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장수군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거대석불입상.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477번지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모셔진, 전북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된 원흥 석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서는 고려시대의 거대석불입상에 속하는 것 같다.

 

원흥 석불입상은 현재 이곳에 있는 원흥사 미륵보전 안에 소재하고 있는데, 그 전체 높이가 4m나 되는 거대석불이다. 이 석불은 문화재청 소개에는 삼국시대의 석불,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고려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다. 또한 이외에도 석불입상의 무릎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다고 소개를 하고 있어,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땅속에 묻힌 부분이 또 있다는 것인지

 

문화재청 안내에도, 장수군청의 소개와 절에 세워진 문화재 안내판에도 현재 1m 정도가 땅 속에 묻혀 있다라고 소개를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 원흥 석불입상은 땅 속에 묻힌 부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가 맞지 않는 이러한 문화재 안내문들 때문에, 종종 혼란을 겪기도 하는 것이 우리 문화재의 현실이다.

 

 

이 석불입상을 보려고 원흥사를 찾아가 사진을 좀 찍겠다고 부탁을 했다. 절의 공양주 인 듯한 분이 나와 곤란하다는 듯 이야기를 한다.

 

우리 스님은 부처님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세요.“

신문에 내려고 하는데, 사진 몇 장만 찍을게요.”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런 소리를 들었어요. 홍보를 해주겠다고

그랬나요?. 저는 꼭 소개를 하겠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너무하지. 사진만 찍어가고 나온 대는 없어요.‘”

 

이런 경우는 참 난감하다. 요즈음은 문화재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꽤 많아 진듯하다. 답사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그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듯한데, 소개가 되지 않아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다니. 이런 경우 내 잘못은 아니지만, 괜히 미안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둔탁한 느낌이 드는 거대석불

 

원흥 석불입상은 머리가 큰 편이다. 소발에 이마에는 백호가 있고,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분명하지가 않다. 큰 얼굴에 비해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큰 편이다. 귀는 어깨까지 닿을 듯 늘어져 있다. 이 석불입상은 노천에 방치가 되어 있던 것을, 1904년 마을에 사는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전각을 조성해 모셨다고 한다.

 

그 뒤 1972년 주지 김귀수씨가 법당 중앙에 위치하도록 설계하여 안치하였는데, 석불의 머리 위에는 모자가 얹혀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석불은 모자가 없으며, 몸에 비해 얼굴이 큰 편이다. 신체의 어깨와 몸의 너비가 같은 것이 전체적으로는 둔해 보인다. 더욱 목이 매우 짧게 표현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 드는 것만 같다.

 

 

고려시대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입상

 

어깨에 걸친 법의는 통견으로 옷 주름이 다리부분까지 늘어져 있다. 양 어깨를 감싼 법의는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배 부분에 댄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배 아래쪽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형식적으로 표현한 옷 주름은 무릎 아랫부분에서 마무리를 하였고, 그 밑으로는 안치마를 겹쳐 입었다. 현재 놓여있는 발은 원래의 것이 아닌 듯하다. 석불입상의 크기나 표현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거대석불로 추정되는 원흥 석불입상. 찍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문까지 열어주는 바람에 촬영을 할 수 있었지만, 바로잡지 않은 안내판으로 인해 썩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래도 부처님의 마음으로 이해를 하고 다녀야 하는 것인지.


 

문화재청 설명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마하리 팔공산 기슭에 있는 원흥사 법당 안에 모셔져 있는 높이 4m의 거대한 석불입상이다. 원래 노천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04년 이 마을에 살던 이처사 부부가 꿈을 꾼 뒤 불상을 만들어 모셨으며, 그 뒤 딸 청신과 손자 김귀수가 현재의 원흥사를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살찐 모습이며 눈과 입이 작은 편이나 코는 큰 편이다.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으며 3개의 주름인 삼도(三道)는 분명하지 않다. 신체는 어깨와 하부의 너비가 같아 둔한 느낌을 준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데 가슴이 거의 노출되었고, 양 소매와 배 아래쪽으로는 형식적인 옷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은 양 소매에 넣어 감추고 있으며, 무릎 이하는 땅속에 묻혀 있다. 머리 위에 모자가 얹혀져 있었다고 하는 이 불상은 손모양이 특이하며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해진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는 그 시기마다 삶의 척도를 재는 가치관이 다르다. 지난 과거에 삶을 이 시대에 맞추어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하기에 어떤 사람이 어느 시기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그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을 배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흔히 근본이니 뿌리라는 말을 쓴다. 무슨 시시콜콜한 말이냐고도 하겠지만, 그런 것을 지난 삶에서는 결코 무시할 수가 없었는가 보다. 전북 장수군 산서면 하월리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71호인 절열양정씨지려가 있다. 작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전각에 節烈兩丁氏之閭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전각 안에 걸린 두 사람의 여인

 

말 그대로 하자면 두 사람의 정()씨가 굳건한 마음으로 절개를 지킨 것을 기리기 위해 문을 세운다는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과연 누구였으며,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한 칸의 정려각은 조선조 후기에 세운 전각이다. 주변은 흙을 조금 높게 돋우어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좌우로 갈라 두 사람의 정려가 있다.

