원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석장승(2010, 11, 27 답사) 우측은 전남 여수 영등동 벅수(2007, 12, 6 답사)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 기록이 보여

통일신라시대에 세운 보물 제157호인 장흥 보림사의 <보조선사탑비>에, 장승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이 탑비의 내용에는 759년에 ‘장생표주(長生標柱)’가 처음으로 세워졌다고 했다. 그 외에 <용재총화>나 <해동가요> 등에도 장승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나 고려 때는 이미 장승이 사찰의 입구에 세워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경계표시로 삼았다고 생각한다.

이 외에도 장승은 성문, 병영, 해창(海倉), 관로 등에 세운 공공장승이나, 마을입구에 세운 수호장승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하면서 민속신앙의 대상물로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현재까지도 마을에서는 장승을 신표의 대상물로 삼고 있는 곳이 상당수가 있으며, 옛 지명 중에 ‘장승백이’ 등은 모두 장승이 서 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엄미리 장승은 마을의 입구에 서서 수호장승의 역할을 하지만, 밑 부분에는 거리를 알리는 로표장승의 역할도 한다. 2011, 1, 3 답사 

함양 벽송사 목장승. 목장승이 오래되어 훼손이 되었다. 보호각을 지어 보호를 하고 있다. 2010, 12, 11 답사 

장승은 설화나 속담 등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럴 정도로 우리와는 친숙하다는 것이다. 장승을 잡아다가 치죄를 하여 도둑을 잡았다거나. 판소리 변강쇠타령 등에 보이는 장승에 대한 이야기는, 장승이 민초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척 장승같다’거나 ‘벅수같이 서 있다’ 등은 모두 장승의 형태를 빗대어 하는 속담 등이다.

해학적인 생김새는 민초들의 삶의 모습

마을 입구의 양편에 서서 마을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고 서 있는 장승. 처음 장승이 대하는 사람들은 ‘무섭다’고도 표현을 하고, ‘흉측하다’고도 표현을 한다. 그러나 이 장승들은 하나같이 그렇게 서 있으면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장승은 점점 마을 사람들을 닮아간다.

선암사 입구에 세워진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경계표시 장승. 2011, 3, 5 답사

사람들은 목장승을 1년에 한 번, 혹은 3년에 한번 씩 깎아 마을입구에 세우면서, 자신들의 심성과 닮은 모습을 만든다. 석장승 또한 돌을 다듬는 장인의 마음을 닮는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장승이 무섭기도 하지만, 해학적인 요소를 많이 띠고 있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권력이나 물질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는 험상궂은 얼굴 뒤에, 같은 민초들에게는 한 없이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이란 생각이다.

오랫동안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남아있는 장승. 아마도 사람들이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은, 언제나 우리 곁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함께 해 왔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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