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교란 고려시대를 비롯하여 조선조까지 계승된 지방 교육기관으로,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립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교궁(校宮)'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렀으며, 고려시대에는 향학이라고 했다. 향교는 전학후묘의 구성으로 앞에는 교육을 하는 명륜당과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뒤편으로는 공자를 비롯한 명현들을 모시는 대성전인 문묘가 있다.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인 ‘정산향교 (定山鄕校)’가 소재한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독특한 향교 입구인 청아루

 

정산향교의 구성은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청아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공자와 우리나라 성현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정산향교는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졌다. 현재는 봄, 가을에 제향을 지내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정산향교의 특별한 구성은 입구에 있는 누각인 청아루이다. 목조건물로 된 향교 입구인 청아루는 아래로는 삼문을 내고, 그 위에 누각을 올린 형태이다. 이 청아루는 밖으로만 문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안쪽으로도 또 문이 있는 이중문으로 꾸며져 있다.

 

 

장맛비 속에 찾아간 정산향교

 

벌써 정산향교를 다녀온 지가 20여일이 지났다. 문화재 답사란 그 특성상 다녀왔다고 바로 글을 올릴 수가 없다. 한 번 답사를 나가면 꽤 많은 양의 문화재를 조사하고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역과 종류가 다른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소개한다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결국 한 번 답사를 다녀오면, 누구 말마따나 곶감 빼 먹듯 할 수밖에.

 

7월 14일 돌아본 충남 청양군. 정산향교는 답사의 끄트머리에 있었다. 장맛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들이붓는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였다. 그런 날 잠시 비가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정산향교 입구에 도착했다. 아무리 여름날이라고는 하지만, 비가 오는 날은 일찍 날이 저문다. 오후 5시 경이었지만, 벌써 어둑한 기운이 감돈다.

 

 

향교는 대개 그 담장 외곽에 붙어있거나, 가까운 곳에 관리를 하는 집들이 있다. 하지만 이곳은 주변을 돌아보아도 그럴만한 집이 보이지를 않는다. 이 빗속에서 사람들을 만나 묻는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포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이 빗길에 멀리 달려온 향교가 아닌가. 그냥 돌아갈 수가 없다. 할 수없이 담장 밖으로 돌아보는 수밖에.

 

수령 640년의 은행나무에게 묻다

 

전국에 있는 향교를 찾아가면 대개 고목이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이 은행나무들은 향교와 그 역사를 같이한다. 은행나무는 향교의 경내에 있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정산향교의 경우에는 주변 높은 곳에 은행나무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이 은행나무는 수령이 640년에 높이는 18m, 밑동의 둘레가 5.2m가 넘는 거목이다.

 

 

은행나무 쪽으로 올라가면 정산향교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은행나무와 정산향교의 관계는 무엇일까?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향교의 문을 열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할 수 없이 밖에서나마 향교를 살펴보는 수밖에. 담장 가까이 다가가려니 자라난 풀들이 엄청나다. 풀 더미를 헤치고 담장 가까이 가서 향교를 살펴본다.

 

정산향교는 딴 곳과는 달리 특이하게 조성을 하였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대성전의 경우 외담 안에 다시 내담을 쌓아 놓았다. 또 측면 담벼락에도 격자창을 내어 놓았다. 다행히 향교의 관리자가 대성전 위편 담장 밖의 풀을 깎아놓아 주변을 돌아보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장맛비 속에서 찾아간 청양 정산향교. 비록 안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지만, 밖으로 돌면서도 향교의 곳곳을 살펴보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향교 담장 밖을 한 바퀴 돈 다음에 차에 오르자, 다시 비가 퍼붓기 시작한다. 가을에 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이 들었을 때,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아오리라 마음을 먹는다.

요즈음은 답사를 나가면 해가 일찍 떨어져 부지런을 떨 수밖에 없다. 그래도 지금이야 많이 해가 길어졌지만, 한 달 전만해도 정말 답사를 다니려면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 곳을 돌아보고 난 뒤 다음 답사지를 가급적이면 가까이 잡는 것도 그런 이유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을 답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짙은 안개로 오전 시간을 허비해버렸다. 한 곳을 답사하고 난 시간이 벌써 5시가 넘고, 주변은 어두컴컴해진다. 서둘러서 다음 답사지인 감곡면 오향리를 찾아 길을 재촉한다.