 

이 정려는 절개와 지조를 지킨 두 사람의 여인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가 정씨이기 때문에 양정씨라고 표현을 했다. 이 정려각은 조선조 경종 3년인 1723년에 세웠으며, 그 뒤 순조 19년인 1819년에 고쳐 지었다. 단칸 팔작지붕으로 마련한 양정씨 정려는 그저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다.

 

 

지난 47, 장수군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다가 만난 양정씨지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작은 전각 하나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에 십상이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에도 눈길을 떼지말아야 하는 문화재 답사에서는, 그런 소소한 것도 확인을 해야만 한다.

 

죽음으로 가문을 지켜내다

 

이 두 사람의 여인은 정황(1412 ~ 1560)의 후손들이다. 정황은 조선 중기 전북 남원 출신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원이다. 자는 계회, 호는 유헌, 시호는 충간으로, 부친은 필산감역 정세명이다. 정황의 후손이라는 이 두 여인의 행적은 정려 안에 걸린 현판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안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현판과, 뒤편에는 행적을 기록한 현판이 보인다.

 

 

한 사람은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고, 스스로 물 속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또 한 사람은 남편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남편의 뒤를 따라 죽음을 택했다. 옛날 이야기라고 해서 당시의 사상이 죽음으로 몰아갔다라는 생각을 하겠지만, 그 시대적인 배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정려에 써 있는 글귀를 보면 전각 안을 바라보면서 우측에는 절부라 기록을 하였으며, 사옹원 첨정 권백시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좌측에 적힌 것은 열녀라 적었으며, 성균생원 풍천 노세기의 처 창원정씨 지려이다. 뒤편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뒤편에 걸린 편액에 적힌 그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음이 아쉽다. 다만 한 여인은 절부로 한 여인은 열녀로 기록해 절열지려라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 두 분의 여인들은 그길이 스스로를 지키고, 가문을 지킨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오랜 유교적 사고에서 온 행동이라고 일침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여성은 그길이 최선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전각 앞에서서 머리를 숙이고, 두 여인의 명복을 잠시 빌어본다. 아픈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비운의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반계정. 소나무에 둘러싸인 이 정자는, 반계(盤溪) 정상규 선생이 지은 정자라고 전한다. 반계선생은 자신도 생활이 어려웠으나, 남을 돕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남의 어려움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선생이기에, 어려움이 더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은 정자를 개울 위에 짓고 세상을 피해 살았다고 한다.

 

장수군의 답사를 하면서 우연히 찾아간 반계정. 반계정은 비지정 문화재로 입간판 하나가 서 있지 않다. 산서면 사계리에 소재한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34호인 창원정씨 종가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정자이다. 반계정 주변에는 키가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를 하고 있어 고풍스런 모습이다.

 

 

 

축조한지 100년이 지난 반계정

 

반계정은 1909년에 지어진 정자로 전해진다. 100년이 조금 지난 세월이다. 일각문 앞으로는 밭이 있고, 뒤로는 작은 내가 흐르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는 꽤 많은 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만큼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이 든다. 반계정은 몇 년 전에 보수를 했다고 한다. 담은 기와와 돌, 황토를 섞어 쌓았는데, 정자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이다.

 

일각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면 두 칸, 측면 두 칸으로 구성된 반계정이 있다. 반계정은 정자에 오르는 계단이 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측 편에 장대석을 쌓아 올렸다. 마루는 누마루를 깔고 밑으로는 네모난 돌을 주초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반계정에는 몇 가지 특이한 것이 눈에 띤다.

 

 

모서리에 붙은 한 칸의 방

 

우선은 반계정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다. 정면의 기둥은 둥근 기둥을 사용한데 반해, 뒤편으로는 네모난 기둥을 사용했다. 그리고 뒤편 우측으로 방을 몰아서 붙여놓았다. 계단을 오르면 바로 우측에 한 칸의 방이 있다. 방은 정자의 마루를 접한 부분에는 두 짝 문을 두고, 외부로는 한 짝 문을 옆으로 뉘여 달아냈다.

