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오랫동안 춤을 추어오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이 갖고 있는 철학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시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춤으로 표현하는데 있어, 세상살이를 하는데도 기본이 되었다. 항상 춤 속에서 생활을 하다가보면, 세상 모든 것이 춤과 연결이 되어 진단다. 춤꾼 김진옥은 그렇게 50년 이상을 춤 속에서 살아왔다.

 

4월 2일 용인시 기흥 민속촌 인근에 있는 경기도 국악당의 제1강습실. 장구를 둘러멘 사람들이 열심히 장단을 치면서 춤을 배우고 있다.

 

“손을 이렇게 끌고 오다가 아름답게 넘겨야지. 그래야 태가 아름답게 되지. 그냥 위로 올리면 그건 춤이 아냐”

 

 

어린 나이부터 춤을 시작해

 

춤을 추는 춤꾼들은 거의가 어릴 적부터 춤에 입문을 한다. 춤을 배우게 되는 계기 역시 흡사하다. 어머니들이 춤을 좋아해, 어머니들의 손에 이끌려 춤을 가르치는 학원에 발을 내딛게 되는 것이다. 12명의 강습생들에게 ‘정민류 교방장고촘’을 가르치고 있는 김진옥(여, 64세) 역시 어린 나이에 종로 5가에 있는 정민무용학원을 찾아간 것이, 벌써 50년이 넘는 세월을 춤과 함께 살아오게 된 계기이다.

 

“참 그동안 정말 열심히 춤을 추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저는 제 나름대로의 길을 걸었다고 자부를 해요. 앞으로도 저는 제 춤 길을 갈 것이고, 몸이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는 제자들을 가르쳐야죠.”

 

 

 

그래서인가 강습생들에게도 길을 유난히 강조를 한다. 아마도 그런 자신이 평생을 쌓아올린 춤에 대한 열정이 그 말 한 마디로 함축되는 듯하다.

 

“아무리 바빠도 춤은 춤길이 있다. 그 춤길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춤이 아니다”

 

춤이 곧 인생일 수밖에 없어

 

다음 카페 ‘정민류교방춤보존회’에 소개된 김진옥 선생의 이력은 끝이 없다. 그만큼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월요일과 금요일은 경기도 국악당에서 강습생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대학 강의 등 하루 종일 빡빡하게 일정이 잡혀있다. 그런데도 그 많은 일정을 소화를 해내는 것을 보면, 춤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가 있다.

 

 

 

명지대학교 사회교육원 무용과 객원교수, 국립한경대학교 사회교육원 전임강사, 정민류 교방춤 보존회 회장,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경기도지회 이사,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용인시지부 고문, 사단법인 대한어머니회 서울시연합회 안무장, 경기 토속민요 연구회 이사, 한.얼무용단 수원지부, 용인지부, 과천지부 예술총감독, 한맥예술단 예술감독, 서초 체육쎈타(YMCA) 한국무용 강사, 창무회 화랑 회원

 

카페에 소개된 이력의 앞부분이다. 그 밑으로는 한참을 내려가야 할 만큼 일 년에도 많은 공연무대에 섰다. 많게는 일 년에 10여 차례의 공연을 가질 만큼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이다. 그렇게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을 무대 위에 올랐다.

 

“원래 정민선생님은 김해랑 선생님의 제자예요. 김해랑 선생님은 1953년도에 서울에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를 설립하시어 초대 이사장직과 마산 경남무용협회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셨고, 우리나라 전통무용을 신무용으로 발전시키신 분입니다. 정민 선생님과 최현 선생님의 최초의 스승이기도 하시고요. 안타깝게 55세의 나이로 타계를 하셨죠.”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

 

그런 김해랑 선생에게 사사를 한 고 정민 선생은 대구에 머물 때 밤마다 권번의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춤을 배웠다. 당시 기생들은 교방이 폐청되고 난 후,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으로 권번이라는 기생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대구에서 교방춤을 배운 정민선생은, 북가락과 장고춤 등 나름 교방춤으로의 독보적인 존재로 평가되고 있다.

 

“정민 선생님은 1928년 11월 4일 일본에서 태어나 2006년 1월 5일 79세 일기로 타계하셨어요. 5살 때부터 춤을 추기 시작한 선생은 광복이전부터 연극과 노래를 하면서 예능계에 데뷔하며 일본예술단에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45년 제1회 영남예술제(현 개천예술제)에서 승무로 금상을 수상하였으며, 1955년부터 각 대학과 고등학교의 강사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연구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을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연을 열어 우리 춤의 보급에 앞장을 섰던 분이시죠“

 

 

그런 정민 선생에게 교방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다시 춤에 대한 열정이 생겼다고 한다. 이미 한영숙류 춤을 추는 사람들의 모임인 벽사춤 아카데미의 이사이기도 했던 김진옥 선생은, 벽사춤과 함께 정민류 교방춤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민선생님의 교방춤은 정말 우리 민속춤의 아름다움을 모두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선생님은 대구에서부터 나중에 일본에 가신 후에도, 교방의 기생들에게 춤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수십 가지가 넘는 교방춤을 그렇게 전수를 해주셨죠.”

 

정민류교방춤의 제1호 이수자이기도 한 김진옥 선생은 교방춤을 보급하고 알리는데 온 정성을 다하고 있다. 현재 정민류교방춤보존회는 서울본부를 비롯해, 부산광역시지부, 경기도지부, 인천남동지부, 경남지부, 전북지부, 김해지부 등이 있다.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는 보존회 회원들은 일본 오사카본부를 비롯해 동경지부와 교토지부가 있으며, 미국 LA에도 본부가 있다.

