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읍에서 점동면으로 나가는 도로변에 문화재 안내판이 한 기 서 있다. <처리선돌>이라고 쓴 안내판에는, 안내판에서 30m 근처에 선돌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이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콘크리트 회사의 축대 밑에 서 있어, 선돌이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길을 숱하게 지나다니면서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30m 이내에 선돌 비슷한 것도 발견을 할 수가 없었다. 안내판이 서 있는 곳은 공장의 축대 밑이고, 그곳에 길이 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설마 안내판에 적힌 선돌이 그 공장 안에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는 문화재

몇 번 주위를 돌아보다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공장 안은 콘크리트 공장답게 주변에 제품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그 안쪽에 돌로 축대를 쌓은 곳이 있다. 그리고 소나무와 함께 서 있는 선돌이 보인다. 이렇게 선돌이 있으면 안내판에 공장안이라고 표기를 하든지, 아니면 축대에서 외부인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길이라도 내어 주는 것이 좋았을 것을. 그저 아무런 설명도 없이 30m 표시만 있으면 어떻게 찾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주군 점동면 처리 88 - 6에 소재하는 이 선돌은 경기도 기념물 제13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이 선돌은 높이가 2.1m에 넓이는 1.35m 이다. 돌의 두께는 30cm 정도로 직사각형 형태로 조성이 되었다. 돌은 위 부분을 가공한 흔적이 보인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라져간 문화재

‘입석(立石)’이라고 하는 이 선돌은 우리나라 전역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 선돌은 고인돌과는 달리 근대화가 되는 과정이나, 도시화가 되는 과정에서 많이 사라지고 말았다. 선돌이 왜 세워지는가에 대해서는 학설이 구구하다. 그러나 이 선돌은 마을의 신앙대상물이거나, 경계표시, 권위의 상징 등으로 세워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처리선돌이 서 있는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그 앞에 청미천이 흐른다. 이곳이 전형적인 농촌마을인 것으로 보아, 이 선돌은 아마 마을의 숭배 대상이었을 것이다. 처리 선돌 앞에는 길게 누운 돌이 또 하나 있다. 처음에 같이 세운 것이 아니고, 후에 갖다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보아서 선돌의 앞에 누운 돌은 제단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처리의 선돌은 풍년을 구가하는 거석숭배 사상에서 기인한 마을의 신앙물로 추정된다.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

작은 문화재 하나라도 그 가치를 따질 수가 없다. 이 문화재들이 온전히 보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 공장 안에 들어가 있다고 해서 문화재의 관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길가나, 논밭 아무 곳이나 서 있는 것보다 관리 면에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다만 이 선돌을 일반인들이 쉽게 지나면서 볼 수 있도록, 안내판에서 바로 들어가는 길 하나쯤은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거대한 콘크리트 공장 안에 갇힌 선돌의 바람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선돌은 고인돌과 더불어 대표적인 ‘거석문화(巨石文化)’에 속한다. 선돌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상당수가 있는데 비해, 많이 분포되어 있지는 않다. 선돌의 분포지역은 함경도부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이다. 선돌은 돌을 세웠다는 뜻으로, ‘삿갓바위’나 ‘입암(立岩)’이라고도 부른다.

이 선돌은 지역마다 부르는 명칭이 다르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구지바위, 수구맥이, 수살맥이, 수살장군, 석장승, 할머니·할아버지 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선돌의 형태는 위가 뾰족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대개는 선돌에 구멍을 파거나 줄무늬를 그려 넣기도 한다.


기자속이나 자손창성과 연결이 되

선돌은 그 형태에 따라 암돌과 숫돌로 구분이 된다. 끝이 뾰족한 것은 숫돌이고, 뭉툭한 것은 암돌이다. 이는 이 선돌이 기자속과 연관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선돌에 일곱 개의 구멍을 뚫은 것은 칠성의 믿음과 연관이 되는 것으로, 이는 자손창성을 기대하는 것이다. 또한 많은 성혈인 구멍이 뚫린 것은 모두 기자속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선돌은 아들을 바라는 기자믿음으로 보여진다. 선돌은 마을의 어귀나 구릉지대, 논이나 밭 등에 서 있다. 그러한 선돌은 선사시대 신앙물로 이어지면서, 신성한 지역을 알리거나 기자속까지 연결이 된다.


전주에서 남원 방향으로 가다가 보면, 남원 못 미쳐 장수, 금산 방향으로 가는 길이 좌측으로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만 가면 지사면 영천마을에 도착한다. 이 마을 길가에는 커다란 선돌 한 기가 서 있다.

빨래판으로 사용했던 선돌

이 선돌은 연대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돌에 새겨진 성혈로 보아 아마도 선사시대의 입석으로 보인다. 이 선돌은 마을 사람들이 냇가에 갖다놓고 빨래판으로도 사용을 하였고, 개울을 건널 때 다리로도 사용을 한 돌이라고 한다. 2009년 까지는 버스정류장 부근에 서 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이 선돌은 특이한 면이 있어 TV에 방영이 되기도 했다. 길게 일렬로 조성을 한 성혈 12개가 나란히 돌의 한 쪽 면에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12지를 뜻하는 것으로도 본다. 이렇게 12개의 성혈이 나란히 조형이 되어있는 형태는, 우리나라 전체의 선돌이나 고인돌에 새겨진 성혈 중 매우 희귀한 경우이다.