 

정자의 앞부분은 누마루를 깔고 방의 우측 한 칸에도 마루를 깔았는데, 앞쪽의 누마루보다 약간 층이 지도록 하였다. 계단과 벽면을 뺀 남은 부분에는 모두 난간을 둘러놓았다. 방은 온돌방으로 꾸며 한 겨울에도 이곳에서 지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반계 정상규 선생은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전해진다.

 

 

도난당한 선생의 일생

 

반계정에 대해서 조금 자세하게 알고 싶었으나, 아무런 안내판이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반계정 옆에서 나무를 심고 계시는 분에게 말씀을 드려보았더니, 마침 반계선생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고 하신다.

 

저 반계정은 언제 지어졌나요?”

“100년이 조금 지났어요. 정 상자 규자를 쓰시는 어르신이 세상을 피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사셨죠.”

정자 주변 경치가 아주 좋아요

예 저 소나무들이 저희가 어릴 적에는 흔들고 놀던 나무였는데, 그동안 저렇게 큰 고목이 되어버렸네요

어르신 춘추가 어떻게 되셨나요? 죄송합니다.”

올해 여든 여섯이 되었네요.”

반계정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아쉽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반계집이란 선생님의 문집이 세권이 있었는데 도난을 당했어요. 그 책에는 반계정에 대한 내용도 다 들어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죠

 

 

더 이상 어르신께 질문을 할 수가 없다. 말씀을 하시면서도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괜히 종가집 핑계를 대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알 수 없는 반계선생의 일생이 더욱 가슴 아프다. 뒤돌아보는 반계정 담 너머로 선생의 송서(誦書)가 들리는 듯하다.

장수군 천천면 비룡리 38번지에 소재하는 신광사. 42일 토요일 오후, 장수에서 726번 지방도를 타고 천천면 소재지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도로변에 성수산 기슭에 자리한 신광사라는 절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에는 탑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가 절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내판을 따라 좌측으로 접어들면, 신광사로 들어갈 수가 있다.

 

신광사는 신라 흥덕왕 5년인 831년에 무염국사가 창건하였고, 조선조 헌종 14년인 1848년에, 당시 장수현감인 조능하에 의해 중창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도 운장스님의 노력이 함께 했다고 하지만, 현감에 의해서 사찰이 중창이 된 것은 특별한 일이다. 이 신광사에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대웅전아 있다. 이 대웅전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너새기와를 올린 대웅전이라니

 

너새기와란 몇 가지 뜻이 있다. 우선은 측면에 대는 박공 옆에 직각으로 대는 암키와를 너새기와라고 부른다. 두 번째는 지붕을 이을 때 사용하는 얇은 조각의 돌기와를 말하기도 한다. 이 신광사 대웅전에서 말하는 너새기와는 지붕을 얹은 얇은 돌로 된 기와를 말하는 것이다.

 

신광사를 찾아 문화재 안내판을 찾아보니 대웅전 앞에 서 있다. 대웅전이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설명에 너새기와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너와인줄을 모르고 있다가, 설명을 읽고 다시 보니 정말로 너와로 지붕을 올렸다. 어떻게 절집 대웅전지붕을 돌을 얇게 편을 떠 만든 너와로 올린 것일까?

 

 

특이한 형태의 신광사 대웅전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은 모두 얇은 돌로 만든 너와로 덮었고, 맨 위 부분만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건물의 양 끝이 처져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붕의 끝을 위로 약간 올렸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무게를 받치는 있는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처마는 겹처마로 구성하였다.

 

축대를 쌓은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대웅전을 지었다. 대웅전의 기둥 받침인 주추는 자연석 그대로를 이용했으며, 원형의 기둥을 세웠다. 주심포 사이의 벽에는 딴 곳에서 흔히 보이는 비천상이나 보살상이 아닌, 특이한 그림을 그려 넣었다. 창호도 정면 세 칸 중 가운데 칸은 두 짝 미닫이로 빗살문이며, 양쪽 칸은 두 짝 미닫이로 아()자형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협시보살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과 실천수행의 상징인 보현보살을 모셨다. 대웅전 천정과 마루는 우물마루와 우물천장으로 조성을 하였으며, 천정의 문양은 대단히 화려하게 그려 넣었다.

 

돌담이 아름다운 신광사

 

신광사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멘트나 흙을 사용하지 않고 쌓은 돌담이다. 경내를 둘러싼 돌담은 높이가 1m 50cm 정도가 된다, 반듯하게 쌓은 돌담이 아름답다. 어떻게 흙조차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반듯하게 돌담을 쌓았을까? 그렇게 쌓기 위해서는 많은 공을 들였을 것만 같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보다 더 궁금한 것은 대웅전의 너새기와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너새기와를 올렸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중간에 누군가에 의해 너새기와로 대웅전 지붕을 올렸다는 것인데, 거기에 대한 설명이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신광사는 신라시대 처음으로 지어진 후, 고려를 거쳐 조선조 1597년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소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인조 27년인 1649년에 천혜선사가 중창을 했다고 전한다.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신경준의 가람고, 조선 정조 3년인 1779년에 우리나라 전국에 흩어져 있는 절의 존폐, 소재지, 연혁 따위를 적어서 펴낸 책인범우고등에도 신광사의 명칭이 보인다.

