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촬영한 자료에서 만난 동북공심돈 내부

 

수원화성 창룡문과 연무대인 동장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원형의 구조물이 있다. 지금은 안전문제로 출입할 수 없는 동북공심돈은 수원 화성의 또 하나의 작은 고성(古城)이다. 화성만이 갖고 있는 공심돈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층마다 개인 화기인 불랑기를 지참한 병사들이 공심돈 안에서 쏘아대는 화포만으로도 근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만큼 견고한 구조물이 바로 공심돈이다.

 

세계문화유산이자 국가사적 제3호인 수원화성에는 모두 3개소의 공심돈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서북공심돈과 팔달문과 남수문 사이에 유실된 남공심돈, 현재 남아있는 또 하나의 공심돈인 동북공심돈이다. 둥근 원형으로 조성한 동북공심돈은 성곽 안으로 들어와 성벽의 여장과 사이를 두고 조성하였다.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 동북공심돈은 통로가 나선형으로 위로 오르게 되어있어 소라각이라고도 부른다.

 

 

세계문화유산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하게 조성된 동북공심돈은 기단석은 돌로 놓고 그 위에 벽돌을 이용해 축조하였다. 몇 년 전 개방을 했을 때 들어갔던 동북공심돈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으로 잠겨 있는 곳이 있다. 아마도 무기고나 병사들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으로 보인다.

 

화성의 전각에는 추위에도 병사들이 편안하게 묵을 수 있는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측으로는 공심돈 위로 오르는 나선형의 통로가 있다. 나선형의 통로 끝에는 계단으로 조성해 공심돈 위에 마련한 전각으로 오른다. 맨 위에는 역시 전각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올라 주변을 살피고는 했다.

 

 

옛 자료 정리하다가 만난 동북공심돈의 모습

 

20, 일기예보에서는 수원에도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것이라고 한다. 더 뜨거워지기 전에 몇 곳을 돌아보리라 마음먹고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창룡문을 지나 만날 수 있는 동북공심돈 앞으로 날이 뜨거워지기 시작하는데도 몇 사람의 관광객이 지나치고 있다. 사진 몇 장을 촬영하고 장안문과 화성박물관을 돌아본 후 돌아와, 2004824, 수원화성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촬영한 수원화성 자료를 검색해본다.

 

15년이 지났다. 15년 전에 수원화성을 돌아보면서 촬영한 자료에는 서장대가 화재로 인해 소실되기 전의 자료가 들어있어 나름대로 소중한 자료로 따로 보관하고 있다. 그 자료CD 안에 동북공심돈과 봉돈의 내부 등을 꼼꼼히 촬영해 놓은 자료가 들어있다. 15년 만에 다시 찾아보는 동북공심돈의 내부, 당시 무더운 복중에 땀 흘리며 돌아본 수원화성 동북공심돈의 내부모습이다.

 

동북공심돈은 정조 20년인 1796719일에 완공되었다. 화성은 그 짜임새나 둘레에 비해 빠른 공정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특이하다. 아마도 많은 기물을 사용하여 축성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금은 들어갈 수 없는 서북공심돈과 마찬가지로 동북공심돈도 일반인들의 출입을 재한하고 있다. 나선형의 통로를 따라 위로 오를 수 있었던 동북공심돈. 개방을 했을 당시 그 위에 올라 주변을 살펴보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자료보관의 중요성을 깨닫다

 

15년 전의 소중한 수원화성의 자료가 담긴 CD를 보관하고 있는 것은, 30여 년 전부터 전국의 문화재를 답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료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보관하고 있는 자료 CD3,000장을 넘어서면서 더 이상 CD에 담을 수 없어 몇 년 전부터는 외장하드에 담아놓고 있다.

 

그렇게 자료를 보관하는 버릇을 들여놓은 것이 결국 지금은 소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물론 처음에 자료를 남겨놓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더 나이를 먹어 여행을 할 수 없을 때가 되면 조용히 앉아 책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하나가 수많은 자료를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보면 언제니 든든하다. “책을 써도 100권은 쓰겠네요.” 집을 찾아와 자료를 본 지인이 하는 말이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새삼 자료의 중요성을 알게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문화재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원형에 충실하게 복원을 한다고 하지만 복원이란 자체가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뿐 원형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른 시간에 돌아본 동북공심돈. 지금은 안을 들어갈 수 없지만 옛 자료로 만나본 동북공심돈의 내부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과거에 기록해 놓은 지료는 시간이 갈수록 더 소중해지기 때문이다,

 

 

2002219일부터 1년이 넘는 시간을 경기, 인천 지역을 돌아다녔다. 지난 자료를 정리하다가 만난 경기 옛소리 기행자료라는 파일을 찾아낸 것이다. 이 파일에는 1년이 넘는 시간을 매주 경기, 인천 지역에 거주하는 소리꾼들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이 생활을 하고 소리에 젖은 사연을 소개를 한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경기일보에서 매주 1회씩 문화면 한 면을 통째로 내주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는 동안 55회에 걸쳐 소개를 한 자료가 고스란히 보관이 되어있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이렇게 정리를 했지?’ 싶을 정도로 정리를 한 것이다. 55회에 걸쳐 만난 소리꾼만 해도 근 100여 명에 이른다.