 

“지난 해 추석 때는 미국에서도 공연을 가졌었습니다. LA에서 공연은 정말 감명 깊었죠. 1,300석을 꽉 메운 관중들이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올해는 차근차근 준비를 해서 보존회의 이름으로 정민선생님을 기리는 공연을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리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작 하나하나가 그대로 춤이 되어 버린다. 아마도 그래서 춤꾼들은 사는 일상이 춤이라고 하는가보다. 평생을 춤으로 살아온 김진옥 선생. 교방춤의 멋을 후대들에게 온전히 전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위키백과사전)

위의 장고춤에 대한 설명은 인터넷에서 ‘장고춤’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장고춤을 ‘풍물에서 파생한 춤’, 혹은 ‘신무용’ 등으로 정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장고춤의 역사는 이미 고려시대부터 무용화한 장고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교미술과 고분 벽화 등에서 나타나는 장고춤에 대한 모습으로 장고춤에 대한 변화를 추론해 본다.

전북 완주군 송광사 대웅전 벽에 그려진 비천장고무. 조선조에 그려진 것이다.

불교미술에 나타난 장고춤의 변화

불교미술에서 장고를 이용한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지가 않다. 석탑이나 부도탑 등의 비천인이 연주를 하는 모습에서,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을 쉽게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비천인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구례 화엄사의 사사자 삼층석탑이다. 연기조사가 신라 진흥왕 5년인 544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 화엄사.

그 화엄사 각황전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국보 제35호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비천인상 중에, 장고를 치는 비천인상이 있다. 아마 이 때는 장고가 춤이 아닌 단순한 악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뒤에 나타난 보물 제85호인 강릉 굴산사지 승탑에도, 연화대 위에 앉아 장고를 치는 비천인의 모습이 보인다.


국보인 구례 화엄사에 소재한 사사자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장고비천인

이 굴산사지 승탑은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시대에 조성한 것이다. 중간받침돌에는 8개의 기둥을 세워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비천인이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새기고 있다. 조각되어 있는 상은 8구 모두 서로 다른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악기는 장고를 비롯해 훈, 동발, 비파, 소, 생황, 공후, 적 등 당시에 사용하던 악기의 모습들이 묘사되어 있다.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에 소재한 보물 제294호 승안사지 삼층석탑에도 장고를 치고 있는 비천인상이 있다. 이 승안사지 삼층석탑 역시 고려시대에 조성한 탑이다. 위층 기단에 새겨진 이 비천인상을 보면 앞서 열거한 비천인상과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열거한 장고를 치는 비천인이 앉은 형태였는데 비해, 승안사지 삼층석탑의 장고를 치는 비천인은 무릎을 꿇고 있다. 이때는 단순히 연주가 아닌, 일종의 변형된형태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굴산사지 승탑의 장고비천상과 승안사지 석탑의 장고비천인상


고려 고분 벽화에서 장고춤의 형태가 보여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에 있는 사적 제239호 둔마리 고분은 고려시대의 고분이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에는, 동서로 석실 두 개가 구분되어 있다. 이 고분 안에 동실의 벽면에는 천녀들이 구름위에서 연주하며 춤을 추는 ‘주악무도천녀도’가 그려져 있다. 당시의 현실적인 종교적 표현을 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천녀도 중에는 장고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이 둔마리 고분의 주악인물상의 악기 등은 고려시대에 사용하던 악기들이며, 주악도상은 고대주악비천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후대에 후불 및 무속화의 인물표현 등과 악기의 소재 등이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벽 남단에 그려진 주악무도천녀도의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장고춤을 추고 있다.

이 장고춤을 추는 인물을 설명하고 있는 형태를 보면, 지금의 장고춤을 추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인물은 빗어 올린 얹은머리에 둥근 테 모양의 관을 쓰고, 그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상의는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록하게 묶었다. 바지는 전반적으로는 헐렁하지만 발목도 묶었다.」


둔마리 고분의 벽화에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주악도가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인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종성된 고분이다.

아마도 격한 장고춤을 추기에 편하도
록 하였을 것이다. 「허리에는 띠가 감겨있는데 그 한쪽 끝이 왼쪽 다리위로 드리워져 있다. 상반신은 가느다란 끈으로 장고를 목에 감아 앞으로 늘어뜨리고, 왼팔은 높이 올리고 오른팔은 장고를 치면서 구름 위에서 춤을 추는 형태를 하고 있다. 신발은 형태가 확실하지는 않으나 끝이 뾰죽하다」

벽화에 나타난 장고춤

이렇게 석탑이나 부도탑, 혹은 고분의 벽화 등에서 보이는 장고춤을 추는 비천인상을 보면, 이미 장고춤은 고려시대에 완전한 춤의 형태로 전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장고춤을 실질적으로 묘사한 사찰의 벽화가 전라북도 완주군 송광사에 그려져 있다.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인 867년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송광사의 대웅전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인 1636년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인 1857년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 상단 벽에 보면 비천인상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비천인상에는 무당춤을 비롯해, 장고춤, 북춤, 승무, 바라춤 등의 그림이 보인다. 이 모든 춤들은 당시에 추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즉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들은 단순히 상상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속화된 풍물을 그린다는 점으로 볼 때, 고려 고분벽화에서 나타난 장고춤은 조선조에 들어서 상당히 격화되고 빠른 동작을 필요로 하는 경쾌한 춤으로 변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벽화에 나타나는 그림을 보면 작은 소장고를 이용해 춤을 추면서 군관모자와 같은 관을 썼다. 화려한 장식에 힘이 있는 모습의 장고춤을 역동적으로 추고 있다.

이런 불교미술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장고비천인상에서 볼 때 장고춤은 농악놀이에서 파생한 춤이 아닌, 정형화된 장고를 이용해 추는 독자적으로 발생한 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신무용이 아닌 고려 때부터 전해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통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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