 

신광사 대웅전의 지붕이 언제부터 너새기와를 올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아마도 우리나라 절중에 이렇게 대웅전 기와를 편돌인 너새기와로 올린 곳은 유일한 곳이 아닌가 생각한다. 신광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된 경내. 반듯하게 쌓여진 돌담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절이다.

전북 장수군에는 ‘3(三節)’이라 불리는 분들이 있다. 그 첫째는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주논개를 말한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장수향교 교리인 정경손이다. 임진왜란 때 죽음으로 장수향교를 지켜 낸 인물이다. 정경손의 기념비는 장수항교 안에 서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타루비의 순의리(殉義吏) 를 일컫는다.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바로 타루비의 주인공인 백씨이다. 이름이 전하지 않는 이 백씨라는 인물이 당당하게 장수 삼절에 거론이 되는 것은, 그 의가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타루(墮淚)’란 피눈물을 흘렸다는 뜻이니, 그 마음의 아픔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타루각 안에 서 있는 두 개의 비

 

전북 장수군 천천면 장판리 도로변에는 타루비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큼지막하게 걸려있다. 장수군 어디를 가나 이렇게 문화재 안내판을 곳곳에 걸어두고 있어, 문화재를 찾기에 편안하다. 이런 것 하나를 보더라도 장수군의 문화재보호가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문화재 안내판 길 건너에는 담으로 둘러쌓은 안에 비각 두 개가 서 있다.

 

문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서 있는 작은 비각 안에는 백씨의 뜻을 기리는 비이고, 그 안쪽우측으로 보이는 비각에는 타루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바로 타루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다. 타루각 안에는 바라다보는 왼쪽에 장수이순의비(長水吏殉義碑)’라 적혀있다. ‘장수의 벼슬아치가 죽음으로 의를 지켰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돌을 삼단처럼 깎아 세운 후 그 위에 타루비(墮漏碑)’라 적힌 비가 서 있다. 바로 장수 3절 중 한분인 백씨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도대체 이 백씨라는 분은 어떤 일을 했으며, 왜 이렇게 그를 칭송하는 것일까?

 

피로 암벽에 쓴 글씨 타루

 

조선조 숙종 4년인 16783, 장수현감이 전주감영에 가기 위하여 말을 타고 이 곳 타루비가 서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숲속에서 장끼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았고, 그 소리에 말도 놀라 날뛰었다. 말의 고삐를 잡고 있던 통인이 말을 추스르기도 전에, 현감은 말과 함께 절벽 아래로 흐르는 송탄천(松灘川)’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통인은 말이 빠진 주변을 맴돌며 현감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말과 함께 빠진 현감은 다시는 물 위로 떠오르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자신의 책무를 다하지 못해 현감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죄책감에, 통인은 울면서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었다. 송탄천이 흐르는 암벽에 말과 꿩을 그린 통인은 타루라는 글씨를 피로 쓴 후, 스스로 물로 뛰어들어 자결을 하였다.

 

그리고 124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난 후인 순조 2년인 1802, 장수현감 최수형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곳에 타루비를 세워 물에 빠진 현감과 통인을 위로하였다. 현재 이 타루비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그 통인의 이름은 백씨라고만 전해진다.

 

 

암벽에 쓰인 타루애

 

타루각 우측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있다. 그 밑에는 물이 고였던 흔적이 보인다. 아마도 이곳이 예전 그 송탄천의 물이 흘렀던 곳이었는가 보다. 그 암벽에는 타루애(墮漏崖)’라는 글씨를 음각하였다. 지금 쓰인 글씨의 우측으로는 예전에 쓰인 글씨가 남아있다. 그리고 암벽에는 말과 꿩을 돋을새김 한 것처럼 조성하였다.

 

스스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모시던 윗사람을 따라 목숨을 끊은 백씨. 아마도 이 시대의 귀감이 되라는 뜻으로 세운 타루비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여서, 본분을 지키고자 했던 그 뜻을 논할 필요는 없다. 오늘 암벽에 새겨진 말과 꿩, 그리고 타루애라는 글씨와 타루비 안에는, 장수현의 통인 백씨의 충정이 그대로 배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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