 

 

사진과 자료, 신문까지 스크랩

 

사실 이 자료 속에 소리꾼 중 많은 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2002년이면 벌써 10년이 지난 세월이고, 당시에 소리꾼들의 연세가 70세가 넘은 분들이 상당수가 계셨기 때문이다. 그 자료를 하나하나 들춰보면서 생각에 젖는다. 당시에는 참 피곤한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매주 지면을 채우기 위해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야 했다. 그 이전에 이미 방송에서 10여년 가까운 세월을 옛소리 소개를 했기 때문에, 소리꾼을 찾아 길을 나서는 데는 이미 이골이 나 있던 참이다. 하지만 정해놓은 기간 동안 빠트리지 않고 글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 자료를 하나하나 들추어본다. 지금 같으면 사진을 찍어 외장하드에 보관을 하고, CD에 정리를 하면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찍은 사진을 모두 현상을 해야 하고, 자료를 모두 받아 와 파일에 저장을 해 놓았다. 그리고 신문까지 빠트리지 않고 저장을 했으니, 자료치고는 완벽한 자료가 되었다.

 

 

좋은 자료의 보관은 큰 재산이 된다.

 

자료 맨 앞에 보니 당시 썼던 기획서가 보관되어 있다. 그것을 들춰보니 기획의도부터 예산까지 일일이 적은 것이 보인다. 그 기획의도에 보니

경기 인천 지역은 오래 전부터 많은 소리가 전승이 되고 있는 곳으로 지역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경기도는 과거 판소리의 한 유파인 중고제가 전승이 되던 지역이며, 현재까지 전해지는 속요(俗謠) 또한 중고제의 음률로 불러지고 있는 것이 상당히 있어 그 중요성을 알게 한다. 그런가 하면 조선조 말까지 이 지역에 전해지던 재인청은 각 기예인들이 모인 집단으로 대단위 숭신조합(崇神組合)이었으며, 그들의 소리가 이 지역에 전승이 되고 있는 속요에 많은 영향을 끼쳐서 이 지역의 소리를 윤택하게 만들었다(이하 하략)고 적고 있다.

 

기획의도 말미에는 한 지역에 전승이 되는 속요는 그 지역민의 심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으며, 특히 그 지역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속요는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좋은 자료가 된다. (중략) 속요가 지니고 있는 내면의 세계를 도출시켜 경기도민의 전통예술에 대한 우수성을 고취시키고, 자긍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고 적고 있다.

 

 

10년이 지난 세월이다. 하지만 지금 보아도 참 자료정리를 잘했다고 스스로 감탄을 한다. 55회에 걸친 사진과 관련 사진, 그리고 신문기사까지 있으니 완벽한 자료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료가 생명이다. 한 번 쓰고 버려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두고두고 사용해야 할 자료가 있는 밥이다. 이렇게 정리를 한 자료는 강산이 한 번 변한 세월, 지금은 더욱 가치가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된 셈이다.

 

자료정리의 중요성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자료가 생명이다라는 말은 그래서 명언이라고 생각이 든다. 오늘 이 소중한 자료 덕분에 경기도의 역사 한 페이지를 찾아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슴 뿌듯한 것은, 그 자료 속에 소리꾼들의 소리가 몇 개가 경기도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55회에 걸친 기사내용을 사진과 함께 틈틈이 게재하겠습니다)

 

아침에 전화를 한통 받았다.

 

기자님 저 ○○인데요.”

, 이 시간에 웬일이세요?”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참 선뜻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질문의 요지는 이렇다. 본인도 정부 모 부처의 블로그 기자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블로그에도 글을 올리고 해당 부서 게시판에도 글을 올리는가 보다. 그런데 갑자기 그 부처에서 기자들에게 휴대폰으로 촬영한 사진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제대로 취재를 하지 않은 기사는 올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요즈음 블로그들은 기본적으로 고가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다. 그것은 블로그라는 일인미디어들이 자신의 블로그를 방분하는 사람들에게,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사진 실력들도 프로급을 능가하는 블로그들이 상당수가 있다.

 

 

취재를 할 때는 꼼꼼히 현장에서

 

사실 취재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사전에 충분한 공부를 한 후 임해야 한다는 것도 번거롭지만, 취재를 마치고나서도 많은 자료를 찾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사란 활자로 남기 때문이다. 자칫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것이 기사를 쓰는 일이고보면, 많은 공부를 하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기사는 바람직하지 않다.

