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90-2에 소재한 봉암사. 봉암사 경내 안쪽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삼층석탑은 보물 제169호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봉암사 경내에서도 또 안쪽, 선원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거의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지난 7월 6일에 봉암사를 찾았을 때 삼층석탑을 찾아보았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으로 명명이 되어 있는 이 탑은, 건물의 댓돌에 해당하는 기단부와 탑의 중심이 되는 몸돌인 탑신부, 그리고 꼭대기의 머리장식인 상륜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통일신라의 석탑은 기단이 2단이나, 현재 땅 위로 드러나 있는 이 탑의 기단은 1단이다.


머리장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봉암사 삼층석탑

봉암사 삼층석탑은 상륜부의 머리장식이 훼손이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완전히 남아있는 상륜부는 한국 석탑의 기준이 된다. 더욱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볼 때, 천 여 년이 지난 그 시대의 석탑을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귀중한 유례로 본다. 이 탑의 머리장식은 인도 탑에서 유래하였으며, 인도 탑의 머리장식의 소형화가 우리나라 탑의 머리에 그대로 적용이 되었다고 한다.

탑의 머리 부분인 상륜부에는 여러 형태의 구조물들이 차례로 놓이게 되는데, 우선 삼층석탑의 맨 위 덮개돌인 옥개석 위에 노반이 놓인다. 그리고 복발과 연꽃모양의 앙화가 놓이게 되며, 그 위에 보륜과 보개, 수연을 차례로 올리게 된다. 수연의 위에는 용차, 보주, 찰주가 놓이는데, 봉암사 삼층석탑은 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단의 기단을 둔 봉암사 석탑

일반적으로 석탑의 경우 기단이 2단으로 되어 있으나, 봉암사 삼층석탑은 1단만 보인다. 일층 기단의 주변으로는 넓게 석재로 둘러놓았는데, 이것을 아랫기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듯하다. 기단의 형태에 비해 그 면적이 넓게 조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기단에는 중앙에 탱주를 새기고, 양 끝에는 우주를 새겼다. 갑석은 두 장의 돌로 맞물려 조성을 했으며, 갑석 위에 몸돌의 고임인 옥신고임을 돌출시켜 새겼다.

몸돌은 양 우주를 새겨 넣었으며 지붕돌인 옥개석인 추녀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가 당당하다. 하지만 기품이 있어 보이는 것이 화려하지는 않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의 단아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비례가 돋보이는 석탑

지붕돌인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이층과 삼층으로 올라가면서 몸돌이 적당한 비례로 줄어들었다. 어디 한 곳도 모자람이 없는 봉암사 삼층석탑. 9세기 통일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기단 구조가 특이하고 탑신의 각 층 비례와 균형이 적절하여 아름답다.

이 봉암사 삼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중궁궐 깊은 곳에 자리한 품위 있는 여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형태가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가 보다. 아마도 아무 때나 접할 수 없는 탑이기에, 더 오래도록 그 앞을 서성이는 것인지. 아니면 단아한 여인의 자태를 닮은 그 모습에 빠져서인지도 모르겠다.




뒤편에 암반으로 덮인 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봉암사 삼층석탑. 아마도 이런 깊은 산중에서 많은 선방의 스님들에 방해라도 할까봐, 그 오랜 시간을 숨죽이며 서 있었을 것이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모습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자태를 떠올린다. 세월이라는 흐름 속에서도 영원히 변치 않는 아름다운 자태를 간직한.

우리나라의 불교문화재 중 아름다운 전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난 주저 없이 봉암사 극락전을 말한다.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어느 전각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극락전은 봉암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기도 하다.

봉암사 극락전이 처음으로 지어진 것은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이다. 지증국사가 봉암사를 창건하면서 지어진 건물로, 지어지고 난 후 80년이 지나 봉암사의 많은 전각들이 화재로 모두 소실이 되고 극락전만이 남았다고 한다. 그 뒤 고려 태조 18년인 935년에 정진대사가 봉암사를 재중창 하였으나, 임진란을 거치면서 일주문과 극락전만 남기고 모두 전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경순왕이 피난 시 원당으로 사용한 극락전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 시에,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옥개석을 보수 한 듯, 망와에는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있다. 봉암사 극락전은 얼핏 보면 중층으로 지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단층 몸채에 차양 칸을 둘러 마치 중층 같은 외관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6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봉암사를, 하안거에 든 스님들에게 공양을 대접하기 위해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엄격하기로 소문이 난 봉암사는 공양대접을 하는 사람들도, 3시간 이내에 사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도 그 시간이면 경내에 있는 문화재를 답사하기에는 조금은 버거울 듯해, 걸음을 바삐 해야만 했다.



탑처럼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봉암사 극락전. 현재 보물 제1574호로 지정이 되어있는 극락전은 기단부의 상, 하 갑석을 면석으로 처리를 하고, 기단의 바닥은 장방형 판석으로 깔았다. 원형의 주추는 잘 다듬은 원형의 화강석을 사용하였으며, 외진주 12본과 내진주 4본으로 중층 목탑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삼면에 문을 낸 극락전, 궁전의 천정과 같은 아름다움

중앙에 마련한 전의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배면의 벽에 기대어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전면의 문은 세 짝문을 내었으며, 좌우측에는 폭이 넓은 세살문을 중앙에 넣고 졸대를 세운 판벽으로 처리하였다. 뒤편으로는 모두 판벽으로 처리를 해, 단칸의 불전이지만 일반 불전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양 측면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내출목의 상단에는 장혀를 올리고 상벽을 구성한 후, 외진으로 17개의 우물을 돌려 궁전천정을 연상케 한다. 천정의 중앙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며, 불단은 간략하게 조성을 하고 그 위에 불상을 모셨다.

지붕의 꼭대기에는 석탑과 같이 돌로 만든 장식을 올려놓았다. 많은 전각을 보아왔지만 봉암사 극락전과 같은 아름다움은 그리 흔치가 않다. 봉암사를 들어갈 수 있었던 것만도 행운이란 생각인데, 거기다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극락전까지 볼 수 있다니. 아마도 오랜 세월동안 전국을 다니며 문화재를 답사한 것에 대한 보답은 아니었을까?


극락전을 뒤로하고 삼층석탑으로 향하면서도,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그 아름다움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서이다. 언제 또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를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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