성혈의 크기는 직경이 8~10cm 정도에, 깊이가 2~5cm 정도나 된다. 돌의 한편에 나란히 새겨진 이 성혈의 의미를 두고 많은 해석을 하는 것도, 이러한 경우가 거의 발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빨래판 선돌’이라고 부르는 이 선돌은 아마도 신성한 지역을 알리는 표식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돌은 삼한시대 소도나 솟대 등으로 변했다고 하는 학설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사면의 빨래판 선돌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가 아니었을까? 누군가에 의해 간절한 염원을 담고 조형을 한 것으로 보이는 12개의 성혈. 많은 선돌들이 뒤늦은 연구로 인해 훼손이 되었지만, 이런 희귀한 선돌은 그 가치가 매우 높아 좀 더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주와 네 째주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달아서 쉬는 날이다. 요즘말로 ‘놀토’가 된다. 이렇게 두 번째 주와 네 번 째주는 세상없어도 가방을 둘러메고 답사를 떠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아니면 바람이 불어도 길을 나선다. 내일(12월 11일)은 바람도 불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고 일기예보에서는 이야기를 하지만, 이렇게 이틀 동안 답사를 하지 않으면 철지난 자료를 이용해 글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2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참을 만하다. 폭설이 내려 무릎까지 눈이 쌓인 산길을 걸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남들이 돈을 줄 테니 이런 날 답사를 하라고 하면, 죽어도 안한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는 남원과 함양, 산청을 돌아보리라고 미리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서둘러 길을 나섰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답사

오후 5시 30분이 근무를 마치는 시간이지만, 30분을 먼저 서둘러 길을 나섰다. 요즈음은 금요일이 되면 유난히 길이 많이 막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 남원에서 묵고, 아침 일찍 답사를 시작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여름 같으면 충분한 시간이 되지만 요즈음은 5시만 되면 벌써 어둑해져, 아침 일찍 나서야 하나라도 더 돌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미리 예매를 하지 않는 것은 전주에서 남원은 40분이면 내려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장소를 이동할 때는 가급적이면 기차를 타는 것도, 막히지가 않기 때문이다. 오후 5시 54분 차를 겨우 집어 탈 수가 있었다. 이 차는 익산에서 여수로 가는 무궁화 열차다. 아마 출퇴근시간에 맞추어 운행을 하는 열차인 듯하다. 빈자리가 없어 입석으로 표를 끊었다.

요즈음은 열차에 카페 칸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 차 한 잔을 마시면 남원까지 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카페 칸은 기차의 한편에 좁게 자릴 잡고 있고, 의자는 고작 5개가 전부였다. 이런 낭패가 있나. 그곳에도 사람들이 많아 서 있을 자리도 만만치가 않다.


화장실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분, 도대체 왜?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옆을 보니 넉넉하게 자리가 비어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게 웬 떡이냐 싶어 그곳으로 갔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복에. 그 앞이 바로 열차의 화장실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하지 않을 수밖에. 그러나 40분만 서 가면 되고, 급할 때는 바로 해결을 할 수가 있으니 이곳이 명당이란 생각이다.

기차가 출발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데리고 한 분이 오신다. 아이가 칭얼대는 것을 보니, 소변이라도 급한 것인가 보다. 그런데 정작 화장실 앞에 선 분이 문을 열지 않는다. 아이는 발을 굴러댄다. 화장실이 비어있는데 무슨 일일까?


사용 중이면 불이들어오는 안내등. 문 앞에서서 문이 열릴 때를 기다리다가 아이가 옷을 적시고 말았다. 사진은 좋지 않은 휴대폰으로 촬영을 해 화질이 좋지 않다. 

“아이가 급한 모양인데 왜 안 들어가세요?”
“예,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요”
“거기 표시등이 꺼져 있잖아요.”
“문이 안 열려서 그래요”
“문을 열어야 열리죠.”
“예, 열어야 해요? 어떻게요?”

문을 열어 주었는데, 이미 때가 늦어버렸다. 괜한 애만 갖고 나무란다. 이 분 화장실 앞에 서면 문이 자동으로 열리는 줄 알았는가 보다. 아마 화장실 문을 자동문으로 착각을 하신 것이나 아닌지. 세상 참, 무궁화 열차 처음 타보셨나? 그래도 그렇지 화장실 문이 자동으로 열리기를 기다리다니. 괜한 어린아이만 옷을 버렸다. 자동문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의 모습일 수도 있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가끔은 이런 재미도 쏠쏠하다. 차에서 내려 혼자 넋 빠진 사람처럼 비실거리고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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