 

더구나 문화재나 역사적인 기록을 하는 기사를 쓴다면, 더욱 꼼꼼하게 모든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칫 엉뚱한 기사를 써서 남의 비웃음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로 나의 경우는 문화재 하나를 취재할 때, 문화재 한 점의 사진을 30장 이상을 찍는다. 행여 빠트릴 부분이 있을까봐, 부분 부분을 세밀하게 촬영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요즈음은 휴대폰의 성능이 뛰어나다. 휴대폰의 화소도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사실 카메라를 지참하지 못한 경우에는, 휴대폰이라는 이기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리고 SNS가 활성화되면서 그 자리에서 바로 사진을 촬영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글을 내보낼 때는 휴대폰보다 실용적인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식으로 기사를 쓸 때는 사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기사에 인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만일 그 기사를 인쇄물로 제작을 하려고 하면, 화질이 좋은 것 같은 사진도 뭉그러지거나 깨어지기 때문이다. 취재기자들이 그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좋은 사진 한 장을 찍겠다고 이리저리 뛰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취재를 할 때 마음가짐부터 달라야

 

기자는 취재에 임할 때 먼저 취재를 하겠다고 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카메라와 수첩, 그리고 필기도구는 기본이다. 언제 어디서 기삿거리를 만날 줄 모른다. 하기에 작은 소형카메라라도 몸에 지니는 것은 취재기자의 근본이다. 요즈음은 가격대가 착한 카메라도 성능이 뛰어나다.

 

기자가 취재를 하고, 그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하는 신분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불필요한 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얼굴을 알리려고 하지말자. 독자는 기사를 보고 싶은 것이지, 기자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사진이 나오는 기사,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는 기사를 보면서 좋은 기사라고 이야기할 독자는 아무도 없다.

 

독자들의 수준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기자들도 그 독자들의 수준을 웃돌아야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날로 변화하는 미디어 시대에 뒤처지는 불량신문과 미숙한 기자 밖에는 되지 않는다. 정성을 다해 써내려가는 기사 한 줄. 그것이 많은 독자에게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1495-1에 소재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167,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이다. 은행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과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수령이 8001,0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2m, 가슴높이의 둘레가 16.27m로 마을 인삼밭의 중앙에 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전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일부 가지는 부러질 염려가 있어서 받침대로 받쳐져 있다. 주변에 인삼밭이 있어 걱정스러운 것은, 농약을 심하게 뿌리는 인삼밭이 있어, 자칫 은행나무에 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팡이가 변해 이 나무가 되었다고?

 

가을이 되면 노란 단풍이 매우 아름다운 반계리 은행나무. 은행나무는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그동안 반계리 은행나무는 지나칠 때마다 찾아가던 곳이다. 늘 그 멋진 나무를 보고 오면,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이다.

 

522()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멀리서 보아도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작은 동산만큼이나 커 보인다. 아우들과 함께 찾아간 반계리 은행나무. 한 나무임에도 몇 그루가 모인 것처럼 중앙을 비워 놓고 가지가 솟아 있다. 중앙에 빈 공간은 장정 한 사람이 앉아보아도 남는 면적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땅 속에서 솟아 난 가지가 퍼져있다.

 

 

반계리 은행나무는 전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 살던 성주 이씨의 한 사람이 나무를 심고 관리하다가 마을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어떤 큰스님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물을 마시고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꽂고 갔는데 그 지팡이가 자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고목에 대한 전설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도 뜬금이 없다.

 

마을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이 은행나무 안에 흰 뱀이 살고 있어서,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는 신성한 나무로 여긴다. 전국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은행나무에는 왜 흰뱀이 살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이런 전설이 터무니없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만큼 주민들이 위하고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반게리 은행나무는 가을에 단풍이 한꺼번에 들면 그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정말 이 수령이 맞나요?

 

반계리 은행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반계리 주민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다. 은행나무 안에 들어가 팔을 벌리고 앉아있는 아우는 마치 은행나무에서 기를 받는 듯하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옛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난다.

 

자네는 늙지 않을 거야.”

무슨 말씀이세요. 스님?”

! 이 사람아 매일 그렇게 오래된 나무, 천년 세월을 뛰어 넘은 석불과 석탑. 그런 것들을 만나면서 그 기운을 받고 살았으니 늙지를 않지

 

어느 노스님의 말씀이다. 글쎄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저 우리 문화재가 좋아서 20년이 넘게 전국의 문화재를 찾아다녔다. 그렇게 찾아다닌 문화재를 담은 자료가 벽면 하나를 채우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농 삼아 이야기를 한다.

