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인청에 대해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칫 재인청이라는 곳이 어떤 특정한 전통예술을 하는 것처럼 포장이 되기도 하는 것을 보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던지 재인청에 속한 수많은 기예인들이 있었고 한 때는 모든 전통예술분야를 총괄하던 곳이 재인청이었다는 점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집단

 

재인청은 무부(巫夫)들이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창출하기 위하여 조직한 단체다. 재인청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도 고려조부터 전해진 교방청(敎坊廳)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재인청은 무부들의 조직이면서도 그 안에 화랭이, 광대, 단골, 재인 등 수 많은 예인들이 속해 있었으며 아주 엄한 규제가 있었다.

 

재인청은 경기도를 비롯해 충청과 전라도에도 있었으며 각 군마다 군 재인청이 도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고 하고, 군 재인청의 수장은 장령이라고 불렀다. 재인청에서는 선생 밑에 제자들을 두어 학습을 하게 하였으며, 전국에 산재한 많은 예인들이 이 재인청에서 학습을 하거나 재인청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재인청의 수장은 대방이라고 하였으며 3도(경기, 충청, 전라)의 재인청을 당시 화성재인청에서 총괄을 했던 관계로 화성재인청의 대방을 도대방이라고 하였다. 대방의 선출은 3명을 추천을 하고 그 이름 밑에 권점이라는 점을 찍어 다수표를 얻은 사람이 맡아보는 직선제 선출을 하였다.(사진 / 고 이동안 선생. 구글검색 자료 인용)

 

 

까다로운 규제속에 생활을 한 재인청

 

재인청은 그 규제가 까다로워 스스로의 천시 받는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당시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스승에게 예를 갖추지 않거나 주정을 하면 태장을 칠 정도로 엄한 규제 속에서 조직을 이끌어 갔다. 1920년대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서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한 인원이 3만 여명에 이르렀다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재인청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까다로운 규제 속에서 한 사람의 예인(藝人)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재주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끊임없는 학습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경기도 화성은 수많은 전통 예인들이 태어난 고장이다. 그 중에서 재인청을 기반으로 한 많은 예인들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출해 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인간문화재이셨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14세 때 남사당패들을 따라서 부모들과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고 가출을 강행했다. 그런 가출이 인연이 되어, 일생을 춤과 발탈로 한 생애를 보냈다. 아마도 그 누구보다도 많은 학습을 한 예인이며, 다양한 끼와 재주를 발산한 스승이셨다.

 

고 이동안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서 그의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그의 집안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히는 대신 서방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글공부 마다하고 광대의 길로

 

12살 때까지 그는 서당에서 천자문을 떼고 통감을 4권까지 배웠다. 아버지가 시키는 글공부를 하기는 했으나 실상은 공부보다도 할아버지가 부는 피리나 젓대를 몰래 가지고 놀거나 어름타기(줄타기) 흉내를 내며 노는 것에 더 재미가 팔려 있었다. 그가 열 두 살 되던 해에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왔다.

 

그 때부터 그는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이동안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그는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갔다.

  

14세의 어린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한 것이다. 그가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그의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 이재학에 이끌려 화성집으로 끌려온 그는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 눈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나와 버렸다.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광대 수업을 받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황금정에 있는 광무대에 취직을 하게 됐다. 여기서 앞으로 가기, 장단줄, 허궁잽이, 화장사위 등 17가지에 달하는 본격적인 어름타기를 배웠으며 장단에 맞춰 줄 위에서 살판(공중회전)을 하는 법도 배웠다. 이곳에서 춤선생 김인호(일명 복돌)와, 경기 잡가와 발탈의 명인 박춘재를 만나게 됐다.

 

김인호로 부터는 전통무용의 장단(젓대, 해금, 꽹과리, 북)과 춤을 익혔으며 박춘재로 부터는 발탈의 연희를, 김관보에게서는 줄타기를 전수받게 되었다. 그가 김인호로 부터 전수받은 춤이 <태평무>, <승무>, <진쇠무>, <검무>, <살풀이>, <엇중모리 신칼대신무>, <한량무>, <승전무>, <정진무>, <학무>, <화랑무>, <무녀도>, <극우>, <장고무>, <기본무>, <노장춤>, <신선춤> 등 30여 종에 이른다.

 

(주) 살풀이 춤의 사진지료는 어려서 부터 이동안 선생에게서 직접 재인청 춤을 사사한 고성주와 문하생들

 

고 이동안 선생의 춤은 지금도 활동을 하고 있는 내노라하는 무용인들에게 전수가 되었다. 그러나 막상 이동안 선생이 발탈로 지정을 받게 되자 많은 춤꾼들은 이동안 선생의 춤을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리지 않게 되었다. 운학 이동안 선생의 춤. 어릴 적부터 파란만장한 생애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그의 춤은 이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동안의 재인청 살풀이

 

운학 고 이동안 선생에게서 옥당 정경파 선생에게 전승이 된 살풀이는 현재 경기도지정 무형문화재 제8호이다. 살풀이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이 경기살풀이는 두개의 수건을 이용해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승무와 함께 지정된 살풀이춤은 무속 음악 가운데 살풀이라는 무악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경기도 재인청의 무부들은 원래 도살풀이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도살풀이를 추어왔다. 그러나 고 운학 이동안 선생은 처음에는 긴 천을 갖고 추었으나, 후에 그것을 반으로 갈라 두 개의 천을 이용했다고 한다.

