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전국의 고택답사를 하면서 어림잡아 150집 정도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찾아갈 곳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더 좋은 집들이 남아있어 발길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요즈음 들어 우리 고택에 대해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 고택이 갖고 있는 비밀 몇 가지를 적어본다.

 

사람들은 흔히 안채의 안방이나 건넌방 등의 문이 작다거나, 왜 사랑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딴 곳으로 내었는가 등을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우리 고택에는 집을 지을 때, 그 모든 것이 과학적이고 윤리적인데서 비롯했다고 하면 조금은 의아해 할 것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에 소재한 전북민속문화재 제22호인 권희문 가옥을 예로, 한옥의 숨은 비밀을 찾아본다.

 

 

조선시대 상류가옥인 권희문 가옥

 

장수 권희문 가옥은 권희문의 선조들이 조선조 영조 49년인 1773년부터 100년 정도에 걸쳐 지은 집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상류가옥의 건물로 안채, 사랑채, 아래채, 문간채, 바깥채, 서쪽채 등과 나뭇간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도 권희문 가옥은 넓은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어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권희문 가옥의 안채에서는 상지삼년계축이월이십묘시주사시상량이라는 상량문으로 보아, 1866년도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채는 전라북도 지방의 가옥 중에서는 보기 힘든 자형 집이다. 고패집으로 지어진 권희문 가옥의 안채는 중문을 들어서면서 바로 부엌의 벽이 보이고, 안방과 윗방을 드렸다. 그 위에 꺾인 부분에는 세 칸 대청과 한 칸 건넌방이 있으며, 대청 한 칸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뜰에 나무를 심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은 대개 안채의 넓은 앞마당을 비워놓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환기 때문이다. 안채의 뒤편에는 대개 후원을 조성한다. 그리고 많은 나무들을 심어 놓기도 한다. 이렇게 앞쪽에는 비워두고, 뒤편으로는 나무를 심어 놓는 이유는 바람의 소통 때문이다.

 

즉 여름이 되면 아무것도 심지 않은 앞마당의 열기가 상당하다. 이럴 때 대청 문을 열어 놓으면, 뒤편 숲에 있는 찬바람이 대청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오게 된다. 뜨거운 열기는 위로 오르게 되기 때문에, 자연 뒤편에 있는 시원한 바람을 끌어오게 된다. 그러면 집안이 모두 시원하다. 이런 과학적인 논리를 이용한 것이다.

 

 

안채 안방의 뒤에 놓는 쪽마루의 용도도 바로 이런 논리를 이용해, 좀 더 시원하게 여름을 나기 위한 방법이다. 또한 안채 앞마당에 정원 같은 것을 조성하면, 겨울에 내린 눈을 말끔히 치울 수 없어 찬 기운이 오래가게 된다. 눈을 말끔히 치우자면 정원 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공간을 비워두는 것이다.

 

안채 안방의 작은 방문은 왜일까?

 

안채의 안방 문을 보면 윗방의 방문보다 작다. 그리고 방문의 아래쪽을 나무로 문양을 내어 꾸며놓았다. 이런 형태를 보고 사람들은 어른이 주거하는 안방이기 때문에, 예를 갖추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는 뜻이다라는 말을 한다. 물론 그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안방문을 작게 만드는 것 역시 기후에 따른 대처방법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바람은 겨울 동안에는 대륙의 차가운 공기가 남하하여 한파를 몰고 오고, 여름에는 해양의 무더운 공기로 여름 내내 폭서가 지속된다. 이러한 계절의 온도 때문에 방문을 작게 하고 그 턱을 높이는 것이다. 즉 겨울에 찬바람을 가급적 적게 받도록 하고, 방안의 열기를 보호하자는데 있다.

 

하기에 이렇게 구성이 된 안방의 문은 사람들이 출입을 하지 않는다. 부엌 쪽에 안방을 두고, 그 위에 대청과 연결되는 윗방을 만드는 것도 기온과 관계가 지어진다. 즉 겨울에는 따듯하게 안방의 실내기온을 보호하고, 여름이면 대청과 연결된 윗방의 문을 열어 바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건한 사랑채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장소로도 쓰여

 

권희문 가옥의 사랑채는 숭정기원후계사삼월초십일묘시립주미시상량을해오일중수라는 상량문이 있다. 이 내용으로 보면 1773년 세워지고, 1875년에 다시 중수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랑채는 안채가 세워진 뒤에 다른 곳에서 옮겨왔다고 전한다. 따라서 상량문에 쓰인 중수연대인 1875년은 사랑채를 이건한 해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랑채에는 '의왕서'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산 높고 물이 맑은 곳에 곁들인다.’라는 뜻이다. 이 사랑채는 예전에는 과객들의 숙소와 아픈 사람을 지료하는 곳으로 사용을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지방의 상류가정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지나던 사람들을 묵게 하였던 것이란 생각이다.