 

 

 

아마 저 CD 불 지르면 바로 죽어 버릴걸요

 

방안 가득 체우고 있는 문화재를 담은 자료를 보고 지인들이 하는 말이다. 웃고 말지만 정말 그럴 것이란 생각이다. 가끔 문화재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생각을 한다. 이런 은행나무가 알려준 세상사는 방법이다. 천년 세월이 지나도 변치 말라는. 아마도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나지 않았다고 하면 어찌 그 오랜 세월을 문화재를 만나러 전국을 돌아다녔을까?

 

나무 한 그루에서 배운 세상살이가, 지금의 나를 지탱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가 늘 고맙기만 하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정말 고맙소. 그 자리를 지켜주어서. 인간이란 것들은 아침저녁으로 잘도 변하는데, 그렇게 천년 세월을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그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소.”

‘저고리시스터’에서 ‘소녀시대’까지

오는 5월 4일(금)부터 6월 17(일)까지 부평아트센터(관장 조경환) 갤러리 꽃누리에서 「한국대중음악 걸그룹사(史) : 저고리시스터에서 소녀시대까지 _ 소원을 말해봐 Tell Me Your Wish」라는, 걸그룹을 주제로 한 기획전시가 열린다.

 

이 기획전은 2012년 아트센터 두 번째 기획물로 한류의 물꼬를 트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이끌며 괄목한 만한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는 한국걸 그룹에 대한 이야기를, 각종 자료들의 전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한국대중음악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걸 그룹의 역사를 총 망라해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한국 걸 그룹사 70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저고리씨스터>의 일본 공연 전단지와 공연사진부터, 아시아 최초로 미국에 진출한 <김시스터즈>의 미국, 한국, 대만 동시 발매음반과 활동사진 등 최초 공개라 할 수 있는 진귀한 자료들로 채워진다.

 

또한 미국 라스베가스의 유명호텔 스타더스트의 룸키 모델로 김시스터즈가 장식된 1969년 제작 실물룸 키’, 펄시스터즈의 일본 발매 음반, 듀엣 이시스터즈로 활동했던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 故이금희가 직접 작용했던 화려한 무대의상 등도 선보인다.

 

 

위는 저고리씨터 광고 1940년 모던 조선잡지(좌)와 국보자매, 아래는 바니걸스(좌)와 펄씨스터즈 

 

또한 미국 진출 2호 걸 그룹 김치캣의 한국 최초 12인지 LP오리지널 음반, 70년대에 미주로 진출했던 5인조 걸 그룹 해피돌즈의 캐나다 제작 음반등 다양한 자료들이 국내 최초의 소개라는 이름을 달고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여기에 리드보컬 나미의 진귀한 어린이시절 극장 쇼 포스터, 핑클의 해외제작 우표까지 관람할 수 있어 관람의 재미와 함께 모든 세대들에게추억과 발견이라는 놓치기 힘든 흥미를 끈다.

 

 

위는 김씨스터즈 아래는 핑클

 

총 600여점에 달하는 풍부한 자료들은 대중문화평론가 최규성씨가 40년간 수집해 온 2,000여점의 국내 걸 그룹 관련 소장품들 중에서 선별한 것들이다. 특히 그는 이번 전시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고자 아트센터와 함께 전시의 내용을 고민하고 직접 한국 걸 그룹사를 글로 정리해 관람객들이 한국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일면을 꼼꼼하게 살펴 볼 수 있도록 준비했다.

 

여기에 같은 주제 혹은 소재로 현재 활발한 활동 중인 현대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더해져 이번 기획전시의 무게를 더한다. 조각과 평면작품 10여점 중에 작가 최부윤은 아름다움의 표상을 걸 그룹을 차용한 조각 작품 속에 담아 현대 사회 속에서 소비의 대상이 되어 가고 있는 여성성을 불편하지 않게 풍자하고 있으며, 작가 신진식은 걸 그룹의 모습을 단순하지만 표현주의적인 묘사를 통해 대중들의 일상적 삶과 함께하지만 심리적 거리감을 지닌 신화화 된 아이돌 현상을 읽어 내려 한다.

 

소녀시대(사진제공 / 부평아트센터)

 

이번 전시를 기획한 김용진과장(아트센터 전시기획담당)은 "대중문화의 한 장면 한 장면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문화적 감수성과 심리적 상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이번 전시는 한국 대중문화의 형성기부터 현재까지를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는 한국 걸 그룹의 역사를 통해 시대마다 대중이 욕망하는 것들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내밀한 보고서와 같다"고 전했다.

 

우리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역사와도 같은 진귀한 자료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독특한 관점의 현대미술작품이 함께 하는 이번 전시는 관람객에게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시간이 되어 줄 것이다. 자세한 문의는부평아트센터 홈페이지(http://www.bpart.kr)와 대표전화 032-500-2000을 통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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