 

음성군 감곡면 선돌을 찾아 나서다

 

오향리는 이천에서 제천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청미천을 건넌 후 사거리에서 우측으로 있는 마을이다. 감곡에서 생극을 거쳐 음성으로 가는 길목이다. 몇 곳을 돌면서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오늘 찾아야 할 선돌 위치를 모른다. 한 곳에 들어가니 중학교 뒤편 논에 서 있다고 한다. 감곡중학교 뒤편으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가다가 보니, 저편 논둑에 돌이 서있다. 찾아보아야 할 선돌이다.

 

거대한 선돌. 제작연대까지 밝혀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 선돌.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재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이 선돌은 지금까지 보아오던 선돌 중에서 큰 편에 속한다. 높이가 3m 정도에 너비가 194cm, 폭이 60cm이다. 이 선돌이 서 있는 곳을 '선돌바위들'이라고 부른단다.

 

선돌은 마을의 수호신인 신표와,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석 등의 역할을 한다. 이 선돌은 마을에서 섬기는 마을의 수호신은 아니다. 돌을 다듬은 흔적도 없다. 다만 돌을 절개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커다란 바위에서 떼어낸 것으로 보인다.

 

오향리 선돌이 중요한 민속자료로 평가를 받는 것은, 바로 선돌을 세운 날자가 기록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남쪽을 향한 선돌의 아랫부분 절개면에 「숭정 13년 경진 10월 22일 입석(崇禎 十三年 庚辰 十月 二十二日 立石)」이라고 얇게 음각하였다. 이 글의 내용으로 본다면 1640년에 이 선돌을 이곳에 세웠으니, 370년을 이곳에 서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선돌의 기능은 무엇일까? 앞에는 청미천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입석의 기능은 수해방지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것이라는 생각이다. 혹은 이곳이 도계지역이므로, 그러한 경계의 표시였을 가능성도 있다.

 

끝내 암돌은 못 찾고, 마음만 아파

 

날은 이미 저물었다. 이 선돌의 안내판을 보니 이 돌이 암수 한 쌍으로 되어있고, 암돌은 남성선돌에서 북쪽으로 35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선돌의 절개지가 남쪽이라면 그 반대쪽이 된다. 남성 선돌에서 바라보면 청미천 쪽 둑이 되는 셈이다. 거기다가 안성방향으로 200m 정도 떨어진 곳, 남쪽 언덕에 있다고 적혀 있다. 날이 컴컴해지고 있으니 서둘러 찾아보기로 했다. 좁은 농로를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져본다. 그러나 주변 어디에도 선돌 비슷한 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벌써 한 시간 이상을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끝내 여성선돌은 찾지를 못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 번 더 돌아보리라고 마음을 먹는다. 농로를 따라 이리저리 돌다가 보니 학생들이 한 떼 몰려온다. 반가운 마음이 든다. 적어도 학교에서 주변에 있는 문화재 정도는 한번이라도 알려주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학생들 이 근처에 선돌이 어디 있는지 알아?"

"선돌요. 모르는데요. 선돌이 무엇인데요?"

"저기 앞에 저 돌처럼 세워 좋은 돌인데. 저것보다 조금 작은 것"

“몰라요."

 

어이가 없다. 도대체 요즈음은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이해가 안된다. 학교에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돌, 그 정도쯤은 단 한번이라도 학생들에게 알려 줄만도 한데. 몇 번이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대답이다. 답답하다.

 

"이놈들 담배 피웠냐?"

"담배 피우지마라 뼈 삭는다."

 

차가오니 미처 끄지 못하고 버린 담배에서 연기가 나온다. 대답을 하는데도 담배 냄새가 난다. 교육이 점점 어디로 가는 것인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찾고자 하는 선돌은 보이지를 않고, 학생들은 선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차를 돌려 나오면서 갑자기 울화가 치민다. 오늘 우리의 교육현실이 참담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 것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그런 학교생활. 과연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선돌을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보다, 그런 것 하나 알려주지 않는 교육 현실이 더욱 마음이 아프다.

 

남들은 문화재 답사를 한다고 하면 대뜸 '좋겠다. 마음대로 여행도 하고'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문화재 답사라는 것이 재미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재 하나를 찾아보기 위해서 전국을 수 십차례나 돌았다. 그런데도 아직 내가 본 문화재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즐거움만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많은 아픔을 겪기도 한다. 문화재를 마구 훼손한다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이렇게 무관심한 세태를 만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늘 바람은 하나밖에 없다. 전 국민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재를 아끼고 바로 알았으면 하는 바람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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