 

 

사랑채 뒷문이 딴 곳으로 행한 이유는?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동하는 공간에는 쪽문을 내어 놓거나, 아니면 사랑채 뒤편에 문을 낸다. 이러한 문은 사랑채에서 주로 거주하는 바깥주인이 안채로 이동하는 동선을 고려한 것이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안채 쪽으로 낸 문은 바로 안채를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다. 뒤편에 방향이 다른 문을 낸 작은 마루를 놓거나, 아니면 툇마루를 벽으로 막아 사용을 한다.

 

이렇게 사랑채에서 안채를 직접 바라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은, 우리사회의 오랜 유교적 습속 때문이다. 우리 고택은 그저 생활을 하기 위해 지은 것이 아니다. 지역마다 나름대로의 풍토에 맞게 집을 지었으며, 용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점을 알고 찾아간다면, 좀 더 고택답사의 묘미가 있지 않을까?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돌다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이번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 양악리에 가면 계곡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한 여름 더위를 식혀주는 곳이 있다. 물이 떨어지는 곳에 소(沼)가 있어, 이 소를 ‘용소(龍沼)’라 부른다. 소 옆에는 ‘장수 양악탑’이라고 부르는 5층 석탑이 서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세운 시기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탑의 양식 등으로 볼 때 고려 후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이 탑이 서 있는 주변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하며, 이 탑을 ‘심방사 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심방사라는 절이 언제 적에 이곳에 있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다만 양악리 일대에는 향고 터, 동헌 터 등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볼 때, 고려 말기에 이 부근에 심방사라는 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로 만들어진 탑

이 양악리 탑은 높이가 2m 정도로 크지 않은 탑이다. 주변에 많은 암반이나 석재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작은 석탑을 조성했다는 것은, 이 탑이 지방의 장인에 의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보인다. 탑은 장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파손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 탑의 원형을 알아 볼 수가 있다.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있으며, 누군가 탑 위에 둥근 강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탑은 그 생김새가 딴 지역의 석탑과는 다르다. 1층의 몸돌은 사다리꼴로 만들어졌으며, 2층부터 4층까지는 각 측의 지붕돌인 옥개석 위에 몸돌을 붙여 일석으로 조성을 하였다. 몸돌 밑에는 아래 단의 지붕돌이 붙어있는 형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탑의 모양은 소박하게 표현을 하였다.




심방사 탑을 찾아 양악리를 맴돌다

5월 20일 오후에 잠시 들린 장수군. 몇 번인가 문화재 답사를 하면서 들린 곳이지만, 20일 낮에 들린 양악리는 여러 가지 모습을 만날 수가 있었다. 양악리는 애국지사요 한글학자인 건재 정인승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 마을에는 건재 기념관과 재실, 동상 등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

심방사 탑의 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지만, 정작 탑은 찾을 수가 없다. 마을을 돌다가 만난 주민에게서 탑의 위치를 파악하고서야 탑을 찾을 수 있었다. 탑은 마을 반대쪽 계곡의 물소리가 우렁차게 들리는 소 옆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 크지 않은 탑이기에 마을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가 않는다.



전설로 남아있는 심방사

양악리 오층석탑은 양악마을과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 마을은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역으로 격전지였던 흔적이 있다고도 한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마을에는 옛날에 한 도사가 살고 있어, 학을 길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마을이름을 양학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마을 앞에 산을 ‘학산’이라 부르고, 이웃마을로 가는 고개를 ‘학고개’라고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원래 백제의 심방사라는 절에 있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때 전화로 심방사가 소실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탑을 옮기거나 없애면 흉년이 든다고 하여, 마을에서 보존을 하고 있다.


지붕돌과 몸돌이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특이한 양악탑. 심방사라는 절이 어떤 절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암벽을 흘러 소로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그 물소리를 들으면서 오랜 세월을 자리를 지켜 온 석탑. 지금은 그 위로 저수지 공사를 하느라 중장비의 굉음만 시끄럽다. 그렇게 또 다른 소리를 들어가며 탑은 묵묵히 오늘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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