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를 다니다가 만나는 많은 문화재 중, 그래도 마음이 더 가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고목이 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 등으로 지정이 된 나무들이다. 언젠가는 이렇게 전국에 산재한 많은 나무들만 보아, 책으로 엮어도 재미있을 듯하다.

 

우리나라에 산재한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된 나무들은, 대개 한 가지의 이야기쯤은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런 나무들을 만나면 그 나무들에게서 받는 기운이 있는 듯하다. 문화재 답사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도, 알고 보면 다니면서 만나게 되는 나무들 때문이기도 하다. 보령시의 문화재를 답사하면서 끝으로 만난 문화재가, 바로 귀학송이라는 소나무였다.

 

 

충남기념물 제59귀학송(歸鶴松)’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현리 70-2, 오서산 명대계곡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도로변에 서 있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한산이씨 동계공파에서 소유하고 있는 이 소나무는 귀학송, 또는 육소나무라고 부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15391609)의 이복동생인 이산광(15501624)이 낙향해 심었다고 전해진다.

 

귀학송의 수령은 460년을 넘었을 것으로 전해진다. 이색의 7세손인 동계공 이산광이 명대로 낙향하여 심었다는 소나무. 귀학송은 둘레 5.5m, 높이 25m 정도의 소나무이다. 한 뿌리에서 6개의 가지가 있어서 육소나무라고도 불렀으나, 현재는 아쉽게도 한 가지가 죽어서 5가지만 남아있다.

 

이산광은 광해군의 폭정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버리고 이곳으로 낙향했다. 이곳에 귀학정(歸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시와 글을 쓰며 후진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자신이 낙향하여 심어놓은 소나무 곁에 지은 귀학정에 학들이 날아들자, 정자 이름은 귀학정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귀학송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이기도 하다.

 

토정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와 이산광

 

이복형인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산해의 내력을 알면 이산광을 알 수가 있다. 아계 이산해는 중종 34년인 1539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기의 성리학자 목은 이색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내자시정을 지내고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이지번이다. 어머니는 의령남씨이며, 작가 겸 문장가 이산보는 그의 사촌 동생이었다.

 

토정비결을 지은 토정 이지함은 아버지 이지번의 동생이다. 토정 이지함이 이산해와 이산광의 삼촌이 된다.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5대조 이계전이 조선 세종, 문종, 단종조를 거쳐 조선 세조 때 정난공신이 되었고, 고조부 이우는 공조참판과 성균관대사성을 지냈다. 고조부 이우의 사촌 형제가 사육신의 한사람인 백옥헌 이개였다.

 

형제자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형제로는, 계모 충주지씨에게서 10년 터울의 이복동생 인 이산광이 있었다. 이산해는 어려서부터 작은아버지인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웠다. 글씨는 6세 때부터 썼는데 그 어린 나이에도 글씨에 능했다. 1545년 을사사화 때 친지들이 화를 입자, 충청남도 보령으로 이주했다

 

아마도 보령은 이산해와 이산광의 은거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귀학정을 짓고 후진들에게 글과 시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낸 이산광도, 이복형인 이산해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환란을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피해 이곳 명대계곡으로 낙향하였기에, 그의 여생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느 곳이 오기(誤記)일까?

 

문화재 답사를 나가기 전에 대개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답사를 할 문화재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지역과 문화재에 대한 상식 등을 깨우쳐 간다. 그래야만 편안하게 답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이 귀학송은 이산광이 이곳으로 낙향하여 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 있는 안내판에는 이산광의 6대손인 이실이 심었다고 표기가 돼 있다. 6세손이면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실제로 귀학송이 수령은 500년 가까이 보인다. 그런데 왜 이산광이 아닌 이실이 심었다고 보령시 현장 안내판에는 기록을 한 것일까?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말로만 하는 문화재 사랑. 이 내용을 알게 될 후손들에게 부끄럽기만 하다.

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진지를 말한다. 흙이나 돌로 쌓아 적과의 교전시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고, 적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구조물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에 걸쳐 수많은 성곽이 있다.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에 소재한 보령성곽은 평지에 구축한 상으로 현재 충남 문화재자료 제146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성곽 일부만 남은 보령성

 

보령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 기존에 있던 성을 보강하여 쌓은 성이다. 원래 이 성은 고려 말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봉당성(고남산성)의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쌓았다. 현재 이 보령성은 남문인 해산루와, 해산루에 붙은 성벽 70m, 그리고 북쪽 성벽이 남아 있다.

 

 

현재 남문터에 남아 있는 보령성을 보면, 평지에 성을 축성한 관계로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성을 쌓았다. 남문 부근을 제외한 남은 부분은 바깥 부분만 돌로 쌓았다고 한다. 성의 둘레는 630m에 성곽의 높이는 3.5m 정도라고 한다. 처음 이 성을 지었을 때는 성벽을 오르는 적을 배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적대가 8개소, 남문과 북문, 동문 등 문루가 3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1432년에 성을 축조할 당시에는 제민당, 공아, 병기고 등 140여 칸의 간물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우물이 3개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한말 의병들의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지면서 모두가 다 소실되고, 현재는 남문인 해산루와 성곽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있는 일부 구간의 성벽과 성벽을 타오르는 담장이

 

조선왕조의 상징이었던 해산루

 

현재 충남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 보령성의 남문인 해산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지어진 누각이다. 해산루는 장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고, 양편을 성곽에 걸쳐 조성하였다. 예전에는 이 성곽 양편에 걸친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현재는 그러한 자취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 해산루는 당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전국에 걸쳐 같은 형식으로 조성한 관아문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누각은 상벽 위에 마련한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으며, 누각에 오르면 앞으로 펼쳐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마 이 곳에서 밀려드는 적을 섬멸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전략을 짰을 것이다. 남문 누각 정면에 걸려 있는 '해산루(海山樓)'라는 현판은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이라고 한다.

 

 

 

역사의 흔적엔 초여름의 뙤약볕만 남아

 

낮 기온이 30도를 오르내린다. 성벽에는 담장이 넝쿨이 타고 올라가 고풍스런 멋을 보인다. 남문 뒤편에 있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점심시간이라도 되는가 보다. 천천히 길지 않게 남은 성곽을 둘러보고 해산루에 올라본다. 그저 흔히 보아오던 누각이지만 이곳의 정취가 남다르다. 앞으로 펼쳐진 시골 작은 마을의 가지런히 뻗은 길에는 차 한 대가 보이질 않는다.

 

보령현은 고려 때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태종 13년인 1413년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효종 3년인 1652년에는 보령부로 승격이 되기도 했다. 그만큼 이곳이 중요한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읍성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하였고, 세종 14년인 1432년에는 현감 정대가 140여 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고 한다.

 

 

영의정 이산해가 썼다는 해산루 편액의 글씨(위)

 

처음부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이 되었다는 성곽이다. 임진왜란과 의병들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소실이 되었다는 관아와 성곽. 그저 역사가 어떠한 형태로 뒤바뀌었는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남은 해산루 인근을 보면 담장이가 타고 올라간 모습만 모아도 이 성의 오랜 역사를 가늠할 수가 있다. 뙤약볕으로 인해 흐르는 땀을 해산루에 올라 추슬러본다. 또 얼마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이마져도 존재할 수가 있으려나. 괜한 걱정을 하며 또 다른 길을 걷는다.

 

 

오랜 세월에 흐릿환 흔적의 편액과 해산루 위에서 바라다 본 한가한 모습의 보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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