 

원래 무당들이 신내기리 위한 수단으로 행했던 춤인데, 후에 광대나 기생들에 의해 교방 예술로 발전하여 춤의 내용이 한층 예술적으로 다듬어지고 아름다운 기법과 형식으로 계승 발전되고 있다. 살풀이춤은 고운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와 치마에 버선, 그리고 옷고름이 늘어진 복장에다 흰 수건을 가지고 추는 것이 특징이다.

 

화성 행궁 옆에 있는 정조의 어진을 모신 운한각. 풍화당은 이안청과 담을 사이로 그 뒤편에 자리한다. 협문을 들어서면 팔작집으로 조성한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화당이 있다. 이 풍화당은 재실이다. 정조의 제를 올리는 날이면 제관들이 와서 묵던 집이다. ‘풍화당(風化堂)’이란 사회의 풍속과 기강과 교화시킨다는 뜻이다.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은 조선 제22대 임금이었던 정조(재위 1776∼1800)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순조가 해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지은 전각이다. 조선조 제23대 임금인 순조는 아버지 정조의 지극한 효성을 본받기 위하여, 순조 1년인 1801년에 수원부의 행궁 옆에 건물을 짓고 화령전이라 하였다.



처음 지어질 당시의 화령전은 정조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정전인 운한각을 비롯하여, 이안청, 재실(풍화당), 전사청, 향대청, 제기고, 외삼문, 내삼문, 중협문이 있었다. 이 중 남쪽에 있었던 향대청과 제기고 건물은 남아있지 않다. 정전 현판의 글씨는 순조가 직접 쓴 것이다. 이곳에 속하는 건물들은 대부분이 정전인 운한각의 건축규범에 따라 지어졌다.

재인이 살았던 풍화당

화성 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1920년 정조의 어진이 일본인에 의해 창덕궁으로 옮겨진 후, 화령전은 운한각과 이안청, 그리고 풍화당 만이 남아있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인 고 이동안옹은 재인청 출신이다. 재인청은 수원을 중심으로 모인 예능인들의 집단이었다. 재인청에 회원이 많을 때는 3만 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거대한 예능집단이었나 보다. 한 때는 재인청에 속해있지 많은 사람은 기예조차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 이동안옹이 처음에 수원으로 내려와, 제자들을 가르친 곳이 바로 운한각 옆에 이안청에 기거를 하면서 운한각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어찌되었거나 당시 문화재를 바라보는 시각이 어이가 없단 생각이다. 어릴 적부터 이동안 옹에게서 춤을 전수받은 고성주(남, 56세. 팔달구 지동 거주)는 “처음에는 운한각에서 춤과 소리 등을 배웠는데. 겨울에 난로를 피우다가 불이 났어요. 그래서 문화재를 태운다고 쫓겨나 풍화당으로 옮겨, 그곳 마루에서 배우고는 했죠.” 라고 한다.



고 이동안 옹의 딸인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8호 승무 살풀이 보유자였던 고 정경파 선생은 이동안 선생이 서울로 올라가자, 풍화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고 정경파 선생의 첫 제자인 박경현 무용학원 원장은, “저희들도 운한각 안에서 춤을 배우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문화재를 보존한다고 해서, 선생님께서 풍화당으로 나와 기거를 했죠. 돌아가시는 날까지 풍화당에서 기거를 하셨어요.” 라고 한다.


단아한 5칸 건물 풍화당

풍화당은 단아하게 지어진 - 자형 전각이다. 장대석으로 기단을 놓고, 중앙에 세 칸은 마루방으로 꾸미고, 양편에 한 칸씩은 온돌방이다. 온돌방의 앞에는 높임마루를 놓고, 그 밑에 아궁이를 내어 불을 땔 수 있도록 하였다. 복도의 양편은 판벽으로 막았다. 마루방 세 칸의 뒤편으로는 판문을 내었고, 앞으로 낸 문은 열어 올려 위로 걸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의 주추는 네모나게 조성을 하였으며, 앞에 낸 협문을 통해 제를 지내러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다. 풍화당은 재실로 지어졌지만, 딴 곳의 재실에 비해 화려하지가 않다. 아마도 전각의 이름인 풍화당이란 뜻 때문인가도 모른다. 한 때 재인들의 풍각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풍화당. 역사는 그렇게 아픔을 놓고 이어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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